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문화 체험기 2)
이상(李箱)이 보았더라면 한없는 권태를 느꼈을 초원의 나라들
이 웅 재
미니바에서 석식을 했다. 홀에는 커다란 TV가 축구 중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현지인 몇 쌍과 서너 명의 남자들이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중계를 보다가 가끔씩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주말이라서 축제 분위기를 내는 모양이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14인치짜리 TV가 놓여 있었는데, 요사이에는 우리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Gold Star였다. 어쨌든 반가웠다. 이곳엔 삼성이 들어왔다가 IMF 때문에 철수를 했었는데, 요즈음 다시 대규모의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표 품목이 핸드폰. 삼성 핸드폰은 목에 걸고 다니고, 노키아는 주머니에 넣고 다닌단다. 최신 삼성 핸드폰을 목에 걸고 다니면 다음날 애인이 바뀔 정도라고 하였다. 벨 소리가 울려도 자랑하느라고 한참 동안 뜸을 들이고서야 받는다는 것이니, 글쎄 여기가 공산국가였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핸드폰이 삼성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남한의 것이라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북한이 깡패 국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런 데에서도 새삼 절실하게 느껴졌다.
요새는 LG가 인기를 얻어가고 있단다. 느림보의 국가에서 정확한 시간에 AS는 물론, 나중 확인 전화까지 해 주고 있으니 한마디로 뿅 갔다는 것이다. 그래, 세계 어느 곳에서건 ‘성실’이란 소중한 덕목이요, 귀중한 자산이란 말이렷다?
잠은 오지 않고 해서 창문을 열어 보았다. 뒤뜰에는 고동색 토끼 한 마리가 겅중겅중 뛰어 다니면서 토끼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얼핏 캥거루처럼 보이는 큼직한 놈이었다. 여행사에서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시골의 호텔로 안내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크게 불편한 점도 없어서 오히려 이와 같은 한적한 정취도 맛볼 수 있음이 즐거웠다.
이튿날 새벽, 밖으로 나와서 산책을 하다 보니, 아, 정문 위의 만국기 중 두 번째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지 않은가? 반가워서 다시 눈을 돌렸더니 그곳에는 국기 게양대가 있었다. 그리고 3나라의 국기 중 태극기가 정중앙에 있었다. 상술이기는 하겠지만 가슴이 뿌듯해지고 있었으니, 나는 틀림없이 한국인이었다.
다른 한 쪽에는 광고판. 맨 위쪽에 Motorola LG, 가운데가 Eurotel, 아래쪽이 Sony. Nokia였다. 다시 한 번 한국인임을 확인했다. 외국에 나오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진리 중의 진리였다.
조식 후, 버스로 2시간 정도 달려 국경에 다다랐다. 우리들의 여권을 체코인이 모아서 가져갔는데, 폴란드 사람이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서러웠다. 어떤 차들은 자국의 차인지 무사통과를 하기도 한다. 차량 번호판을 보면 어느 나라 차인지를 알 수가 있다고 했다. (A; 오스트리아 D; 독일 F; 프랑스 DK; 덴마크 SK; 슬로바키아 등) 딱지를 뗄 때에도 번호판을 참작한단다.
금방 폴란드로 들어왔다. 25개 EU 회원국 중 실업률이 가장 높은 곳이란다. 그래서 그럴까? 집들이 체코에 비해서 대체로 작아 보인다. 여기 동유럽의 집들은 우리나라의 집에 비해서 조금 큰 느낌인데, 내 짐작대로 그것은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단다. 특히 친정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관습이라니,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귀가 솔깃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30%~50%가 평평한 땅이라는 의미의 폴란드산이란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구릉으로 이루어진 이웃나라들의 초원에서는 젖소들이 풀 뜯는 모습은 어울려도 돼지가 어슬렁대는 풍경은 상상에서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다본 길 양옆은 이상(李箱)이 보았더라면 한없는 권태를 느끼게 되었을 초원이었다. 자세히 보니 보리나 밀밭이 많았다. 그렇지, 이 지역은 맥주와 와인의 고장이 아니던가? 한두 달 전에는 노오란 유채꽃이 만발하였단다. 조금 더 지나면 옥수수 밭으로 뒤덮일 것이고. 물론 사료용 옥수수일 것이다. 또 하나 무시하지 못할 것은 감자밭. 이곳 사람들은 밥 대신 빵과 감자, 그리고 고기가 주식이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는 감자 가지고 하는 요리 종류가 기껏해야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인데 비해 여기 동유럽 사람들은 164가지의 요리를 할 수 있다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얼마 전에 선종(善終)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는 폴란드 출신 교황이다. 그는 최초의 폴란드 출신 교황이며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출신 교황이었다. 그는 또한 20세기 교황 중 안경을 쓰지 않고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최초의 교황이었고 역대 교황 중 최초로 손목시계를 찬 교황, 스키와 등산을 즐기며 카누를 타기도 했던 교황이다.
폴란드가 낳은 인물로는 방사성 원소인 라듐의 발견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인물이며, 물리학상에 이어 화학상을 수상하여 노벨상 2회수상이라는 빛나는 기록을 세운 퀴리부인이 있고,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 매혹적인 선율에 애수를 담은 음을 구사하여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렸던 프레드릭 쇼팽 등을 꼽을 수가 있겠다.
(06. 7. 14. 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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