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지엔느

일요일 한낮의 탄천 풍경

거북이3 2007. 3. 26. 00:01
 

일요일 한낮의 탄천 풍경

                                            이   웅   재

 싱그러웠다. 일요일 한낮, 탄천 둔치의 산책로는 어느 때보다도 봄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엊그제까지도 눈발이 펄펄 날렸는데 믿기지가 않는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판을 치고 있을 때에는 산책로가 한산했었는데, 오늘은 몰라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산책로를 메우고 있었다. 날씨가 불러낸 사람들이었다. 자전거 도로에도 무더기무더기 페달을 밟는 사람들로 이어졌다. 봄은 그렇게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는 재주를 지닌 모양이었다.

 둔치 위쪽의 차도 변에서 산책로 쪽으로 휘늘어진 개나리 덩굴에서는 노오란 꽃망울이 서로 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바라보는 눈길을 맞받아 뿜어내는 샛노란 꽃빛에 눈이 시렸다. 나는 이제껏 꽃이란 아름다운 것인 줄로만  알았었다. 꽃이란 다소곳이 완상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줄만 하는 것으로 여겼었다. 꽃은 항상 여리디여린 것으로만 느꼈었다. 꽃이 내뿜는 빛이 그렇게 강렬한 줄을 나는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하천 쪽 계단으로 된 경사진 부분에는 아, 푸르름이 한창 돋아나고 있었다. 쑥, 돌나물, 그 사이사이에 부끄러운 듯 지난겨울 동안 말라비틀어진, 조금은 널찍한 잎새들을 가졌던 풀잎들 사이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민들레꽃, 아, 반가웠다. 수수한 듯, 헌 치마를 두르고 낡은 저고리 입고 수줍은 듯 얼굴을 숨기고 있는 그 꽃이 그렇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언제나 데면데면하게 대해주는 그녀 같은 꽃, 꾸밈도 애교도 없이 천성 그대로 내게로 다가오는 그녀 같은 꽃, 그 꽃이 그토록 매력이 넘치는 꽃인 줄, 나는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천변만 그러한가? 아니다. 탄천의 냇물도 예전과는 달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河床)이 거의 드러나는 모습이었는데,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일까? 만수(滿水)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넘실대며 흐르는 물결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내 마음속까지 넉넉했다. 넉넉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겨울이 깊어가면서 보이지 않던 잉어들의 모습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강이나 연못 어디에나 잘 사는 물고기, 아마도 놈들은 겨울 동안엔 물이 넉넉하지 못한 하천을 떠나 수량이 풍부한 한강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잉어가 사는 곳에는 붕어도 공서(共棲)를 한다고 하니 저 수초들 사이엔 손바닥만한 붕어들도 와글와글하리라. 붕어와 잉어가 그렇게 같은 집에 살기에 그들 사이에는 간혹 `붕잉어'도 태어난단다. 그 '붕잉어'는 수염이 딱 한 쌍이 있어서 수염이 없는 붕어와 수염이 두 쌍인 잉어를 반반씩 닮은꼴을 지닌다고 하니, 자연의 그 불편부당함을 어찌 무시할 수가 있을 것이랴?

한참 동안 잉어들을 바라봤더니, 청둥오리들이 시샘을 하는 것인지…꽥꽥 소리를 치며 현란한 쇼를 펼치기 시작한다. 거꾸로 자맥질을 하면서 그 소중한 엉덩이쪽 부분을 만천하에 드러내 놓는가 하면, 3-4분 정도는 조이 될 만한 시간을 잠수하고 나서, 처음 있던 곳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데에서 고개를 쑤욱 내밀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천변으로 유영을 하더니, 저런, 기슭에 걸려 있던 꽤나 쓸 만한 농구공에게로 다가간다. 탄천에는 저처럼 흘러가는 물결에 몸을 내맡긴 공들이 많았다.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등등. 옛날 같으면 어쩌다 냇물에 빠진 공일지라도 그걸 그냥 떠내려가게 만들지는 않았었다.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그리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부치고 그 공을 건져냈던 것이다. 세월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다. 이젠 바지를 걷어붙이지 않는다. 까짓것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탄천을 유람하는 각종 공들이 많이 늘어났다.

 청둥오리가 농구공을 툭! 쳐 본다. 공은 귀찮다는 듯 움찔 움직인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오리란 놈은 슬슬 공을 가지고 장난질을 한다. 공은 오리가 건드리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드디어 냇물 한가운데 쪽으로 방향을 틀어잡더니 물결 따라 서서히 흘러가기 시작한다. 어디까지 저렇게 자유로운 여행을 계속할 수가 있을까? 흘러흘러 가면서, 그러니까 자유를 마음대로 만끽하면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건져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따스한 봄 햇살이 둔치에 내려앉는다. 나른한 졸음이 찾아온다. 나른한 것만은 아니고, 달착지근한, 그리고 감미로운 느낌을 담뿍 담아다 주는 햇살이다. 스르르, 졸음이 찾아든다. 온갖 꽃이 피어 있고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선율의 멜로디가 흐르고…. 살랑 녹색 바람이 불어온다. 잠깐, 아주 잠깐,  찰나의 수면 속으로 빠진다.

 앞쪽으로는 여인 하나가 다가온다.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그녀의 늘씬한 S라인이 봄 향기마냥 신선하다. 느릿느릿, 그 옆쪽을 달리는 자전거의 빠른 속도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그녀는 느릿느릿 걷는다. 그 속도는 그대로 소곤거림이었다. 팔을 어깨 높이까지 흔들며 힘차게 걷고 있는 여인들, 때로는 경보(競步)라도 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아예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부러웠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뛰어가는 서너 살쯤 되었을까 하는 여자아이. 티 없이 해맑은 모습이다. 핸드폰으로 연신 천변 풍경을 사진 찍는 젊은 여인, 무엇이 그녀에게 그렇게 관심을 끌게 했을까? 그녀의 옆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그리고 그 뒤로는 머리가 허연 노인이 불편한 자세로 어기죽어기죽 걷고 있었다. 새봄처럼 저 노인분 건강을 회복하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탄천을 계속 걸으시길 마음속으로 기도해 본다.

 벌써 야탑천 보도1교엘 도착했다. 나는 이제 오른쪽으로 꺾어들어야 한다. 거기엔 야탑초등교가 있고 그 옆쪽은 무잡모퉁이, 어린이 공원이 있다. 오늘은 거기서 소꿉놀이를 하던 계집애들이 보이질 않는다. 나는 봄이 좀 섭섭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 내일이면 그 아이들도 다시 이 공원을 찾을 것이고, 그러면 봄도 산들바람을 데리고 와서 그들과 함께 소꿉놀이에 신명이 나서 꽃봉오리를 펑펑 터뜨리며 파릇파릇한 새싹들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어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가오는 봄은, 그렇다. 봄은 우리를 나른한 행복감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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