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웅재 칼럼("스포츠 한국",1972~)

『시간』 (이웅재 칼럼⑯,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7월호, pp.78~79.)

거북이3 2020. 8. 19. 15:20

『시간 』(이웅재 칼럼(16)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7월호, pp.78~7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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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이웅재 칼럼⑯, 월간 『스포츠 한국』73년 7월호, pp.78~79.)

「째깍째깍……」
시계소리는 항상 무언가를 재촉하는 듯만 여겨진다. 그건 확실히 쫓아오는 소리다. 그 소리에 밀려 공연히 바빠진다. 출근 시간에 쫓기고, 약속 시간에 허둥대야 하고. 시간을 늘이는 방도는 없을까? 누군가가 위대한 발명가가 태어나서, 시간을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냈으면 싶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몰래몰래 흐르고 있다. 그 흐르는 시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다. 어린 아이가 태어났는가 싶으면, 얼마 되지 않아 백일이요, 백일인가 했더니, 또 돌을 맞게 되고, 그리고 국민 학교 입학, 중학교, 고등 학교, 그러다 보니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있다. 시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영원이란 영원일 뿐이다. 그것은 설명하면 할수록 더욱 애매해진다. 더욱 신비로워진다. 아아, 그렇다. 그것은 바로 신의 소유물이다. 神은 바로 그 영원한 시간을 독점하고 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 보아야, 그 영원한 시간만은 어쩔 수가 없다. 오히려 영원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서글퍼지기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영원을 소유하지 못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저녁 낙조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그때, 우리는 하늘녁에 생긴 놀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애수를 동반하는 아름다움이다. 왜 애수를 느끼는가? 시간은 그때도 영원을 향해 달리는데 낙조는 곧 사라지는 것이다. 영원 속에 서서 순간을 감지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글픈 것이다. 영원 앞에선 순간―결국 우리는 거기서 인생을 느끼는 것이다. 유한한 우리 인생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림자가 길다는 건 좀더 영원에로 향한 몸짓인 것이다. 그건 신의 세계에 대한 동경인 것이다. 짧은 그림자를 보고 슬프다거나 서러운 감정을 느끼는 이는 없을 것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盧天命/ 사슴)
모가지가 길다는 것은 생명의 고향에 대한 nostalsia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에 대한 그리움, 갈망의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갈망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음에, 지난 날(Eden 낙원에서 지내던)을 생각하며, 나르시즘(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에 젖은 사슴(기실 우리 인간이겠지만)―그도 영원의 문 앞에서 한계성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그래서 슬퍼지는 것이다. 신과 같은 形相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우리 인간들―原罪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 에덴 동산의 선악과만 따 먹지 않았더라면, 신과 똑같은 天國의 生活을 영위할 수가 있었을 텐데, 신과 똑같은 永遠을 소유하고 살았을 텐데…….

「어디 시간이 있어야지.」
흔히 듣는 말이다. 해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들을 받아들인다. 바빠서 못하겠노라는 말로서.
그러나, 좀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어디 시간이 있어야지.」
그건 시간이 없다는 뜻이겠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시간이란 도처에 산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散在해 있다면 여러 개가 있어 곳곳마다 흩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것도 아니다. 시간은 따지자면 모두가 同一한 것이 아닌가? 同一한 존재가 가는 곳마다 現身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것은 無所不至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역시 시간이란 神인 것이다. 無所不至하고 無所不知하고, 全知全能한 존재―그것은 神밖에 또 있는가? 시간이 이루어 놓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모든 것을 流轉시키고 変化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우리의 天才的인 시인 金素月의 「못 잊어」라는 詩의 一節이다. 그는 일찍부터 시간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시간의 비밀을 체득했던 것이다.
사랑하던 이가 가 버리고, 세상이 온통 무의미한 것으로만 생각되어질 때라도, 「그런대로 세월(시간)만 가」버리고 나면, 언젠가는 그 슬픔, 그 고통도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그 체념으로 통하는 의지. 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시간은 全知全能한 것이다. 속담에도 「밤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쟎는가?
시간의 비밀을 너무도 일찍 안 그는 33才란 젊은 나이에 夭折(요절)을 하고 말았다. 시간도 아마 그를 총애하였던 모양이다. 플라우투스도 「신이 총애하는 자는 요절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간이란 이렇듯 한 개체의 生命까지도 左之右之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個体를 탄생시키고, 그를 成長시키면, 그 자라나는 생명체에게 수 많은 문제들을 던져주고, 다시 그것들을 해결시켜 주고, 마지막에는 생명 자체까지를 회수하여 가는 것이 시간이니, 시간의 全知全能한 神力을 어찌 아니 믿을 수 있겠는가?
서양 사람들 중에서도 시간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슈아프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노인은 무슨 곤란한 일에 부닥쳤을 때면 급히 서두리지 않고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사실 하루가 지나면, 선악을 불문하고 사정이 달라지는 수가 많다. 노인은 시간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머리로써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시간은 가끔 해결해 주는수가 있다. 오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내일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상책이다. 곤란한 문제는 조급히 해결해 버리려고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서 정관(正觀)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시간은 겸손하다. 시간은 오만하지가 않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시간은 항상 흐른다. 「歲月은 流水와 같다」고들 한다. 정지해 있는 시간이란 없다. 주관적으로 볼 때에는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며,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시간이란 항상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흐르고 있을 뿐이다. 빠르거나, 늦거나 하게 느끼는 것은 단지 우리들의 의식이 그렇게 느껴줄 따름인 것이다. 「一刻이 如三秋」라는 말이 그것이다. 詩經에도 이런 글귀가 있다.
「彼호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임은 쑥을 캤겠지./ 하루를 보지 못하면,/ 아홉달을 못 만난 듯) 이때 三秋는 가을 석달의 뜻이다. 과장법을 좋아하는 東洋人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前者의 如三秋가 더 길다. 이 때의 三秋는 세 번 맞는 가을이다. 즉 三年을 뜻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느낌은 모두가 우리의 인식 속에서의 시간, 主觀的인 시간 관념에서 나온 말이다. 마치 인간이 자기네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모습을 닮은 신을 창조해 내었듯이 말이다. 神性을 빼어 버리고 神에게 人格을 부여한 넌센스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빠르다거나 늦다거나 투덜대는 것은 모두가 넌센스에 불과한 핑계일 뿐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 여하에 따라달라질 뿐이다. 용의주도한 사람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줄을 안다. 나같이 시간을 활용할 줄모르는 사람에게도 그는 조금도 투덜대지 않고, 늘 같은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간 사라져 간다. 얼마나 겸손한가?

그렇게 시간에게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죄스러움을 저질렀는가?
물은 항상 흐른다.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흐르면서 모든 더러움을 씻어 내리는 것이다. 흐르는 물과 같이 시간도 물처럼 항상 겸허하다.

인간은 죽음 앞에 서 있을 때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죽음이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간 상태다. 神의 세계 말이다. 不完全한 인간이므로, 完全한 神 앞에서 자신의 알몸을 보여야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일단 영원의 세계, 무의 세계, 신의 세계에 들어가고 나면, 그는 가장 편안한 상태를 느낄 수가 있는 모양이다.
고속 버스나 열차칸에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양지쪽 무덤의 樣姿가 그토록 포근하고 안온하고 보이는 것도 다름 아닌 신의 세계로 돌아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시간」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그것은 약속이다. 약속이란 두 사람 사이에서의 계획된 계약이다. 계획된 것이라면 좀더 시간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자는 의도이겠는데, 그게 그리 쉽게 이행되지가 않는 것이 사고다. 자신의 시간 관리를 합리적으로 하지 못하므로써 타인에게까지 해독을 끼치는 것이 약속 불이행, 혹은 불명예스런 「코리언 타임」. 이제는 이 말이 차츰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지만, 약속 불이행으로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은 사람은 기록에서 찾아 본다면, 「史記/ 蘇秦傳」에 나오는 尾生일 것이다. 그는 다리 아래서 어느 女人을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비가 와서 나오지 못한 그 女人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만 물이 불어 溺死해 버렸다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지금도 「尾生之信」이라고 하면, 남을 지나치게 믿는 우직한 사람의 맹목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약속과 파이의 껍질을 깨뜨려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J‧스위프트)라는 말이나, 「약속을 지키는 최상의 방법을 결코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나폴레온 I세)라는 말이야말로 진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 생활을 해 나가다 보면 약속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니, 시간의 神性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도 쓸 데 없는 약속일랑 부도수표처럼 남발하지 말고, 한번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지키는 신용 있는 사람이 되자.
영국의 웰링톤 공작과 같이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자. 시간은 귀중하다. 시계를 발명한 에디슨도 결코 시계를 보지 말라고 하였다. 기계를 보는 그 시간도 아낄 줄 알아야 하겠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神的 존재다. 一寸光陰 이라도 헛되이 보낼 수야 없지 않는가?

※2020.8.16.입력. 원고지 27매.
※잘못된 부분에 밑줄을 쳐 놓고,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여기에서는 밑줄부터가 쳐지지가 않으니, 첨부 파일을 보기를
바랍니다. 제가 컴퓨터에 능숙하질 못해서 그런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