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104)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지에서 죽은 권벌(權橃).hwp
경북 인물열전(104)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지에서 죽은 권벌(權橃)
[大東野乘 乙巳傳聞錄, 己卯錄補遺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이 웅 재
권벌(權橃:1478[성종 9]~1548[명종 3])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 등이며, 작위는 길원군(吉原君)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태어난 곳도 안동의 북후면(北後面)이었으며, 곧 안동부 내성면(乃城縣) 유곡리(酉谷里, 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로 옮겨서 생활하였다.
할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과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낸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증 의정부 영의정 권사빈(權士彬),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주부(主簿)를 지낸 윤당(尹塘)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4년에는 정시(庭試)에도 급제했지만,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러 삭방(削榜)되었다. 연산군은 김처선(金處善)의 직간에 노하여 그를 죽인 후, 그의 이름자 두 글자는 사용을 금하라고 명하였는데, 권벌의 답안지에 ‘처(處)’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1507년(중종 2)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홍문관 수찬·부교리·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 지평 시,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를 규탄하여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4년에는 이조정랑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1517년 장령을 역임하고, 1518년 승정원 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와 예문관 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당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였는데 이때,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뒤 아버지가 연로하고 풍병(風病)이 있다는 이유로 외직을 자청하여 삼척부사로 나갔다.
1519년 11월에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 밀양부사를 거쳐, 한성부 좌윤으로 지내다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후, 형조참판에 이어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이후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가 얼마 뒤 중추부 지사로 전직되었다.
1539년 7월 7월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 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연경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명나라 황제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의 칙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이후에는 춘추관 지사(春秋館知事)에 임명되어 세자 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여 세자 인종을 가르쳤다.
1540년 병조판서·한성부 판윤, 1541년 5월 예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1544년 중종이 죽자 그해 11월 빈전도감(殯殿都監:‘빈전’은 예전에,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에 참여하였다. 1545년(인종 2) 의정부 우찬성이 되어 의금부 판사를 겸하였고, 인종이 후사 없이 병으로 갑자기 죽고, 1546년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을 대신하여 7월 원상(院相: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545년 8월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대윤 윤임(尹任)의 세력을 배척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옹호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다. 을사사화 직후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우의정 이기(李芑) 등이 반대하여 훈적에서 삭훈(削勳)되고, 중추부 지사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 탄핵을 받아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7년에는 한글로 문정왕후를 비방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구례(求禮)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평안도 태천(泰川)으로 이배되었다. 처음 유배 시에는 의금부 관원이 집에 도착하자 태연한 기색으로 글을 지어 아들 권동보에게 주면서, "범충선(范忠宣:옛날 북송 때의 재상)은 나이 70에도 만 리나 되는 먼 길을 갔으니, 너의 아비가 받은 죄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관대한 은전이다. 그리고 나는 선왕의 은혜를 저버림이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박장(薄葬)을 하라." 하였다. 그 후 다시 삭주(朔州)로 이배되었다.
1548년(명종 3)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등이 모여서 양재역 벽서 사건 관련자 중 가산을 적몰하지 않은 자들을 논핵할 때, 그의 이름도 언급되었지만 명종이 듣지 않았다. 이기 등은 그가 안명세의 문집에 이름이 언급된 것까지도 지적하는 등 그를 반드시 사형시키려고 온 힘을 다해 계청하였으나, 문정왕후가 따라주지 않았다. 그 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봉화현(奉化縣) 유곡산(酉谷山)의 아버지 묘소 아래에 있다. 행장은 1569년 6월 퇴계가 짓고, 이후 신도비문은 박순(朴淳)이 쓰고 정경세(鄭經世)가 글씨를 찬하였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새겼다.
1567년(명종 22) 신원(伸寃)이 되어, 선조 즉위 후에는 좌의정에 추증되고, 1588년에는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591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는가 하면 불천위(不遷位)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늘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저서로는 『충재문집(冲齋文集)』이 있다. (19.6.30.15매)
'경북인물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북 인물열전(107)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 구수복(具壽福) (0) | 2019.11.23 |
---|---|
경북 인물열전(105)의술에 정묘하여 내의원 제조를 겸임했던 승지 박영(朴英) (0) | 2019.10.01 |
경북 인물열전(103) 흔씨에서 권씨, 무오사화 때 처형된 권오복(權五福) (0) | 2019.04.12 |
경북 인물열전(102)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0) | 2019.01.04 |
경북 인물열전(101) 동방의 주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0) | 201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