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언니의 딸인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기(祭器)를 사려고 하는데, 방짜 유기(鍮器)가 좋다는 사람이 있어서 가격을 보았더니 꽤 값이 나가던데….”
방짜 유기,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사전에서는 ‘품질이 좋은 놋쇠를 녹여 부은 다음 다시 두드려 만든 그릇’이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1200도가 넘는 고온에서 11명의 사람이 함께 만드는 그릇이어서,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고 고도의 숙련 기술이 요구되기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기도 안성시가 그 유기 제조로 유명해서,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도 생겨났다고 하지 않는가? ‘방짜’란 한문으로 ‘方字’라 쓰기도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박완서 님의 대하소설 『미망』에도 “툇마루엔 장중하게 번들대는 방짜 놋대야”가 나오듯 예전에는 방짜 유기를 많이들 썼었다. 그러던 것이 요새는 고급 요리집에서나 간혹 보일 뿐, 일반 가정에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품목이 되어 버렸다. 일제시대 공출로 싹쓸이를 해가더니, 난방으로 연탄이 일반화되자 그 유독가스를 배겨낼 재주가 없어 점차 사라지게 된 그릇이다. 그런 신세가 된 것이 아쉬웠던 모양으로, 아내도‘방짜 유기’라는 말을 듣고서는 은근히 반가웠던지, 부리나케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옛날의 자개장롱을 열심히 뒤지고는 조금 있다가 방짜 유기로 된 뚜껑이 있는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수저 두 벌을 가지고 나온다. 아내가 시집올 때 해온 것이었는데, 이제껏 한 번도 사용해 보았던 적이 없는 그릇이다. 아내는 엄숙하게 선언한다. 앞으로는 이 유기그릇을 사용하겠다는 말씀이다.
룰루랄라,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유기그릇을 사용하게 된 것이 무슨 이점이 있기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예로부터 유기는 독성에 반응한다 하여 임금님의 밥상에 오르는 반상기(飯床器)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이제 나는 독살당할 염려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을 독살하려고 하겠기에 그 오두방정인가? 하지만 그런 건 모르는 일이다. 비닐봉투 값 20원 때문에 마트의 아르바이트생 한 사람이 죽은 일도 있지 않던가? 숙취해소음료 3병을 봉투에 담아주지 않는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르바이트생이 경찰에 업무방해로 신고한다고 하자 분노가 폭발, 집에까지 갓서 흉기를 들고 돌아와 그 아르바이트생을 살해한 일도 있었다고(한국일보 18.6.16.) 하잖은가?
초등학교 시절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다가 내게 몽땅 잃게 되자, 두고두고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지금은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몰라서 보복을 하지 못하고 지낼 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설혹 그런 친구가 내가 사는 곳을 알아내었다 하더라도, 우리 집 방짜 유기에 음식을 담아 나를 독살할 경우는 생길 수가 없을 터이니, 이건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일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룰루랄라’인가? 유기그릇은 흔히 ‘숨 쉬는 그릇’이라고 한다. 전자현미경으로 1000배 확대해 들여다보면 수많은 기공을 확인할 수가 있단다. 그러니 거기에 담긴 음식들은 늘 신선한 공기 속에서 지내는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블로그 ‘경주농특산물판매장(2015.6.9.)’을 보니, 유기그릇에 식중독 균 10만 마리를 넣고 하루를 지낸 후 확인해 보니 그 균들이 전멸한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유기가 가지고 있는 구리 이온 자체가 세포와 결합하면서 균을 죽이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설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짜 유기는 미네랄 성분을 방출하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풍에 걸리는 일도 막아준다니, 내 어찌 ‘룰루랄라’를 하지 않고 지나칠 수 있으랴?
방짜 그릇에 물과 함께 미나리를 담가 놓으면 거머리가 방짜 그릇에 달라붙어 미나리를 깨끗이 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 농산물을 재배할 때 무분별하게 사용된 농약도 방짜가 족집게처럼 검출한다. 농약 성분이 덜 세척된 재료를 사용한 음식물을 방짜 그릇에 담으면 시커먼 자국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한다는 햄버거병 원인균 ‘O157’균도 박멸하는 능력을 가진 그릇이 바로 방짜 유기가 아니던가?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사기로 된 식기를 사용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께름칙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내가 새로 사용하게 된 방짜 유기를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부부는 중매결혼이라서 제대로 된 연애시절을 공유하지를 못했었다. 그러니 결혼할 때 가져온 그 식기는 어쩌면 우리에게 연애감정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귀한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요즘 코로나19로 모든 삶의 형태들이 변형되어 가고 있는데, 우리 집에는 특별히 변화를 가져올 아무런 건덕지가 없다 보니, 밥그릇이나마 바꿔보자는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덧붙여 부수적인 이점이라면, 보온(保溫) 보냉(保冷) 효과가 사기그릇에 비해 뛰어나서 찬 음식은 차게, 따뜻한 음식은 따뜻하게 만들어, 음식 맛을 제대로 보존하여 식욕을 도와주는 장점도 덤으로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점도 방짜 유기에 대한 애정을 더해주는 점은 아닐까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여 보자. 사기그릇처럼 실수로 깨뜨릴 염려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끼리 서로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도 그릇의 황금빛과 어울려 청량감을 느끼게 하여 주어 음식 맛을 더욱 깔끔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가? 그래서 전통 악기 중의 징과 꽹과리는 방짜 유기로 만드는가 싶다. (20.11.5.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