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경북 인물열전(103) 흔씨에서 권씨, 무오사화 때 처형된 권오복(權五福)

거북이3 2019. 4. 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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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인물열전(103)

           흔씨에서 권씨, 무오사화 때 처형된 권오복(權五福)

                                                       [大東野乘 第23卷 海東雜錄 6 新增東國輿地勝覽]

                                                                                                                                                              이 웅 재

 

  권오복(權五福:1467~1498)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 본관은 예천(醴泉)이며 출신지도 예천이다. 증조부는 권상(權詳), 조부는 권유손(權幼孫), 아버지는 별좌 권선(權善),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계전(李季甸)의 딸이며, 그는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였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예천 권씨는 본래 흔()씨로,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고려 중엽 정7품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무관직인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냈으며, 안동 권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 후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6세손 흔섬(昕暹) 대에 고려 29대 충목왕이 등극하였는데 충목왕의 휘(:이름)가 바로 흔()이어서 기휘(忌諱:임금이나 성현의 이름을 피해 쓰지 않는 일) 풍습을 따라 시조인 흔적신의 처가 성인 권씨를 새로운 성으로 정하고 본관을 시조의 세거지였던 예천으로 하였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으로 당시의 청류(淸流)와 교분이 넓었고, 특히 3세 연상인 김일손(金馹孫)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1486(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간 후, 봉교·수찬·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여러 가지 문화사업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1489년에는 당시 요동에 와 있던 중국의 문신 소규(邵奎)에게 소학의 의문점을 물어 번역하라는 명령을 받고 의주까지 갔으나 계획이 취소되어 돌아온 적도 있었다. 1491년에는 어전에서 치국여팽소선론(治國如烹小鮮論)을 지어 상을 받았으며, 1493년에는 사율원(司律院)에서 율관(律官)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1494년에는 거제현에 왜구가 침입하자 만호 이극검(李克儉)이 도망한 사건이 일어나서 그 전말을 심문해 보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예문관을 거쳐 요직인 홍문관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전념했다가 홍문관 교리가 되었는데, 새 임금 연산군의 자질이 의심스러워 조정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1496(연산군 2)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향리로 돌아갔는데, 1498(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 문하에서 배워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던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과 가까웠던 관계로 향리에서 잡혀 올라와 김일손, 권경유(權景裕) 등과 함께 처형되었으니, 나이 32세 때였다.

  그는 필법이 굳세고, 문장이 맑고 강하여 많은 시문을 남겼으나 처형을 받은 다음, 대부분의 글들이 산일(散逸)되었는데, 다행히 형 권오기(權五紀)가 남은 것을 모아 책으로 엮어 보관한 덕으로, 종손 권문해(權文海)1584(선조 17) 대구부사로 있을 때, 문집 수헌선생집을 간행할 수가 있었다.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고,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해동잡록(海東雜錄)6에서는 권오복과 관련된 글들을 여러 책을 인용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만 보자. 먼저 그가 극형을 당하게 된 일과 관련된 기록을 보인다.

  “흉악하고 망극한 변을 만나, 사형에 쓰는 도구가 앞에 있어도 굳게 버티고 어지러운 모습이 없이 조용히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의기와 절개의 굳셈은 천성임을 어찌하랴. ! 만사가 끝났고 구원(九原:黃泉)은 닫혔다. 홀로 그 기침과 침의 작은 방울과 정하게 빛나서 발해 내는 것이 하늘에 비치면 북두성을 쏘고,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전형(典形)을 방불하게 남기고 무궁한 먼 생각을 붙였다. 책 가운데의 여러 작품은 하나하나가 마음의 깊은 속에서 흘러 나와서 정성스럽게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깊은 생각과 간절하게 어버이를 그리워하고 아우를 생각하는 절실한 심정이 있다. 한 조각 정성이 어구(語句) 곁에 섞여 엉키었으니, 저 무도한 그릇된 형벌이 또한 어찌 백세에 없어지지 않고 흘러 내려가는 꽃다운 이름을 끊을 수 있으랴. 교리(校理)로서 어버이를 공양하려고 외직을 요청하여 야성(野城:지명)에 나왔는데, 원이 된 지 3년 만에 잡혀 가서 나이 겨우 32에 죽었다. 그 글의 문채가 매우 맑고 기격(氣格)이 삼엄(森嚴)하니, 글을 보는 사람이 스스로 마땅히 알 것이다.”-소고집서(嘯皐集序)

  다음은 그의 문집이 나올 수 있게 된 일을 적은 유성룡(柳成龍)의 글이다.

  “우리 성종이 인재를 아끼고 기르며 풍절(風節:풍도[風度]와 기절[氣節])을 격려하여, 선비의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 많이 아울러 나왔으니 성대(盛大)하다고 하겠는데, 액운의 기회를 만나 한 번 패하여 땅에 떨어지니 비교하건대 봄바람이 바야흐로 이르러 초목이 무성하다가 갑자기 얼음서리의 참혹함과 비바람의 재앙을 만나서 부서지고 꺾어진 것 같아서 쓸쓸히 남은 것이 없으니, 또 매우 슬픈 일이다. 집에 간직한 유고(遺稿)가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는데, 달성부 수령[達城府伯] 권후(權侯:후는 지방 수령이라는 뜻) 아무개는 바로 수헌 선생의 종손(從孫)으로 곧 뜻을 다하여 모아서 재() 나무로 판을 새기고 또 당시의 죄적(罪籍)을 뒤에 붙였으니, 백년 뒤에 수헌의 문장과 기절(氣節)을 사라지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한 것은 아무개의 힘이다.”-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무오당적(戊午黨籍) 발문(跋文)

  성종이 돌아가시자 지은 시를 보자.

  “어쩌면 이렇게도 상기(祥期)가 번개 치듯 빠를까 / 如許祥期一電忙

    선릉(성종의 능)에 소나무의 달빛이 정히 거칠고 쓸쓸한데 / 宣陵松月政荒涼

    하늘가에 통곡하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 / 天涯痛哭孤臣淚

    하물며 벼슬 동료와 떨어져서 흰옷으로 가는 것이랴 / 況隔官僚縞素行”-탁영자(濯纓子:김일손)에게 붙인 시(19.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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