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시집 안 간다니까요…
이 웅 재
봄은 당연히 봄이지만, 여름도 봄이요, 가을도 봄, 심지어는 겨울까지도 봄으로 느껴지는 때가 四春期요 思春期이다. 춘기(春期)에는 춘기(春氣)가 발동한다. 봄은 여자의 계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도 있듯이 특히 봄은 여자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 주는 계절이다. 동네 처녀가 바람나는 때도 ‘앵두나무 우물가’로 계절적 배경은 봄이라야 하는 것이고, 처녀의 궁둥이로 마구 뭉개뜨리는 것도 외딴 골짜기에 있는, 이삭이 패기 전의 보리밭이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시집’ 얘기만 나오면 펄쩍 뛴다. ‘전 절대로 시집 안 가요!’
처음엔 부끄러워서 그러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톤이 강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레토리크(rhetoric)란 점을 모르고 지나칠 사람은 별로 없다. ‘안 가요’, 그건 반어적 강조법이었던 것이다.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에이, 무슨 말씀, 이제까지의 ‘안 가요’는 대부분 시집을 갔으니까 그 이상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은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는 것인데….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세월이 지나면 진실도 달라지는 것인가?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한다. 그 말은 부부란 함께 태어나고 같은 날 죽게 됨을 이상으로 치부한다는 말이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똑 같이 이팔청춘 16세에 서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도 이러한 관습법(?)에 충실하고자 했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출생까지 같기를 바란다는 것은 혼인 이전의 일이라서 지나치게 운명론에 집착하는 일일 수도 있으니 논외로 치고, 최소한도 비슷한 시기에 죽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의 나이 관계가 어때야지만 바람직한 것일까?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여자가 80.8세, 남자는 73.9세라고 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7년 정도 더 오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부부란 여자 나이가 남자보다 7년쯤 연상이라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요즈음은 연애 기간 없이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야만적 모독으로까지 여기는 판국이니, 3~4년 간의 연애기간을 설정해 보자.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 결혼을 하려면 대학 1~2학년 때부터 연애를 해야 할 것인데, 그렇다면 상대 남학생의 경우 중학교 1학년이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야 한다. 여성들의 결혼 연령이 점차 늦어지는 이유도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연하의, 그것도 7년 정도의 연하의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될 때 여성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연하의 남성에게 자신의 젊음을 맞추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최대한도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일, 그것은 출산을 하지 않는 일이다.
최근 ‘&+’이란 기호가 유행이다. and(함께 함)와 plus, 그러니까 ‘창조적 공존’을 의미하는 기호이다. 여야도 노사도 ‘&+’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남성과 여성도 ‘&+’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1+1=2’가 아니라 ‘1+1=3’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혼은 바로 ‘창조적 공존’을 의미하는 것, 출산을 하지 않으려는 일과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 가요’ 하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안 가요’가 거짓말이 아닌 진실로 변하는 소이(所以)이다.
아직 국회의원의 숫자에서는 턱없이 부족하지마는,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 합격자의 수를 보면 여성이 전체 합격자의 1/3선을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30%는 임계점(臨界點)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소수로서의 차별대우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바로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가정만을 수호하기에는 이미 사회생활의 영역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점도 ‘안 가요’를 진심으로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하겠다.
게다가 구태의연한 이유 하나를 더 첨가해 보자.
바로 ‘고부의 갈등’, 이 문제는 정말로 오랜 역사성을 지닌 문제이면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안이다. 지금은 많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며느리의 입장에서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석3년을 쥐죽은 듯 죽어지내야 한다던 시집살이가 달가울 리가 없다. 오죽 시어머니가 보기 싫었으면 찌부드드한 날씨를 가리켜 ‘사흘 굶은 시에미 낯짝’ 같다는 말이며, 잘디잔 가시가 나 있는 잎을 지닌 풀이름에 ‘며느리밑씻개’라는 명칭까지 붙였을까?
우리의 고전작품 중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九雲夢)’을 보자. 이 소설은 김만중이 일찍이 남편을 잃고 맏아들마저 죽은 후 외롭게 지내는 만년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상계에서의 성진(性眞)과 8선녀가 양소유(楊少游)와 2처6첩으로 환생하여 일부다처의 생활을 하는 얘기를 그 어머니가 보고 즐겼다는 것이다.
여자가 먼저 여자를 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어머니들부터 변해야 한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바가지를 박박 긁으면서 아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동네방네 다니면서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낳은 아들이 그만큼 잘났다는 것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한 고부관계는 원만해질 수가 없다. 그러니 ‘안 가요’는 오랜 전통 속에서의 응원군마저 얻어서 거짓이 아닌 진실로 둔갑을 해 버리는 것이다.
오호, 통재라! 젊었을 때 내가 당했으니, 며느리 너도 당해 보아라 하는 생각, 언젠가는 그런 관념을 훌훌 털어버려야만 할 것인데,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의 사회진출이 대부분의 방면에서 임계점을 넘고 있는 이때가 바로 그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