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문화 체험기

(동유럽 문화 체험기 3)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

거북이3 2006. 7. 17. 03:52
  

(동유럽 문화 체험기 3)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

                                                                     이   웅   재


 우리의 첫 관광지는 아우슈비츠(Auschwitz)였다. 호텔에서의 출발시간을  가이드가 서두르는 바람에 1시간의 여분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를 둘러볼 수가 있었다. 1수용소보다 10배나 큰 곳, 53만평으로 300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다는데, 현재는 45동의 벽돌건물과 22동의 목조건물만이 띄엄띄엄 서 있을 뿐 황량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으면서 자료인멸의 의도로 불살라버렸기 때문이란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나오는 기차역이 속칭 죽음의 문 바로 안쪽에 있었다. 기차역이 가까운 곳에 만든 1수용소의 경우 수용소까지 가는 동안 도망가는 사람, 일부러 고압전류가 흐르는 2중 철조망에 감전사하는 사람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자 2수용소에는 아예 수용소 안에다가 기차역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리면 포로들을 분류한다. 일할 수 있는 사람, 노약자, 부녀자 등으로. 그러다 보니 한 가족도 강제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비극은 감지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큼지막한 안내판이 하나 서 있었고 거기 바로 그러한 비극의 시발을 알리는 흑백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포로들은 모두가 작은 가방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돈 많은 유태인들에게 ‘너희들끼리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주시켜 주겠다.’면서 끌어 왔기에 가재도구를 다 정리하고 귀중품이나 돈만 챙겨 가지고 온 것이다. 감시탑이었던 문루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니 수용소의 넓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시물이 없어서 아직은 그곳에서의 만행이 추상적으로만 느껴진다.

 1수용소를 보고 나면 입맛도 떨어질 것이고, 시간도 점심때가 되어 레스토랑 카사블랑카로 들어갔다. 한 쪽 벽면에는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ARBEIT MACHT FREI.)’는 낙서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은 1수용소의 정문에 씌어져 있는 글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의 포로들은 ‘노동’이라는 말 대신 ‘죽음’으로써만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1수용소의 정문을 통과하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사진이 하나 전시되어 있다. 바로 음악회 장면이다. 즐겁게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데, 연주자들도 모두가 포로들이란다. 음악회가 끝나면 부랴부랴 다른 포로들이나 마찬가지로 노동에 임해야 했다니 어찌 생각하면 다른 포로들보다도 더욱 혹사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마음이 여유로워야 제대로 연주를 할 것인데, 마음에도 없는 연주까지 해야 했던 그들에겐 더욱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이곳 수용소 건물은 그대로 보존이 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붉은 벽돌의 단층건물 28동이 3열 횡대로 줄지어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사이에 아름드리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포로들이 사용했던 가방, 신발, 안경, 머리카락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으로는 카페트 등을 짰다고 한다. 또한 먹지 못해 삐쩍 마른 아이들의 사진 등 사진자료도 여기저기 게시되어 있었다. 장애자들이 사용하던 의수, 의족들은 게르만 지상주의를 신봉했던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얼마나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심신 장애인들은  ‘생존할 가치가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이 쓰던 그릇 중에는 법랑도 있어 포로들의 원래 신분을 짐작케 해 주기도 했다. 30여 개국 제품의 구두약도 있었다. 현지 가이드는 말표구두약을 찾아보란다. 그러나 다행히 말표는 없었다.

 400여만 명의 유태인이 죽어간 곳,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폴란드가 아닌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1,000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죽은 곳이기도 하고, 러시아인들은 또 그보다도 더욱 많이 죽어갔단다. 나치 독재에 의한 피살자는 약 2,500만 명.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공산주의 체재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람은 그 4배인 약 1억 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8,500명을 죽일 수 있다는 가스실. 포로들이 이 ‘최종 처리용 건물’ 근처에 이르게 되면 이른바 ‘이(蝨)를 잡는 방’, 즉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간다. 그 방이 사람으로 꽉 차게 되면 실내 온도가 올라가고 적정 온도에 이르게 되면 천장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치클론B(Zyklon-B)가 담긴 통들에서 가스가 분출된다는 것이다. 벽에는 괴로움을 온몸으로 표현해 놓은 손톱자국이 처연하다.

 그렇게 ‘자유를 찾게 된’ 시체들은 옆쪽의 화장실(火葬室)로 옮겨진다. 그리곤 하나의 소각로에 3구씩의 시체를 쑤셔넣고 30분 동안 화장을 했다는 것이다. 화장실(火葬室) 뒤쪽으로 화장실(化粧室)이 있었는데, 현지 가이드 허은경 씨는 이곳은 무료이니 많이 이용을 하라고 했다. 또 그 앞쪽으로는 교수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종전 후 이곳의 수용소장 루돌프 헤스(Rudolf Hoess)가 바로 그 교수대를 ‘이용’했다고 한다. 아아, 그리고 바로 화장실(火葬室) 앞쪽엔 또 연회실(宴會室)이 있었다. 그들로서도 술에라도 취하지 않고서는 배기기가 힘들었을 터수라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날씨는 왜 그렇게 무더운지?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수용자들 사이에 '죽음의 천사'로 널리 알려졌던 죠셉 멩겔레 (Joseph Mengele)를 소개한다. 쌍둥이 중 한 명의 다리를 자르고 다른 쌍둥이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 등 178종류의 의학실험을 했다는 생체실험자. 그는 전후 브라질로 도망해 숨어 살았단다. 어떻게 그런 자가 전범으로 처형당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더욱 역사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전후 폴란드는 이곳 아우슈비츠를 원래 폴란드어로서의 명칭인 오슈비엥침으로 재빨리 바꿔버렸다. 그와 같은 참상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때문이었다.

                           (06. 7. 17. 원고지 1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