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고 했는데, 나는 “하루라도 지청구를 듣지 못하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여기서 ‘지청구’는 ‘마누라의 지청구’인데, 굳이 명시하지 않아도 동감하여 주는 사람이 많을 것임이 틀림없어서, 내 주위에 있는 그런 사람들은 일일이 명시하지 않는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간장 종지가 엉뚱하게 TV 앞쪽에 놓여 있기에 설거지를 하는 김에 가져다가 설거지통에 넣어 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내 목덜미 위로 떨어지는 마나님의 일갈!
“감기약을 개수통에 넣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그것은 물약으로 된 마나님의 목 감기약이었다. 모든 것은 저 있을 자리가 따로 있는 법인데, 어쩐지 간장 종지란 놈, 엉뚱한 자리에 떠억 버티고 있더라니…. 강태공이 그랬던가?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고. 이미 쏟아버린 것,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니, 그대로 지청구를 달게 수용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제도 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앞 발코니의 화분 정리를 하고 있는 내게 장조림을 조리하고 난 아내가 한 마디 한다.
“파 뿌리를 쓰려고 놓아두었더니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면 어떡해!”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내가 나중 사용하려고 놓아두는 파뿌리는 보통 그릇에 담겨 있기 마련인데, 내가 버린 파뿌리라면 그렇지 않고 아무데나 놓여 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한 마디 ‘무엄한’ 대꾸를 했다.
“나중에 사용할 거면, 그릇에다 담아 놓았어야지? 아무데나 두면 어떡해?”
“아무데나라니? 나중 사용할 것인 만큼 나름대로 소중하게 모아 놓았었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나? 하릴없이 주방 설거지통 근처로 가서 어슬렁대고 있는데, ‘이게 웬 일’이냐 싶게 파 뿌리를 담아놓은 그릇 두 개가 눈에 띈다. 하나는 쌀 씻을 때 주로 사용하는 둥글넓적하고 속이 조금 깊은 유리그릇이고, 또 하나는 인덕션 위에서 커피 물 끓일 때 주로 사용하는 손잡이가 달린 냄비였다. 그 그릇들 속에 각각 몇 개씩의 파뿌리가 물에 잠긴 채 놓여 있었다. 쾌재, 쾌재로다!
“이거 봐! 지금도 파 뿌리가 두 군데 따로따로 담겨 있잖아?”
“어디, 어디?”
긴가민가하고 설거지통 근처로 달려오는 아내, 나는 파뿌리가 담긴 그릇 두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떤 게 쓸 거고, 어떤 게 버릴 거지?”
그 두 그릇 속의 파뿌리를 눈으로 확인한 아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또 배운 것이, 쓸데없이 목소리만 높여 부정할 것이 아니라, 담담한 마음으로 ‘증거물’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교훈이었다.
그러나 너무 자책하지는 말자. 때에 따라서는 지청구와는 정반대의 표현도 맞닥뜨릴 때가 있으니 말이다. ‘지청구와는 정반대?’그건 아마도 ‘칭찬’일 수가 있겠는데, ‘칭찬’은 ‘칭찬’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벌써 효과가 무력해지는 낱말이라서, 표현 자체에서 느끼려 하지 말고 ‘언외(言外)’의 느낌으로 감별해 내어야만 할 일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난 다음이었다. 아내가 주방에서 일 하면서 나를 부른다.
“이거 좀 열어줘!”
밀가루를 넣어 보관하던 통 뚜껑이 도통 열리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가죽조각까지 찾아내어 사용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그래? 이리 줘 봐!”
그리고는 힘껏 용을 쓰며 열어 보았는데, 웬걸, 용을 쓸 필요까지도 없이 아주 쉽사리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 마디 했다.
“자긴 손에 물이 묻어서 그래!”
별거 아닌 말 한 마디로 인심 얻기였다.
며칠 후였다. 아내는 우리 아파트 앞쪽 상가에 있는 유기농 식품 판매점인 “새농”에서 쇠고기를 싸게 판다면서, 내일 모레가 맏딸 생일이니까 사다 놓겠다고 내 농협카드를 좀 달란다. 얼마 안 되어 등심하고 양지가 물건이 좋더라고 하며 사 가지고 들어왔다. 해서“고기 좋은 것은 자기가 잘 알잖아?”하며 추켜 주었다. 그 말에 아내는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말한다.
“카드에 잔고가 별로 없으면 그렇다고 얘기를 해야지. 할 수 없이 내 카드로 결제를 했잖아?”
농협카드를 돌려주면서 또 한 마디 한다.
“한 50만 원 정도 넣어 놓았으니까 필요할 때에 사용해.”
감지덕지였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나 보나.
조금 후 아내가 거실 TV 앞에 앉아 멸치 똥을 빼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곁으로 가서 멸치 똥 빼는 일을 거들었다. ‘거금’을 하사받았으니, 보은(報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 때문이다. 멸치 똥 빼는 일, 나는 아직 그런 것은 별 일 아닌 일로 치부하고 지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똥을 빼야할 멸치의 양은 좀처럼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보기보다 어려운 일이네.”
아내가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말한다.
“세상에 일 치고 쉬운 일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알았습니다요. 마님 하시는 일이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요.”
큰 맘 먹고 적시타 한 방을 날렸다.
오늘은 아마 ‘삼식이’로 살아가도 무탈(無頉)할 듯싶다. (20.9.19.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