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이웅재 칼럼④,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6월호, pp.78~79.).hwp
『막내』
(이웅재 칼럼④, 국배판 월간 『스포츠 한국』72년 6월호, pp.78~79.)
「막내」라면「맨 마지막으로 난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옛말에「막나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뜻이「끝나다」인 것을 보면,「막난 사람」, 즉「끝막음으로 난 사람」이라는 데서 생긴 말인 듯하다. 사투리에도「막난이」「막나이」가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더욱 명료해진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유명씨(有名氏)들이 바로 그「막내」에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뭐 역사적인 거목(巨木)들이 전부 막내동이라든가 하는 얘기는 아니다. 현대 이전에는 무슨 일에고 세습제가 채택되어진 시대이므로 막내의 빛은 감추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슨 대왕이라던가 이름난 재상들의 명단 속에는 막내의 이름이 그리 많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 하부 구조인 평민의 사회라든가, 전설, 설화의 세계에서는 막내가 「이인(異人)」또는「기인(奇人)」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예가 적지 않은 것이다.
어려서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그 구수한 옛날얘기의 용감한 주인공들은 거개가 막내였었다. 흉악한 짐승에게, 혹은 도적에게 잡혀간 한 나라의 공주를 구해주면, 많은 상금과 함께 높은 벼슬은 물론, 부마로 삼겠노라는 임금님의 비통한 방(榜)을 읽고 모여드는 많은 젊은이들, 이야기는 점점 축소되어가서 어떤 3형제의 등장으로 흘러가고, 그러다 보면 맏형이 괴물에게 피살당하고, 두째가 또 소식이 감감해지게 되고, 그러다가 종내는 막내가 나타나 좌충우돌 용맹을 떨치다 보면, 괴물은 퇴치되고 막내는 천하 일색의 공주를 구해 말 안장에 태우고 행복한 개선을 하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마음씨 고약한 형님에게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고도 착한 마음으로 묵묵히 고생을 감수하던 막내동이(동생) 「흥부」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일약 고래등 같은 대궐집의 주인공이 되는가 하면, 사냥 잘하는 동생집 개를 강제로 빌려간 후, 말 안 들어 잡아먹어 버린 개벽다귀를 주워다가 마당 앞에 무덤을 만들어준 동생은 그 무덤 위에서부터 이름 모를 나무가 싹이 터서 자라고 자라서 나중에는 옥황상제의 돈독(금은 보배가 가득 쌓여 있는 창고쯤 되리라)을 찔러 거부(巨富)가 되고, 그것을 흉내 내던 형은 개뼉다귀가 변신하여 자라난 나무가 옥황상제의 똥독을 찔러주어 버려서 똥벼락을 맞고 죽어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고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는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가 고구려를 찾아오매, 그에게 왕자의 자리를 물려주고는 함께 남하하다가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온조는 하남(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나라를 세웠던 바, 형인 비류는 새나라 건국에 실패, 동생 온조에게 찾아가 보니 그곳은 나라가 번성하고 있는지라 자괴(自愧)의 마음에 자결을 해 버리고 말았고, 온조는 이에 미추홀의 백성들까지 받아들여 나라가 커지매 그 이름마저도 십제에서 백제로 고치지 않았던가?
무척 무료하던 시간에 우연히 주간지를 펼쳐보던 필자는 「1972년도의 미스코리아 탄생」이란 기사에 눈을 돌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36명의 미인들이 경염(競艶)을 벌인 끝에 8명의 미스‧코리아가 탄생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 8명의 신상 명세서가 씌여 있었다. 옆에서 있던 친구들은 「총각 선생이 미인 기사에 열을 낸다」고 놀려대왔지만, 이왕에 보기 시작한 터이라, 두 손을 내저어 가만히들 있으라는 표시를 하고는, 그 8명에 대한 통계를 내어 보았더니, 막내가 5명으로 단연 우세를 보였고, 맏딸이 2명, 그리고 1명은 몇 째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그 막내도 형과 동생 단 2명 사이에서의 막내가 아닌, 2남 5녀 중 막내, 5남 1녀 중 막내, 1남 4녀 중 막내, 2남 2녀 중 막내, 3녀 중 막내, 등으로서 각각 7,6,5,4,3명 중의 막내딸이라는 아주 숫자마저도 나란한 것이 아닌가!
한 동안은 미녀 중에서도 막내가 많다는 사실에 역시 막내가 좋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얼마전 신문에서 I.Q.는 맏이 월등하게 좋고, 활동력은 막내가 낫더라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을 떠 올리었다.
비로소 모든 것이 화안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I.Q.와 활동력과의 관계-중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활동력」을 「노력하는 힘」이란 말로 바꾸어놓는다면 그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교육 원리에서 학습의 성취도를 얘기할 때엔 I.Q.와 환경을 들어 말한다. I.Q.를 저변으로 하고 환경(환경 속에는 학습 활동도 포함시킨다.)을 높이로 한 직사각형의 넓이―그것이 바로 학습의 성취도(학습효과)라는 것이다.
바로 이 원리에 입각하여 「맏이」와 「막내」의 유명도(有名度-社會進出度)를 측정하여 본다면 이는 분명 I.Q.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 실감나는 형상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습관 자체에서부터 「맏이」보다는 「막내」가 더욱 활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대가족제에서의 「맏이」는 가장(家長)의 책임을 물려받게 되므로써, 자기 개인만의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을 위한 노력의 기회가 삭감되는 반면, 「막내」에게는 지워지는 책임이 적으므로 자아 계발을 위한 활동의 기회가 중대하는 것이다.
「막내」의 「막」을 「끝남」의 「막」으로 보아야 함을 일단 제쳐 놓고, 「마구」라는 뜻의 부사에서 그 뜻을 따 온다면(「막가다」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린다.」는 뜻이 있듯이) 「막내」란 「마구 행동하도록 낳아진 사람」,「망나니」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 그것은 또다시「자신의 마음대로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미인의 대다수가 막내였다는 사실도, 자신의 용모를 자신이 가꾸고 싶은 대로 마음껏 가꿀 수 있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너무 비약적인 논리일까?
「미는 잘 익을 과실이며, 그것은 썩기 쉽고 오래갈 수 없다.」는 베이컨의 말을 생각해 보더라도, 잘 익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기다림의 시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또 그것이 썩기 쉽고 오래갈 수 없다는 데서, 그 미를 미인 채로 보전키 위해서는 또 얼마나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도 함께 생각해 볼 수가 있으며, 또 한편 「내가 미인이노라」는 자만심이란 곧 그 미인의 마음을 썩게 만들고 오래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세상의 모든 「막내」들―우리들은 모두 「막내」이기 때문에 좋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누구보다도 더욱 피나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맏이」들―또 우리들은 노력만 한다면 「막내」들보다 더욱 축복 받은 우리들의 「총명」으로 말미암아 좀더 높고, 좀더 넓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정형시인 향가의 최초작품 「서동요」에 얽힌 설화를 한번 살펴 보자.
서동요는 백제의 30대 무왕(이름은 璋)의 소작이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이 「서동(薯童)」이었던 바, 서동이란 「맛동」,「막동」이란 뜻이라 한다. 그를 「末通大王」이라 칭하는 것을 보더라도 「맛동」=「막동」임을 알 수가 있겠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큰 인물이 될 바탕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비 없는 자식으로서 어려서부터 「마(薯)」를 캐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맛동」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막동」이었기에 자유로왔고, 해서 신라 26대 진평왕의 세째딸 「선화공주」의 미색(美色)을 전해 듣고는 과감하게도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慶州]에 잠입하여, 동네방네 떠돌아다니며 어린애들을 뫃아 놓고 「마」를 나누어주고 노래를 가르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노래가 바로 「서동요」이었는데, 내용을 현대어로 바꾸어 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하여 두고
맛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잔다.」
일개 마를 태서 파는 친구가 일국의 공주를 넘볼 수 있었다는 그 용기는 가상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만의 짝사랑도 아니고, 공주에 대한 헛소문까지 퍼뜨려 공주는 밤마다 자기를 사랑하며 지낸다는 스캔달을 퍼뜨려 놓았다니, 우리 「막내」는 아마도 모가지가 한 서너 개쯤은 여벌로 준비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막내」는 그 노래로 인하여 쫓겨난 선화공주를 아주 멋드러진 수법으로 나꿔챘고, 게다가 2중 3중으로 몰려오는 복(福)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선화 공주가 쫓겨날 때, 그미의 어머니가 몰래 싸 준 금덩어리를 보고, 그런 물건은 자기가 마를 캐던 산중에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므로써, 공주와 함께 주말은 항상 금을 캐는 것으로 소일했고, 그 금을 당시의 고승(高僧)인 지명(知名) 선사의 힘을 빌어 하루 밤 사이에 신라궁으로 전보 송금을 하였고, 이에 진평왕의 감사 메시지가 T.B.C.테레비죤을 통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방영(放映)되므로써 인기가 극에 달하였고, 마침내는 그 인기로 인하여 왕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백제 무왕의 출세란 그의 목을 걸어놓은 모험에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고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노력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복(福)의 문턱으로 인도해 주는 사자(使者)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노력하자, 노력하자, 항상 노력하자.
※2020.3.14.입력. 원고지 24매.
‘채택되어진’,‘씌여’같은 2중 피동을 쓴 것은 지금 보아도 나 자신이 못마땅하게 생각되는 측면이고, ‘기회가 중대하는’, ‘뫃아 놓고’는 편집자의 잘못으로 여겨지는 부분이며(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가 나오기 이전이라서 글 쓴 사람의 글이 e-mail로 전송될 수가 없어, 원고지로 보낸 글을 편집자가 편집하던 때였다. ‘개벽다귀’는 같은 글 속에서 ‘개뼉다귀’로 제대로 표기된 것이 있는 것도 이런 점을 반증해 준다.) 막내둥이’,‘두째’,‘스캔달’같은 것은 당시의 표기법 등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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