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1.경북 인물열전 (101) 동방의 주자 퇴계(退溪) 이황(李滉).hwp
경북 인물열전(101)
동방의 주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大東野乘 第23卷 海東雜錄 5 및 新增東國輿地勝覽의 여러 곳]
이 웅 재
이황(李滉:1501[연산군]∼1570[선조 3])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초명(初名)은 서홍(瑞鴻), 자(字)는 경호(景浩)이고, 호(號)는 퇴계(退溪)인데, 청량산(淸凉山) 기슭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도옹(陶翁)·도수(陶叟)·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별호(別號)도 사용했다.
본관은 진성(眞城: 지금의 眞寶)으로, 경상북도 예안현(禮安縣: 현재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증 의정부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에는 어머니가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아버지 이식은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여, 이후 그는 홀어머니 춘천 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요, 이언적(李彦迪),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 김집(金集) 등과 함께 인신(人臣) 최고 영예인 문묘(文廟)와 종묘(宗廟) 종사(從祀: 配享)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사람이다.
12세에 안동부사를 지낸 작은아버지 송재(松齋)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이후 늘 병약한 삶을 살았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세 부인이 있었고, 나중에는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첩도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1528년(중종 23) 소과(小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534년 식년시에서 문과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외교 문서의 관리를 담당하던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子)로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1537년에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한편, 성균관 등에서 김인후(金麟厚), 노수신(盧守愼), 김안국(金安國)과 교분을 쌓기도 하였다. 1542년에는 충청도에 어사로 파견되었고, 1543년 10월 성균관의 교수직인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하지만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 6월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그해 10월 이기(李芑)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金䃴)와 같은 무리라는 탄핵을 당하고 파직당하였다가 곧 다시 복관되었다. 그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로 낙향하면서 퇴계(退溪)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게 되자, 부패한 중앙 관계에는 발을 붙이지 않으려고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에는 충청도 단양(丹陽)군수가 되었다. 정비석(鄭飛石)의 『명기열전(名技列傳)』에 의하면 거기서 기녀인 두향(杜香)을 만났다기도 한다. 그러나 곧 형인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의 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 중에는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등을 하사할 것을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니, 이것이 곧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였으나, 또다시 1552년 성균관 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이후로도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고 그때마다 누차 고사하였던 바, 1543년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고 한다.
명종은 이황을 아껴 1555년에는 낙향해 있던 그에게 음식물 등을 전하는가 하면 몰래 화공을 보내 도산(陶山)의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감상하기도 했다. 1558년과 1559년에는 공조참판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566년에는 공조판서, 예문관 제학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560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그곳에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나 권위, 편견을 두지 않았다. 이언적, 이현보 등과도 편지를 주고받는가 하면 기대승과도 편지로 논쟁을 하였는데, 그 논쟁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1567년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한 뒤에는 명종의 행장(行狀)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고,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병을 이유로 곧바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가, 선조가 특별히 교서를 보내 다시 부르자 상경하여 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경연에서 강론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선조가 계속해서 조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그 해 7월에 상경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면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9년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칭병 사양하고 낙향, 이듬해 70세의 나이에 평소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이 죽음)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비롯해 다수의 시를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저서들을 남겨 ‘동방의 주자’로 칭해졌는데, 그가 남긴 저술들은 1958년 대동문화연구원에 의해 『퇴계전서(退溪全書)』로 편찬되었다. (2018.11.21.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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