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재 칼럼("스포츠 한국",1972~)

☆스포츠(Sports) (이웅재 칼럼,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4월호, p.64.)

거북이3 2020. 3. 12. 12:44


스포츠(Sports)(이웅재 칼럼,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4월호, p.64.).hwp



스포츠(Sports)

                      (이웅재 칼럼,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4월호, p.64.)

 

  스포츠(Sports)이 희승 편저 국어 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육상 경기야구정구수영보우트-레이스 등으로부터 등산사냥에 이르기 까지의 유희경쟁육체적 단련의 요소를 지니는 운동의 총칭

  여기서 재미 있는 것은 유희경쟁육체적 단련이라는 단계적 표현이다. 이것은 확실히 단순한 열거법으로 쓴 것이 아니고, 분명 점층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처음 스포츠를 아마튜어(Amateur)로서 시작할 때에는 다분히 유희적인 입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즉 오락(Recreation)으로서 즐긴다는 것이다.

  이 어령 씨의 인간이 외출한 도시에서 보면, “스포츠는 문명에 지친 현대인에겐 나날이 절대화되어가고 있는 존재다. 스포츠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로서 기계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구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도피구라는 말의 어감이 나쁠지 모르지만, “기계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구라는 말은, , “인간적 생활로의 귀환점이라는 반대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어투(語套)라 할 수 있겠다. 스포츠는 바로 인간을 비인간적인 요소로부터 인간적인 생활로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 국민 모두 11운동 주의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유희적인 스포츠의 시기가 지나면, 그때는 경쟁으로서의 심리적인 요소를 지니게 되는 것도 사실이겠다.

이 때는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된다. 자칫하다간 이 시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을 문턱에 두고 도중 하차를 하기도 하고, 사회 일반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설익은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느 한 분야에서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스포츠에서도 적용시켜 볼 수가 있다고 생각된다.

  승리라든가. 실력이 있다는 그런 자만 감에서 빚어내는 허다한 실수(?), 예컨대, 경기에서의 비신사적인 임전 태도와 같은 것은 설익은 경쟁 의식의 노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필요 이외로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란 이것은 정말로 없애야 할 요소이다. 자만심이란 자기 멸망의 구렁텅이임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소치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자기를 이탈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명백히 깨달아 항상 주의함으로써 낙오됨이 없어야 하겠다.

  원래 승리라는 것은 힘으로서의 억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희랍 신화에서의 승리의 여신인 니케(Nike, Nice)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같은 날개가 있고, 하늘을 날으는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승리의 상징은 관을 쓰고 종려 가지를 가지고 있는 로마의 빅토리(Victory) 여신도 바로 희랍 신화의 니케의 모습을 그대로 지녔다고 한다. 승리란 어디까지나 평화스러운 환경에서 정정당당히 얻어져야 하는 것이다.

  GL라이스는 좋은 스코어는, 이겼느냐 졌느냐보다, 잘 싸웠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를 기록한다.”고 말한 바 있다. G엘리어트도 패배보다 더 나쁜 승리도 많다고 하였고, 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은 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폴리페르콘이 야음을 타서 다리우스왕을 치자고 하는 제안에서, 그는, “안 된다. 승리란 훔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프랑스의 테니스 명선수 코셰와 미국의 명선수 칠덴이 파리에서 개최된 데이뷔스 컵 쟁탈전 때의 신사적인 에피소우드 한 토막을 보자.

  칠덴의 서어브가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코셰가 받지 못했다. 심판이 아웃!”을 외쳤다. 그러나 코셰는 세이프!”라고 공이 떨어진 지점인 라인을 지적했다. 다음 코셰가 서어브하자 칠덴은 그것을 일부러 라인 밖으로 쳐내서 코셰에게 1점을 득점시키게 했다고 한다.

  이 두 선수의 일화는 우리가 본받을 만한 훌륭한 스포츠 정신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올바른 스포츠 정신과 겸손을 배운다면 그는 반드시 훌륭한 체육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쥴이러스시이저도 관대(寬大)와 고매(高邁)함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힘을 지탱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승리를 얻는 새로운 방식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겸손을 배우면서 경쟁 시기를 지나게 되면, 그때는 육체미 단련으로서의 스포츠의 의의(意義)를 갖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육체적 단련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정신적 단련까지도 함께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과 육체는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육체 없는 정신이 있을 수 없고, 정신 없는 육체 또한 존재할 수가 없다. 이 둘은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둘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8자 타령을 잘 한다. 생년, 생월, 생일, 생시의 사주(四柱)에 해당하는 간지(干支)로 이루어진 여덟 글자를 팔자(八字)라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미신적인 도참설을 이루지만,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과학적인 요소는 되지 못한다.

단지 여기서 8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글자의 모양이 재미 있어서이다.

  그 글자는 0(Zero)가 두 개 상하로 합치어 된 글자이다. 그 글자의 한 쪽을 육체로 본다면, 다른 한 쪽은 정신이랄 수가 있다.(이것은 내용과 형식, 남자와 여자그 어느 것이나 서로 대립적 관계를 지니면서도 완전 분리가 불가능한 상관 관계를 가진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어느 한 쪽만 있고 다른 쪽이 없으면 그것은 0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 단련에서도 정신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스포츠만을 알고, 거기에서 일가견을 이루었으니 계속 그곳으로만 정진하고 다른 사회적 지식이라든가에 소홀하게 되면, 그는 또 HL멘켄이 “Henthen 시절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 상식을 싫어하듯 나는 스포츠를 맹렬히 싫어한다.”

  그러므로 스포츠맨은 스포츠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스포츠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면만 잘 하고, 다른 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절룸발이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절룸발이의 스포츠맨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나 존경할 수 있는 원만한 인격을 가지고 어느 곳에 가더라도 온전한 품위를 갖춘 그런 훌륭한 스포츠맨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노력하고 공부하는 스포츠맨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포츠계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며, 우리의 국력도 배강(培强)되어 갈 것이다.

  그것은 또 북괴의 야비한 승리를 도둑질하려는 성욕을 분쇄하고 평화로운 조국 통일을 성취시킬 수 있는 지름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배우고 노력하는 스포츠맨이 되어야 하겠다. <필자: 경성중고등학교 교사>

 

20.3.11. 입력. 원고지18.

  성과 이름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생각되어진다와 같은 2중 피동은 잘못이었다. ‘날으는’, ‘절룸발이같은 표현은 필자가 잘못 썼던 것인지, 편집자의 실수인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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