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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인물열전(100)
양재역 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었던 이언적(李彦迪)
[大東野乘 第21卷 海東雜錄 3 및 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여러 곳]
이 웅 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주자를 추모하여 그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온 것이라 함), 자계옹(紫溪翁),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이었으나, 등제하였을 때 중종의 명으로 언(彦) 자를 더하였다.
할아버지는 훈련원 참군 이수회(李壽會),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증 의정부 좌찬성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외조부 손소는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된 사람으로, 그의 가문은 경주 양동에서 손꼽히는 유력가문이었는데, 당시에는 이이(李珥)와 마찬가지로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솔서혼[率壻婚], 데릴사위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양동(良洞)마을에 있는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暾)의 손에 양육되고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함양 박씨 박숭부(朴崇阜)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으로 양자를 삼았으며, 서자로 이전인(李全仁)이 있다.
학문적으로는 주희의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달, 영남학파 학풍의 근간을 마련하였고,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文廟:공자를 받드는 사당) 종사(從祀)와 조선시대 최고 정치가의 영예인 종묘(宗廟)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 여성군(驪城君)의 작위를 받은 바 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고향인 경주의 자옥산(紫玉山) 안에 들어가서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며, 이름을 독락당(獨樂堂)이라 하였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등 화초를 심었는가 하면, 거소(居所) 좌우에는 책을 쌓고 세상일을 사절한 채 7년 동안, 고요한 가운데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1537년(중종 32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宗簿寺: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 첨정(僉正)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전주부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올린 글이 유명한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이다. 모든 정치현상은 군주의 심성에 달린 것으로, 왕은 모름지기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아울러 모든 백성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는, 올바른 정치의 근원을 ‘왕의 정심(正心)’에 달려 있다고 한 내용이다.
그는 이어서,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에는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에는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적소에 있으면서는 책상 위에 자계(自戒)하는 말을 썼는데, “나는 날로 내 몸을 세 번 반성하니, 하늘을 섬겨 미진(未盡)한 것이 없는가? 군친(君親)을 위하여 정성이 없지는 않았는가?”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곳이 있지는 않았는가?”였다.
그는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의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은 특히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하여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궁구하여, 그 본체를 밝히는 한편, 실현 방법을 설파하였다.
그가 지은「오잠(五箴)」의 자서(自序)에서는, “내가 나서 27세이다. 행동은 법규에 맞지 않고, 언어는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 많으며, 애써 배우나 도는 이루지 못하였다. 나이는 늘어가고 덕은 부진(不進)한데, 아! 오늘이 또 원단이다. 한 해가 또 바뀌는데 나만 홀로 옛날 그대로인 채 새로워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리하여 오잠을 지어 평생 동안의 근심거리로 삼겠다. 첫째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 둘째는 마음을 기르는 것, 셋째는 몸을 공경하는 것, 넷째는 과오를 고치는 것, 다섯째는 뜻을 돈독히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자 이전인이 부친이 죽기 전에 작성했던 것을 명종에게 상소문의 형태로 진상한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의 학문을 위한 8가지 조목을 열거한 것으로 앞서 이언적이 중종에게 올렸던 「일강십목소」와 같은 류의 도학주의적 군주론을 담은 글이다.
한편, 박종인의 ‘사위들이 만든 양동마을과 조선왕조 처가살이 청산 작전’(조선일보 2018.8.22, A20면)을 보면, “이언적은 외할아버지 손소가 지은 월성 손씨 종가 서백당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친영례를 받아들여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1568년(선조 1)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573년에는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었고, 묘소는 경상북도 영일군 연일읍 달전리에 있으며, 묘소 근처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2018.8.1.→8>26 개작.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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