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는 풍속도

설날, 그 음식장만

거북이3 2006. 1. 30. 19:24
 

설날, 그 음식장만

                                                     이   웅   재 


 설, 남정네들은 편안한 자세로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즐겁게 노는데, 여자들만 음식 만들고 상 차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고도리다, 고도리!”

 저 소리는 남편 목소리임에 틀림없으렷다? 고도리? 당신이 고도리를 알기나 해? ‘고’는 ‘다섯’이고 ‘도리’는 ‘새’, 새 다섯 마리를 잡았다고? 그건 일본말이지. 순수한 우리말 ‘고도리’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야단이람? 고도리? 그건 ‘고등어 새끼’를 가리키는 순국어라구. 고등어? 요새 잘 나가는 등 푸른 생선이지. 하지만, 제사상에는 올라가지도 못하는 생선이로군.

 남정네들의 뒤치다꺼리, 그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유발시키는 일인지 아시는지요? 그래서 한 번 남편을 닦달해 보기도 합니다.

 “미안해. 사실은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해서 그렇지, 남자들은 누구나 여자들에게 늘 미안함을 느끼고 있다구.”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는 데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그 몹쓸 남정네들을 몽땅 없애버리고 살아가면 어떨까요? 가만, 가만, 그러고 보면 그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인 듯싶네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애꿎은 남편이나 볶아대면서 참을 수밖에.


 ‘가자, 집으로!’라는 경기방송 설날 특집 프로였습니다. ‘설날,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문자 메시지로 받아 스마일 맨이 소개해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친척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인데, 거기서 듣게 되는 ‘가장 듣기 싫은 말?’ 그것은 ‘살이 쪘다’는 말이라네요. 세상에…, 늘 먹을 것이 모자라던 옛날에는 그 말이 설날 최고의 덕담이었는데….

 세월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하는 세월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덩달아 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는 먹고 사는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애써서 먹을 것 장만한 사람들만 빛이 안 나지요.

 젊은이들은 외모 때문에 살이 찌는 일을 극도로 타기합니다. 엄청난 돈을 처들여야 하는 성형수술이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얼짱이 되는 일이야 대체로 선천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와는 달리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몸짱이겠지요. 그러니 그 몸짱을 위해서 올인을 해야 할 판국인데, ‘살이 쪘다’는 말은 살인적 모욕의 언사로 치부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나이가 든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살이 쪘다’는 말이 죽고 싶을 정도로 듣기 싫은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건강 때문이지요. 비만이야말로 모든 성인병의 주된 원인이라지를 않습니까?

 그런데요. 차례상을 위하여, 오랜만에 찾아오는 아들, 딸들을 위하여, 또는 모처럼 만에 만나게 되는 친척들을 위하여 차린 음식들은 설날이 지나고 나면 처치곤란해지지 않습니까? 모두들 자신의 원위치로 돌아가고 난 다음, 그 많은 음식들은 함께 먹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냉장고를 한두 번 들락거리다 보면 맛마저도 없어져 그야말로 천대꾸러기가 되어 버리지요.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 ‘없애버리기 위해서’ 먹어대는 주부에게 그것은 바로 그 죽도록 싫은, ‘살이 찌도록 만들어 주는’ 주범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결국 우리나라 여성들이 명절 때 고역스러워 하는 이유가 음식장만하는 일 때문으로만 알았는데, 그 마무리하는 일에서도 장만할 때의 괴로움 못지않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수미쌍관(首尾雙關)의 기법으로 여성들을 괴롭혀 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듣기 싫은 말도 음식장만과 관련된 것이네요. 고생고생해서 만들어 놓은 갖가지 음식.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놓은 그 음식들이 순간, 자랑스럽습니다. 밤잠 설치며 온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놓은 저 음식들, 고생은 했지만, 이제 저 음식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어줄 생각을 하니 기분짱입니다.

 헌데, 이게 웬 일입니까?

 “이거, 맛이 왜 이래?”

 남편의 말입니다.

 그 말 따라 시어머니, 시아버지께서 음식맛을 보시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이건 너무 싱겁네.”

 “이건 엄청 짜구먼.”

 “무슨 맛이 이래?”

 시누이의 말은 그냥 비수가 되어 살 속을 푹푹 비집고 듭니다.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말입니다.

 “무어, 먹을 만하구먼.”

 그래도 도련님 마음씀씀이가 제일 고맙습니다. 도련님 같은 남자와 결혼했어야 하는 건데…, 해서는 안 될 엉뚱한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먹는 것 타박은 옛날부터 금기시한 일이 아니었던가요?

 세월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하는 세월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덩달아 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음식 가지고 타박을 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남극 세종기지 같은 곳에서는 아직도 음식 타박은 절대 금기랍니다. 15~6명의 인원 중 연구원은 4명 정도, 나머지는 요리사, 전기기사, 군의관 등등 일상생활을 무리 없게  해주기 위한 요원들인데, 그 중 가장 공들여 선발하는 인물이 요리사랍니다. 콘센트 건물 생활 2~3개월이면, 모든 일에 짜증이 나고 극도로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데, 혹시라도 음식 타박을 했다가는 목숨 부지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는군요. 오직 요리사만이 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음식 타박은 하지들 맙시다. 만든 사람의 수고를 생각하고 맛 있게들 먹읍시다. 그리고 덕담하는 일을 잊지 맙시다.

 “여보, 음식장만하느라고 고생 많았지? 어유, 무척 맛있네. 당신 솜씨 일취월장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