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구실을 처음 방문하는 학생들은 가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으신 건가요?”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게 많은 책도 아닌데, 학생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글쎄, 다 읽었다고 대답한다면 내게 대한 학생들의 존경심이 더욱 높아질까?
“아니, 그걸 언제 다 읽었겠나?”
대답하는 순간, 학생들은 내게 실망의 눈길을 보낸다.
책 가운데에는 참고하기 위해서 필요한 책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전류라 하겠다.
매일같이 백과사전을 몇 장씩 찢어 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외우는 학생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만 지나면 자신은 살아있는 백과사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 집념에 놀랐다.
살아있는 사전이 필요할까? 기만 원 또는 기십만 원이면 늘 책상머리에 놓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볼 수 있는 사전인데, 살아있는 사전이 왜 필요한가?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그리고 생활공간마저도 넓게 차지해야 하는 살아있는 사전, 어디 그뿐이랴? 심지어는 주민세 등등도 납부해야한 하는 살아있는 사전이 필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집념이라야 집념으로서의 가치도 있는 일이다. 어리석은 집념 때문에 보람 있게 살아야 할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무슨 책을 읽을까요? 인생살이에 꼭 필요한 읽어야 할 책 몇 권만 추천해 주세요.”
졸업을 앞둔 학생의 부탁이다. 기특한지고. 이제 앞으로는 내게 배울 기회가 없으니 마지막으로 삶의 지침(指針)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지 않는가?
우리는 가끔 ‘추천도서’라는 이름의 책들을 만난다. 대형서점에서 발행하는 도서 안내 책자, 또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발표되는 서평(書評), 그리고 하고많은 베스트 셀러 목록들, 심지어는 정부 기관에서조차도 도서 추천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실제 나도 한때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독서프로그램를 면밀하게 계획했던 적도 있었다. 공동도서 50권, 공학계열 25권, 인문사회계열 25권, 보건체육계열 25권 등의 도서를 선정하고, 학생들에게 책을 읽게 하며, 그 독서 현황을 체크하기 위하여 독서퀴즈까지도 만들어 독서 상황을 체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개별적인 추천 도서를 요청받을 경우, 기실 매우 난감해진다. 독서란 어디까지나 책을 읽을 사람의 그 목적, 필요성, 취미 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더라고 추천을 해 달라는 말을 듣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폭 넓게 많은 책을 읽어라. 그 중에서도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두는 게 살아나가는 데에는 도움이 될 거다.”
학생은 실망하는 눈치다. 물론 좋은 책, 읽어야 할 만한 책이 따로 없는 것은 아니다.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몇몇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만 읽으면 세상살이를 멋들어지게 만들어 줄 만한 그런 책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만일, 그 몇몇 책만 읽으면 살아나가는 데 커다란 지남(指南)이 될 만한 책이 있다면, 그 몇몇 책을 제외한 많은 다른 책들은 모두 쓸데없는 책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나는 그것이 두렵다. 나름대로 자신의 심혈을 기울여 써낸 많은 책들이 그렇게 쓸데없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런가 하면, 내가 몇몇 책을 추천해 준다면, 추천받은 사람은 그것만을 읽고서 ‘이젠 됐다’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나가지나 않을까? 세상살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아직 읽지도 못한 책들도 많이 꽂혀 있는 내 서가(書架)를 한번 휘 둘러보았다.
(00.8.23.수→20.10.11.일,1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