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세
(이웅재 칼럼⑬,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4월호, pp.78~79.)
「너 우리집 앞으로 지나다니기만 해 봐라!」 가끔 어린애들끼리 장난을 놀다가 서로 다투기라도 할 적이면 흔히 하는 소리다. 그러면, 상대방 아이는 거기에 뒤질세라 대꾸하는 것이다. 「잘나빠진 것 가지고 다 세도야! 오래두 안 간다, 안가!」
우린 아주 어려서부터 이렇게 텃세를 부리며 살아왔다. 자리를 먼저 잡았다고 부리는 세도가 이른바 「텃세」다. 어린애들의 그 텃세라는것은 가만히 보면, 일종의 허세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잘나빠진 것 가지고 세도」라는 말도, 까짓 「허세만 부리면 최고냐는 뜻으로 새겨 들을 수가 있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나도 너에게 못지 않은 자랑거리가 있노라는, 너도 내게 아쉬울 때가 있을 거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는 말이기도하다. 그러니까 남의 허세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듯하면서도 역시 무언가 미진한 듯한 느낌을 가지고 내게도 세도를 부릴 만한 그 무엇이 있노라는 뜻이 은연 중에 포함되어 있는것이다. 말하자면 「허세」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허세」에 휘말려 들어가는 꼴이라 할 수있겠다. 그래서 그 허세에 아첨하기 위하여, 그 상대방 아이는 얼마 후 누룽지라도 한 움큼 움켜 가지고 와서 같이 놀자고 한다던가, 아니면 그 허세에 대항하기위하여 누깔사탕이라도 야금야금 빨아 먹으면서 허세를 부리던 아이의 약을 올리게 마련인 것이다.
「허세」란 「실속이 없는 마음의 자세」다. 그것은 약간뒤가 켕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씀씀이다. 그래서 허세는 「믿을 만한 것」을 찾게 된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런 건덕지도 없는 허세란 너무나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므로 해서 오히려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 더욱 커다란 속쓰림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세를 한 번 부려보고 난 사람은 자신의 「허세 철학」을 발전시키게 된다. 「비빌 언덕」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원래가 유한한 존재이고 보니 모든 물질적‧정신적인 소유에 빈틈이 없을 리 없고, 그러다 보면 한번도 허세를 부리지않고 제 실속대로 살아가기란 힘든 것이다. 어차피 부려야 할 허세라면 부리고 난 후에오는자기반성―즉, 그 씁쓸한 뒷맛, 유쾌하지 못한 그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비빌 언덕」을 찾아보게 됨은 또한 당연지사라 하겠다. 그래서 허세는 발전한다. 허세가 허세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허세가 그 속에 실속을 찾게되는 것이다.
「냉수 먹고 갈비 트림한다」는 말이 있다. 허세를 부리는 자를 비양한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벌써 「비빌 언덕」을 눈꼽만치라도 지니고 있다는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냉수」라도 먹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허세는 점점 자라나서 (실속과 손을 잡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허세」가 「허세」로써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허세」만큼의 값어치를 지니게 되는 예도 허다하게 생겨나게 되었다. 「허세」를 위해서 최대한도의 자기 능력을 총동원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오기(傲氣)」다. 그리고 이 「傲氣」는 바로 「오기(五氣)」로서,
①나의 총력을 기울여서,
②남을 꺾으려는(즉 나를 위하자는) 「二氣」(利己)에다가,
③대의명분을 살려,
④자기 자신을 합리화시켜 「四氣」(士氣)를 높이고,
⑤자신의 생각을(허세를) 끝까지 밀고 나가자는(지조를 지키자는) 생각이다.
남자는 「오기」가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따지고 보면, 그 오기란 적당한 때 쓰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 쓰면 좋지 않은 것이다. 우리 나라 고시조 중에서 충의(忠義)를 읊은 시조에 圃隱 先生의「丹心歌」와 梅竹軒(成 三問)의 「忠義歌」가 있다. 두 시조가 모두 「이몸이 죽고 죽어」「이몸이 죽어가서」로 죽더라도 충의를 지키겠다는(너무 격하시키는 해석일지는 몰라도 「오기」를 지키겠다는) 노래다.
「丹」이란 水銀과 硫黃의 化合物로서 赤色를 띠는 물질이라 하며, 「呂氏春秋」에 「丹可磨而不可奪其赤」이오, 「石可破而不可奪其堅」(「丹은 가루를 만들 수는 있어도 그 赤色을 없앨 수 없고, 돌은 깨뜨려 버릴 수는 있어도 그 단단함 을 없앨 수는 없다.」)이라고 하여, 「丹心」이란 「丹과 같이 붉은 마음, 변하지 않는 충성심」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임 향한 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한 포은선생의 말은 「오기」의 極이 아니고 무엇이랴. 같은 「오기」라도 梅竹軒의 시조는 그 격조가 떨어진다 하겠다. 우선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 되었다가 하는 말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에 대하면 무척 소극적인 「허세」다. 후자의 「죽음도 不辭하고」보다 패배 의식을 감지한 「죽어 가서」가 그렇고, 「蓬萊山」이란 가상적인 山(발해 동쪽에 있다고 하는, 方丈山, 瀛洲山과 함께 三神山의 하나 이를 金剛山의 여름 명칭과 같다고 해서 金剛山으로 생각함은 잘못임)에 가서 낙락장송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겠다는 말 역시 정정당당하게 맞서겠다는 「오기」가 못 되고 상대방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비해 있다가 아무도 없을 때에야 혼자서 큰 소리 쳐 보겠다는 것이니, 무척 뒤가 켕기는 「오기」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아이들이 제 힘으로 감당할 능력이 없을 때 「두고 보자」고 하는 식이 아닌가. 거기에 비해서 포은 선생의 시조의 결귀는 그 얼마나 정정당당한 못섬이냐.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易姓革命에 맞선 포은 선생의 대의명분은, 매죽헌의 先王(世宗大王)의 고명(顧命)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자기 합리화보다 훨씬 上位한다고 보여지지 않는가.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 먹은 李 完用은 역적의 소리를 들어 싸다. 나라를 바꾸려는데 맞선 포은 선생의 「오기」는 길이 칭송받아 마땅하다. 매죽 헌의 충의를 나쁘다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린 나이로 임금 구실을 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초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위태로와짐을 보고 야심 있게 일어선 수양대군을 나무라고프지도 않은 것이다. 신 숙주 가 수양대군을 세조대왕으로 모셨다고 해서 역사가들이 신 숙주를 헐뜯지는 않는다. 더러, 신 숙주의 아내가 절의를 지키지 못하고 귀가한 남편을 보고 자신의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글을 쓴 문학가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 얘기이다. 그것은 수양대군을 싫어하던 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 효온의 소설적(허구적) 기록을 보고, 그것을 소재로 작품을 씀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왜곡시킨 데 불과하다. 신 숙주의 아내는 死六臣 등이 새남터에서 사형을 당하기 몇 달 전에 벌써 세상을 등졌던 것이고, 더구나 자살 아닌 병사였던 것이다. 한때 낙락장송이 절의의 상징으로 되어, 우리 나라 산이라는 산에는 허구헌날 목재로서도 유용하지 못한 소나무만 심어 놓아서 쓸모있는 나무가 발 디딜 자리를 없애 놓고는, 송충이에 약한 소나무들 이 전부 말라 죽는 바람에 모두가 벌거숭이산(물론 일제 때의 도벌이 더 큰 원인이겠지만)이 되도록 만들어 준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죽헌의 충의를 굳이 나무라지는 않는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동봉 김 시습도 나중에는 세조를 도와 불경의 간행에 참 여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오기」는 부리지 않아도 되었을 「오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는 것뿐이다. 죽지 말고 세조의회유에 따라 좀 더 커다란 업적을 남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든다는 것뿐이다. 적당한 때에 「오기」를 부리자. 필요할 때에 「허세」를 부리자. 아무때나 「텃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 먹으려고 뒤따랐다. 토끼는 사력을 다해 도망하여 다행이 제 굴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호랑이가 토끼를 놓친 분함에 아직도 씨근거리고 있는데, 토끼란 놈이 굴 속에서 얼굴을 빠꼼이 내밀고 호랑이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뒤로 벌렁 나자빠져 죽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요새 심심찮게 듣는 수수께끼다. 도대체 왜 죽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상대방의 등덜미에다 대고 수수께끼의 출제의는 의기양양하게 한마디 한다.
「그건 토끼가 호랑이에게 “용용 죽겠지?” 하고 약을 올렸기 때문이야」「그렇다고 죽어?」「그럼, 생각해 봐라. 얼마나 아니꼬왔겠니?」「그래서……?」「그래서라니? 바로 그 “앵꼬와서”(아니꼬와서) 죽은 거란 말야, 이 멍충아!」―그럴 듯한 얘기다. 이런 경우, 이 정도의 허세라면 정말 부려 볼 만한 것이니라.
「텃세」에는 「勢」말고도 「貰」가 있다. 집세, 방세 하는 그 「세」 말이다. 그런데「터』라는 것은 사람이 「발 붙일 자리」를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한데, 그 「텃세」를 가지고 「세도」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꼬와서, 두 달 석 달만에 훌훌 털고 이사를 다니는 「철새족」이 많아졌다. 작년 11월 19일 제3방송에서 권 영달 목사의 이야기 중에서 「이사」에 관한 얘기가 있었다. 그것은 현대에 들어오면서 「집을 영구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사를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국제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었는데, 미국인들은 이사를 잘 다니는 사람들을 I‧B‧M이란 별칭까지 붙였다고 하며(I'm be moved의 뜻으로) 연간 4,000만명이나 이사들을 다닌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과학의 발달로 일일 생활권이 넓어지고 세상이 좁아지다 보니 직장의 이동도 많아 그에 따르는 이사도 많아졌을 것이요, 혹은 인간 생활이 복잡화함에 따라 지루한 것을 싫어하고 스피드를 요구하게 되는 인간 심리가 작용하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생활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집이나 터에 대하여 이와 같이 경시하는 경향은 인간이 심적인 고향을 점차 잃어가는 현상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본적은 물론 현주소까지 잃어가는 현대인들을 보면, 충의도 좋고, 지조도 좋고, 하다못해 「오기」나 「허세」, 「텃세」라도 부릴 줄 아는 사람이 아쉬워지는 느낌이다.
※2020.7.5.입력. 원고지 25매.
*‘안가’와‘텃세라는것은’을 붙인 것은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허세만 부리면 최고냐’에 ‘」’이 빠진 것도 그렇다.
‘새겨 들을’과 ‘못지 않은’을 띄어 쓴 것은 아마도 필자의 실수로 보인다. ‘말이기도하다’를 붙여 쓴 것은 다시 편집자의 실수로 돌린다. ‘은연 중’을 띄어 쓴 것은 필자의 잘못일 터이요, ‘있는것이다’와 ‘수있겠다’를 붙인 것은 필시 편집자의 실수일 터이다.
‘한다던가’에서 ‘든가’로 쓰지 못한 것은 어쩌면 필자의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대항하기위하여’,‘약간뒤가’,‘한번’, ‘부리지않고’, ‘후에오는자기반성’, ‘찾게되는’을 붙인 것은 모두 편집자의 잘못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눈곱’을 ‘눈꼽’이라 쓴 것은 필자가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때문이라 보이고, ‘있다는것을’을 붙여 쓴 것은 다시 편집자에게로 그 책임을 돌릴 일이다. ‘「허세」로써만’에서 ‘로써’는 ‘로서’로 표기해야 할 것인 바, 글쎄 필자의 잘못이 아닐까 싶다.
‘우리 나라’를 ‘우리나라’로 붙여 한 단어로 취급하는 원칙은 이 글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기억이 된다. ‘成 三問’을 띄어 쓴 것도 당시의 표기를 따른 것이다. ‘이몸이’를 붙여 쓴 것은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다.
‘「丹可磨而不可奪其赤」이오’의 ‘-이오’는 ‘-이요’로 써야 할 것을 필자가 잘못 쓴 것이다. ‘단단함 을’을 띄어 쓴 것은 분명 편집자의 잘못일 수밖에 없다.
‘포은선생’을 붙여 쓴 것은 당시의 관습을 따른 것이고, ‘낙낙장송 되었다가’의 ‘낙낙장송’은 ‘낙락장송’으로 써야 할 것인 바, 뒤쪽에서는 ‘낙락장송’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편집자의 잘못이 아닐까 싶다.‘되었다가’뒤에 ‘」’표를 빼먹은 것도 편집자에게로 책임을 돌린다.
‘일백번’을 ‘일백 번’으로 띄어 쓰지 못한 것은 시조를 표기하던 관습성을 따른 것으로 필자의 잘못이다.
‘三神山의 하나’뒤에는 콤마(,)를 찍어야 할 것인데 편집자가 빼어먹은 듯싶고, ‘비해 있다가’는 “피해 있다가”여야 할 것인 바, 역시 편집자의 실수로 보인다. ‘큰 소리’를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라 여겨지고, ‘결귀’는 나중‘결구’로 쓰는 것으로 표기법이 바뀌어 진 것으로 알고 있다. “못섬이냐”는 ‘맞섬이냐’라야 할 것을 편집자가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보여지지’와 같은 2중 피동은 필자의 잘못이다. ‘보이지’로 쓰면 될 일이다.
‘팔아 먹은 李 完用’의 ‘팔아먹은’으로 표기하지 못한 점도 그렇다. ‘李 完用’을 성과 이름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바꾸려는데’에서 ‘데’를 띄어 쓰지 못한 것은 누가 잘못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매죽 헌’을 띄어 쓴 것은 편집자의 잘못일 것이요, ‘위태로와짐’이라고 모음조화를 맞추어 표기한 것은 당시의 표기법이었다. ‘신 숙주 가’에서 조사 ‘가’를 띄어 쓴 것은 편집자의 잘못이다.
‘소나무’에 대한 좋지 못한 생각을 하였던 것은 필자의 단견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쓸모있는’을 붙여 쓴 것은 필자의 잘못이요, ‘소나무들 이’와‘참 여한’을 띄어 쓴 것은 편집자의 잘못이다. ‘세조의회유에’를 붙여 쓴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때나’를 붙여 쓴 것, ‘잡아 먹으려고’와 ‘굴 속’을 띄어 쓴 것은 필자가 잘못한 것이요,
‘출제의는’은 ‘출제자는’이라야 할 것인데, 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를 모르겠다.
‘아니꼬왔겠니?’나‘앵꼬와서(아니꼬와서)’는 당시에는 모음조화를 맞춰서 표기하도록 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터』에서 「」을 쓰지 않고 「』을 사용한 것은 누가 보아도 편집자의 잘못이요, ‘발 붙일’을 띄어 쓴 것은 필자의 책임이다. ‘권 영달’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4,000만명’으로 ‘명’을 띄어 쓰지 못한 것은 필자의 잘못일 터이요, ‘일일 생활권’을 띄어 쓴 것은 당시의 언어 습관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설명도 함께 볼 수 있도록 2단으로 배열한 것은 첨부 파일을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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