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바다

연암의 문학세계

거북이3 2007. 7. 16. 22:04
 

연암의 문학세계

  -제16회 수필문학 하계 세미나(‘수필의 날’ 기념) 주제 발표문

      때; 2007년 7월 14일~15일(14일 17;00경 발표)

      곳; 농협 구미교육원

     

      주최;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수필문학사

      후원; 경상북도 구미시? 구미수필문학회

                                                이   웅   재

★법고이창신(法古而?新)

 연암의 글쓰기는 한마디로 ‘나만의 글쓰기’이다. 그리고 그 ‘나만의 글쓰기’는 바로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하는 글쓰기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연암은 글을 쓰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 하나는《역경》과 같이 진리를 논한 미묘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주로 《춘추》와 같이 사건을 기록하여 드러낸 것으로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된다고 하였다.

 강동엽(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11-12)은, “박지원(朴趾源)은 우언(寓言)의 지나친 미묘함에서 벗어나고, 외전(外傳)의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여 이 두 가지를 혼합한 방법으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는 ‘혼합’이라기보다는 변증법적인 ‘지양(止揚)’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곧 ‘우언이외전(寓言而外傳)’의 방법이라는 말이다.

 이는 연암문학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법고창신(法古?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곧 ‘법고’ 따로 창신 따로를 뒤섞은 것이 아니라  ‘법고하면서도 창신하는 것’, 곧 ‘법고이창신(法古而?新)’의 글쓰기를 행했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의 ‘용사이신의(用事而新意)’와도 통하는 글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사, 곧 고사를 많이 인용하는 일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의, 곧 독창적인 시세계를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규보의 생각이다.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법고이창신’의 글쓰기와 표현만 다른 말일 뿐 동일한 글쓰기의 방법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는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말했다.

“옛것을 본뜨는[法古] 사람은 그 자취에 구애됨이 병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新] 사람은 법도가 없음[不經]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法古而知變]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新而能典]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今之文 猶古之文也]”

그 당시 사대부들은 중국의 옛 문체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의 말을 들어보자.

“『서경』의 「요전」과 「대우모」,『시경』의 국풍과 아송,『주역』의 괘사와 효사,『춘추』의 여러 전(傳)들은 모두 당시의 금문(今文)이어서 그때 사람들은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그 뜻을 점점 알기 어렵게 되어 전(傳)? 전(箋)? 주(註)? 소(疏) 따위가 생겨나게 되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런 줄은 모르고 무조건 옛 사람의 글을 본뜨고 흉내 내어 어렵고 난삽한 때깔을 부리면서도 스스로는 ‘간명하고 예스럽다’고 여기고 있으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만약 남들이 자기 글을 읽고자 할 경우 그때마다 자기가 일일이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지경이라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84)라고 한 말이라든가,

 “글 제(題)에 임하여 붓을 잡는 사람들은 문득 옛말을 생각하고, 애써 경전의 뜻을 찾아다가 근엄하게 그 뜻을 빌려 쓰고 축자(逐字)하기를 긍장(矜莊)스럽게 하고 있다. 이는 마치 화공을 데려다 초상화를 그릴 때 자기의 얼굴 모습을 바꾸어 나서는 것과 같다. 눈은 떴으나 눈동자는 움직임이 없고 옷 무늬는 가지런하게 되었으나 상도(常道)를 잃었으니 비록 훌륭한 화공이라 하여도 그 진상(眞像)은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것이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를까.” (朴榮喆編. 燕巖集.[慶熙出版社 影印本.1966.] 卷3. p.57. 「孔雀?文槁」自序)

 이런 말들을 보면, 얼핏 연암은 ‘법고’를 배척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법고’에 얽매이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한 말이지 ‘법고’ 자체를 전적으로 무시한 말은 아니라고 보인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열하일기.피서록(避暑錄)](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69)라는 표현을 보면 그러한 점을 십분 유추할 수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법고’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기조차 한 것이다.

 "문장에도 방법이 있다. 이는 마치 송사하는 자에게 증거가 있고, 장사치가 값을 부르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말의 조리가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재판에서 이길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글 짓는 사람은 경전을 이것저것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연암집 제5권.영대정잉묵(映帶亭?墨).답창애(答蒼厓;兪漢雋)]


★오문(吾文)

  그래서 연암은 말한다.

  “문장에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이 한유와 구양수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와 사마천의 글을 본떴다고 해서 우쭐하고 으스대면서 지금 사람을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오문(吾文)]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道)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79)

 연암이 말하는 바람직한 글쓰기는  ‘오문(吾文)’, 곧 ‘나의 글’인 것이요, 이 ‘오문’이란 바로 '고문이금문(古文而今文)'의 변증법적 지양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옛날을 기준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이 진실로 비속하기는 하지만, 옛사람들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본 것 역시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일 따름이다.(이는 옛날을 이상화하고 지금을 말세로 여기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복고적 사상을 비판한 말이다.)


★조선의 시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이제부터 옛날이 되는 것이다.

 만약 성인(聖人)이 중국에 다시 나서 열국의 국풍을 관찰한다면, 이 《영처고(?處稿)》를 상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남녀의 성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조선의 국풍(朝鮮之風)’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영처고서(?處稿序)] 그러니 ‘나의 글’, ‘조선의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연암의 문학관이 잘 드러나는 주체성이라 할 것이다.


★일상어의 사용

 따라서, “진실로 이치를 담고 있다면 집안사람들의 일상적인 말[家人常談]도 관학(官學)에 끼일 수 있고, 동요나 속담도『이아(爾雅)』에 속할 수 있다.”  (연암집 권1. 騷壇赤幟引)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비속어나 시정어 등의 생활어를 그대로 작품 속에 사용함으로써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라 하여 배척을 당하기에 이르렀고, 정조로부터

질책을 받기에까지 이른다.       


★적확한 묘사

 그런가 하면 연암의 작품의 특색의 하나는 적확한 묘사에 있다고도 하겠는데, 대표적인 묘사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조금 뒤에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히니, 해가 이미 서 발은 솟았는데 하늘에는 한 점 티끌도 없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낮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비유 잘하는 이도 흔히들 강물빛 같다 하고 또는 호수(湖水)빛 같다 하나, 말끔하고도 어리어리한 것이 그 무엇인지는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네와 집, 수레와 말들이 모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 태복은, ‘ 이것이 곧 계문(?門)의 연수(煙樹)올시다.’라고 하였다.”    (열하일기.일신수필(馹?隨筆). 7월 16일)


★글의 울림의 중시

 연암은 글의 울림을 소중히 생각했다.

 “결론 부분의, 말이 전환되는 곳에는 깔끔하고 진중한 글자를 써야 글의 울림이 밝고 조리가 명쾌해진다. 예로부터 좋은 작품은 글의 울림[音響] 역시 좋게 마련이다. 비단 시만이 글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산문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44.)

 글의 운율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최근의 실례를 들어보자. 얼마 전 소방서 앞을 지나다 보니, ‘불불불 불조심’이라 써 붙인 표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발음 자체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글자 한 자를 줄여서 ‘불불 불조심’ 했으면 좋았을 것을…. ‘덩덩 덩더꿍’, ‘중중 까까중’이라야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음수율로의 2?3조는 아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의 경우를 본다면 음수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의 논의를 줄이겠다.


★풍자성

 대개 풍속이 다름에 따라 보고듣는 게 낯설었으므로 인정물태(人情物態)를 곡진히 묘사하려다 보니 부득불 우스갯소리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국수집에나 어울리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서리를 능가하고 흰 눈과 겨룰 만하다’는 뜻이다. 이는 밀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하는 말로 국수집에 걸어놓는 글귀이다.)이라는 글귀를 전당포 주인과 머리장식품 파는 가게 주인에게 써 준 일을 서술한 대목…등이 그런 경우다.(‘성경잡지’ 7월 13일과 14일 일기에 보인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p.48)

 이를 강동엽 씨는 “권위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의의를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창작 방법 중의 하나가 戱文이라는 문장 스타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50)


★숭명이존청(崇明而尊淸)

 대외국관에서도 흔히들 ‘반청복명(反淸復明)’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고 하는데, 『열하일기』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반청’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강동엽은 “청의 문물에 대한 흠모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의식은 아직도 명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14)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명나라와 청나라를 대하는 외교적인 노선에서도 ‘崇明而尊淸’의 변증법적 의식을 지녔다는 말일 것이다.



★아쉬운 점 몇 가지

 연암은 워낙 우리 문학에서의 거봉이라서 몇 마디 말로 그의 문학세계를 논한다는 것이 그저 만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먼저 애틋한 사랑에 대한 글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열녀함양박씨전’과 같은 작품도 여성의 정절을 강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만 말하고 있을 뿐이지 춘향전과 같은 사랑의 이야기로 승화되지는 못하였다. 초기작인 「광문자전」에서는 남녀 성욕의 공통성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열하일기』의 심양을 향해 가는 도중의 얘기에는 음담패설 수준의 대목까지도 나온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의 아들 박종채는 증언한다.

 “아버지는 평소 소실을 둔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가까이 하지도 않으셨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p.114) 어디 그뿐인가? 그의 허난설헌에 대한 평을 보면,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열하일기.도강록(渡江錄). 7월9일)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연암의 산문은 천하에 오묘하다.” 그러나 연암은 “만큼은 몹시 삼가 좀처럼 지으려 하지 않았었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48)  [李德懋. 청비록(淸脾錄)]는 말대로 시를 별로 짓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암 자신이 말했다.

 “평측(平仄)을 따져야 하니 시 짓는 일 어렵고….”(나의 아버지 박지원. p.250)라고.

 제일 불만인 점은 한글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병약한 탓도 있고, 할아버지도 자유롭게 키웠기 때문에 박지원은 한적(漢籍) 따위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이은직 지음. 정홍준 옮김. 한국사명인전2. 일빛. 1990.p.299) 열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한적조차 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글(당시에는 언문)이야 더더욱 대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정송강과 같은 한글 대작이 나오지 못한, 안타깝기 그지없는 연유이다.

             

☆ 참고1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생애(요약)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서울 서문제(西門第)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 지금의 서소문 밖)에서 태어났는데,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장하였다. 5대조인 박미(朴?)는 선조의 부마(사위)였고, 할아버지는 경기도 관찰사, 대사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필균(弼均)이며, 아버지는 사유(師愈)이다. 외척이었던 연암가는 척신의 혐의를 피하고자 근신하며 청렴한 생활을 했다. 그런 까닭으로 가문은 비록 노론(老論)의 명문세가였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도 안 되는 밭과 서울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

16세(1752년) 때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그 때까지는 글을 읽지 않았었는데 비로소 처삼촌이며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3년 동안 문 밖을 나가지 않고 발분하여 학문에 전력투구하여 경학(經學)·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문재(文才) 뛰어난 연암은 이미 18세 무렵에 〈광문자전 廣文者傳〉을 짓는 등 1766년(30세) 무렵까지 〈방경각외전 放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전을 지었다.

24세 때 할아버지가, 3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며 서양의 신학문까지 접하게 되었으나,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에의 뜻을 끊었다.

1768년 서울의 백탑(白塔:지금의 파고다 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 주변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그룹'이 형성되어 백탑파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후사가 또는 실학사가로 불리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개성에서 30리쯤 떨어진 두메산골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했다. 연암이란 자호도 바로 이 연암협에서 따온 것이다.

1780년 연암협에서 서울로 돌아와 처남인 지계공(芝溪公) 이재성(李在誠)의 집에서 지내다가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 연경(燕京)에 갈 때 동행, 요동(遼東)·열하(熱河)·북경 등지를 다녀와서(6.25~10.27)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었다.

1786년(50세)에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으로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반 년이 채 못 되는 이듬해 초에 아내를 잃었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20수를 지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789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이듬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 벼슬길에서 물러났다가 1797년에 다시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고 1800년(순조 즉위년)에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승진, 이듬해 65세 때 노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805년(69세)에 사거(死去)하였고, 사후 1910년에 문탁공(文度公)의 시호를 받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에는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이 있다.



☆ 참고2 ;

연암의 문학세계 기초 자료


조선시대에는 이민구(李敏求)(1589∼1670)의 ≪동주집 東洲集≫에 실려 있는 〈독사수필 讀史隨筆〉이나 조성건(趙成乾)의 〈閒居隨筆〉〈독사수필 讀史隨筆〉, 박지원(朴趾源)의 〈일신수필 馹迅隨筆〉 등

독사수필 讀史隨筆〉; 李敏求(1589-1670)가 중국의 상고시대인 堯舜 시대부터 唐宋까지의 주요 인물과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곁들여 엮은 수필 형식의 史書이다. 8卷 4冊의 木版本이다. 이민구는 자가 時光? 호가 東洲·觀海이며 李?光의 아들이다. 自撰序文에 따르면 150일 동안 작업하여 1652년(효종 31) 9월에 완성하였다고 하였으나 간행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성건(趙成乾)의 閒居隨筆〉1688)을 최초 본격 수필이란 용어로 보고 있는데,


연암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조부(박필균)가 관찰사와 대사간을 역임했고 5대조인   박미는 선조의 부마(사위)였다. 박미의 부친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으로 금계공에 봉해진 박동량이다. 이로 인해 연암 가문은 조선 후기 집권파였던 노론 계열에 섰고 수많은 공직자들을 배출했다.

외척이었던 연암가는 척신의 혐의를 피하고자 근신하며 청렴한 생활을 했다. 부친 박사유는 평생 백면서생으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연암은 어린 시절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했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 전주 이씨와 결혼하면서부터다. 연암이 글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안 장인이 직접 <맹자>를 가르쳤고 자신의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연암은 실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를 쓴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그 가난 때문에 뒤늦게 관직에 나간 연암은 이후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제능령을 거쳐 55세 되던 해에 한성부 판관을 역임한 후 안의현감이 됐다. 64세 때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종9품 최하위직에서 시작해 종3품까지 이르렀다. 14년 동안의 공직생활 내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나만의 글쓰기

연암의 글쓰기는 한마디로 ‘나만의 글쓰기’이다. 그리고 그 ‘나만의 글쓰기’는 바로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하는 글쓰기라고 할 수가 있겠다.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되 신명(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사물(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은 것으로서 《역경(易經)》과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역경》은 미묘하고 《춘추》는 드러내었으니, 미묘란 주로 진리를 논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는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드러냄이란 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되는 것이다. 저서(著書)하는 데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잇따라 변해지곤 하여…

장주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없음이 아닌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열하일기서)


*강동엽(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11-12]은, “박지원(朴趾源)은 우언(寓言)의 지나친 미묘함에서 벗어나고,/ 외전(外傳)의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여 이 두 가지를 혼합한 방법으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혼합’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지양(止揚)’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우언이외전’의 방법인 것이다.

*이는 ‘법고창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법고’하고 ‘창신’한다기보다는 ‘법고하면서도 창신한 것’ 곧 ‘법고이창신’의 글쓰기를 행했던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法古而知變]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는[?新而能典] 글쓰기였던 것이다. 글의 형식에 있어서도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합변지기]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제승지권]을 지양한 것, 곧 ‘合變而制勝’의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연암이 바라는 바의 ‘古文而今文’이 되는 것이다. 이를 연암은 자기 자신의 글[오문(吾文)]’이라 하였다.

대외국관에서도 흔히들 ‘반청복명(反淸復明)’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고 하는데, 강동엽은 “청의 문물에 대한 흠모가 대부분이지만 그의 의식은 아직도 명에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p. 14)고 하였다. 이는 ‘崇明而尊淸’의 의식을 지녔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의 ‘용사이신의’와도 통하는 글쓰기이다.


지계공(芝溪公; 李在誠, 박지원의 처남)의 말에 의하면 박지원은 스무 살 남짓해서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했다. 밤낮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이 혹 사나흘씩이나 계속된 적도 있는데, 아홉 편의 전을 지은 때가 아마 그때였을 것이라고 한다. 무료함을 잊고 병을 이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했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p.24)


아버지께서 개성을 유람하시다가 연암골이라는 땅을 발견하셨다.…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마침내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을 정하시고 연암(燕巖)이라 자호(自號)하셨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p.33)

무술년(1778)에 세상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들어가셨다. …유공(유언호)은 아버지와 우정이 아주 깊었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洪國榮)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는가?”

                             (나의 아버지 박지원. p.39)


글을 잘 하는 자는 병법을 아는 것일까?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典掌) 고사(故事)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隊伍) 행진과 같다. 운(韻)으로 소리를 내고, 사(詞)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은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 남김 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破題.파제] 다시 묶어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 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대저 갈 길이 분명치 않으면 한 글자도 내려 쓰기가 어려울뿐 아니라 항상 더디고 껄끄러운 것이 병통이 되고, 요령을 얻지 못하면 두루 헤아림을 비록 꼼꼼히 하더라도 오히려 그 성글고 새는 것을 근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음릉(陰陵)에서 길을 잃자 명마인 추 도 나아가지 않고, 굳센 수레로 겹겹히 에워싸도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는 이미 달아나 버린 것과 같다. 진실로 능히 말이 간단하더라도 요령만 잡게 되면 마치 눈 오는 밤에 채(蔡) 성을 칩입하는 것과 같고, 토막 말이라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면 세 번 북을 울리고서 관(關)을 빼앗는 것과 같게 된다. 글을 하는 도가 이와 같다면 지극하다 할 것이다.   


나의 벗 이중존(李仲存)이 우리나라 고금의 과체科 를 모아 엮어 열 권으로 만들고, 이를 이름하여 소단적치(騷壇赤幟)라 하였다. 아아! 이것은 모두 승리를 얻은 군대요 백 번 싸워 이긴 나머지이다. 비록 그 체재와 격조가 같지 않고, 좋고 나쁨이 뒤 섞여 있지만 제각금 이길 승산이 있어, 쳐서 이기지 못할 굳센 성이 없고, 그 날카로운 칼끝과 예리한 날은 삼엄하기가 마치 무고(武庫)와 같아, 때를 따라 적을 제압하여 움직임이 군대의 기미에 맞으니, 이를 이어 글 하는 자가 이 방법을 따른다면, 정원(定遠)의 비식(飛食)과 연연산(燕然山)에 공을 적어 새기는 것이 그 여기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방관(房琯)의 수레 싸움은 앞 사람을 본받았어도 패하고 말았고, 우후(虞 # )가 부뚜막을 늘인 것은 옛 법을 반대로 하였지만 이겼으니,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법고;

우리나라 시인(詩人)들이 중국의 고사를 쓸 때, 멋대로 차용하기는 했으나,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아서 체험한 이는, 오직 익재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열하일기.피서록(避暑錄)](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69)

계근(季謹)이 한석호(韓錫祜)와 더불어 술로써 막역한 벗이라 하였으니, 가장 가소로운 일이다. 이 둘은 비단 서로 얼굴을 모를 뿐 아니라, 비록 같은 때에 살고 있었으나, 이름자도 통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시주로써 막역한 벗이 되었겠는가. 더군다나 둘 다 평생에 술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를 어찌할꼬.

              [열하일기.피서록(避暑錄)](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70)


取勝의 방법

"문장에도 방법이 있다. 이는 마치 송사하는 자에게 증거가 있고, 장사치가 값을 부르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말의 조리가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재판에서 이길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글 짓는 사람은 경전을 이것저것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연암집 제5권.영대정잉묵(映帶亭?墨).답창애(答蒼厓;兪漢雋)]


“나는 이것이 바로 저것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해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은 산천이며 기후가 중국 지역과 다른데도 글 짓는 법과 문체를 중국에서 본뜬다면 아무리 고상해도 거짓될 뿐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이덕무의 문집 ‘영처고’의 서문으로 쓴 글이다.

조선시대 편협한 사고방식과 고루한 중국 답습에 빠져 있던 양반네들에게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는 그의 일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당시 사대부들은 중국의 옛문체를 흉내내고 모방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했다.

이에 박지원은 중국의 문학작품을 흉내내는 것은 진정한 예술(문학)이 아니라면서

‘옷입고 삿갓 쓴 원숭이가 사람행세하려는 것과 같다’고 했고 ‘남의 털옷이 부러워서 한여름에 그 옷을 빌려 입고 오는 사람과 계절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옛것을 본뜨는[法古] 사람은 그 자취에 구애됨이 병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新] 사람은 법도가 없음[不經]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法古而知變]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新而能典]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今之文 猶古之文也] 

                                             [초정집서(楚亭集序)]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서경(書經)』의 「요전(堯典)」과 「대우모(大禹謨)」,『시경(詩經)』의 국풍(國風)과 아송(雅頌),『주역』의 괘사와 효사,『춘추(春秋)』의 여러 전(傳)들은 모두 당시의 금문(今文)이어서 그때 사람들은 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그 뜻을 점점 알기 어렵게 되어 전(傳)? 전(箋)? 주(註)? 소(疏) 따위가 생겨나게 되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런 줄은 모르고 무조건 옛 사람의 글을 본뜨고 흉내내어 어렵고 난삽한 때깔을 부리면서도 스스로는 ‘간명하고 예스럽다’고 여기고 있으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만약 남들이 자기 글을 읽고자 할 경우 그때마다 자기가 일일이 주석을 달아주어야 할 지경이라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84)


고문(古文)을 배우려는 자는 자연스러움을 구해야 마땅하며, 자기 자신의 언어로부터 문장의 입체적 구성이 생겨나도록 해야지 옛 사람의 언어를 표절하여 주어진 틀에 메워넣으려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서 글이 난해한가 쉬운가 하는 차이가 생겨나며,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결정된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85)


“문장에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이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글을 본떴다고 해서 우쭐하고 으스대면서 지금 사람을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오문(吾文)]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道)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79)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에서 살필 수 있는 점이다.옛날을 기준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이 진실로 비속하기는 하지만, 옛사람들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본 것 역시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일 따름이다.(옛날을 이상화하고 지금을 말세로 여기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복고적 사상을 비판한 글이다.)

그러므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감에 따라 풍요(風謠)도 누차 변하는 법이다.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이제부터 옛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컬어지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종이가 하얗다고 해서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하더라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성인(聖人)이 중국에 다시 나서 열국의 국풍을 관찰한다면, 이 《영처고(?處稿)》를 상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남녀의 성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조선의 국풍(朝鮮之風)’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영처고서(?處稿序)]




진실로 이치를 담고 있다면 집안사람들의 일상적인 말[家人常談]도 관학(官學)에 끼일 수 있고, 동요나 속담도『이아(爾雅)』에 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장이 공교롭지 못한 것은 글자의 탓이 아니다. 저 자구(字句)의 아속(雅俗)을 품평(品評)하고 편장(篇章)의 높낮이를 논하는 이들이 합변(合變)의 기틀과 제승(制勝)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연암집 권1. 騷壇赤幟引)


(대저 장평의 군사가 그 용감하고 비겁함이 지난 날과 다름이 없고, 활.창.방패.짧은 창의 예리하고 둔중함이 전날과 변함이 없건만, 염파(廉頗)가 거느리면 제압하여 이기기에 족하였고, 조괄(趙括)이 대신하자 스스로를 파묻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 하는 자는 버릴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진실로 그 장수를 얻는다면 호미.곰방메.가시랑이.창자루로도 모두 굳세고 사나운 군대가 될 수 있고, 천을 찢어 장대에 매달아도 정채가 문득 새롭다. 진실로 그 이치를 얻는다면 집안 사람의 일상 이야기도 오히려 학관學官에 나란히 할 수 있고, 어린아이들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도 또한 《이아爾雅》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다.  


저 글자나 구절의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篇)과 장(章)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合變之機.합변지기]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制勝之權.제승지권]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비유컨데 용감하지도 않은 장수가 마음에 정한 계책도 없이 갑작스레 제목에 임하고 보니, 아마득하기 굳센 성과 같은지라, 눈 앞의 붓과 먹은 산 위의 풀과 나무에 먼저 기가 꺾여 버리고, 가슴 속에 외웠던 것들은 벌써 사막 가운데 원숭이와 학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글을 잘하는 자는 그 근심이 항상 혼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거나, 요령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아버지는…“삼연(三淵; 김창흡) 공께서는 ‘우리나라 사람들 문집은 상가집 곡비(哭婢)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하신 것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83) 


연암의 법고;

아버지의 초년(初年) 문장은 전적으로 『맹자』와 사마천의『사기』에서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문장에 기운이 펄펄한 것은 그 근본 바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좌구명(左丘明)의 『좌전(左傳)』과『국어(國語)』라든가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글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공부하여 그 문장의 정신과 이치, 대의와 법도를 깊이 터득하셨다.

중년 이후 세상을 벗어나 은거하실 때 및 중국을 여행하실 때 창작한  우언, 해학, 유희(遊戱) 등의 작품 가운데에는 왕왕 장자(莊子)나 불교에 출입한 것이 있다. 만년에는 가의(賈誼)와 육지(陸贄)의 상소문이나 주자가 나라일을 논한 글들을 가장 좋아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편지글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여기서 유래하는 게 많다. 이것이 아버지 문장에서 발견되는 초년과 만년의 차이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86)

*만년의 글은 아마도 벼슬길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환경의 중요성)

  

유한준은 소시적에 고문(古文)을 본뜬 글을 지어 선배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한번은 자기가 쓴 글을 아버지에게 평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편지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문장은 참 기이하군요. 그러나 사물의 명칭에 차용어(借用語)가 많고 인용한 글들이 적실하지 못하니 이것이 옥의 티인가 합니다.…”

한준은 이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년 이래 날마다 비방을 받은 것도 모두 이 자가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이 자는 우리 집안과 100대의 원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63-164)


문체반정

상이 승지와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고, 어제(御製) 공묵합기(恭默閤記)를 보여 주면서 하교하기를, “문체를 번거롭게 하려고 하면 쓸데없이 길어져서 읽을 만하지 못하고, 간결하게 하려고 하면 껄끄러워서 읽을 수가 없다. 번거롭거나 간결한 것 모두 의도를 가지고 구해서는 안 된다. 마치 바람이 물 위를 지나가듯이 저절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상이 이르기를, “문장(文章)은 굳이 억지로 꾸미려고 할 것이 아니다. 무늬[文]란 바탕[質]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호랑이나 표범의 무늬가 개나 양보다 화려할 수밖에 없고, 금이나 옥의 무늬가 기와나 돌보다 빛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어찌 지력(智力)으로 억지로 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은 전혀 고문(古文)의 체재를 모르고 명ㆍ청 시대 제가들의 까다롭고 궤탄한 점을 보고 괴상한 문체를 배워 와서는 ‘나는 당(唐)을 배웠다.’, ‘나는 송(宋)을 배웠다.’, ‘나는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을 배웠다.’고 서로 자랑하니, 이는 한바탕의 잠꼬대이다. 어떻게 정통 고문과 함께 거론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고문에는 고문의 정식이 있고 금문(今文)에는 금문의 정식이 있으니, 육경(六經)이 바로 참 고문이다. 한 구절 한 글자도 보태거나 빼지 못하는 것은 그 법이 엄격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법도는 육경(六經)에 근본하여 그 강령(綱領)을 세우고 거기다 제자(諸子)로써 날개를 달아 그 지취(旨趣)를 다하고, 의리(義理)로써 물을 주어 꽃을 피워서, 위로는 국가의 성대함을 알리고 아래로는 후세에 전범(典範)을 전하는 것이 바로 작가(作家)의 종지(宗旨)이다. 근래의 고문을 배우는 자가 이러한 묘리를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구구한 자구(字句)만으로 그대로 흉내만 내려고 하니, 안목을 갖춘 자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 弘齋全書 제161권.日得錄 1.文學 1]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 譽人文章者

문(文)은 꼭 양한을 본떴다 하고 / 文必擬兩漢

시는 꼭 성당을 본떴다 하네 / 詩則盛唐也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 曰似已非眞

한당(漢唐)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 漢唐豈有且

우리나라 습속은 옛 투식 즐겨 / 東俗喜例套

당연하게 여기네 촌스러운 그 말을 / 無怪其言野

듣는 자는 도무지 깨닫지 못해 / 聽者都不覺


육경의 글자로만 점철하는 건 / 點竄六經字

비하자면 사당에 의탁한 쥐와 꼭 같지 / 譬如鼠依社

(사람들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성스러운 경전에 의지하여 시문을 짓는 것을 비유함)

훈고(訓?)의 어휘를 주워 모으면 / ?拾訓?語

못난 선비들은 입이 다 벙어리 되네 / 陋儒口盡啞


여름철 농사꾼이 허술한 제 차림 잊고 / 夏畦忘疎略

창졸간에 갓끈과 띠쇠로 겉치장한 셈이지 / 倉卒飾??…


하필이면 먼 옛것을 취해야 하나 / 何必遠古?

한당은 지금 세상 아닐 뿐더러 / 漢唐非今世

우리 민요 중국과 다르고말고 / 風謠異諸夏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 班馬若再起

반고나 사마천을 결단코 모방 아니 할걸 / 決不學班馬

   [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 贈左蘇山人(徐有?의 형 徐有本)]


임금님께서는 당시의 문풍(文風)이 예스럽지 못하다고 여기셔서 이를 질책하는 엄한 교지(敎旨)를 여러 차례 내리셨다.…

“근자에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뒤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結者解之)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部) 지어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蔭職)으로 문임(文任)[임금의 교령(敎令) 또는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하는 종2품의 관직인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제학(提學)을 가리킨다. 문임은 문과 급제자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인데, 음직으로 이를 주겠다는 것은 문체반정책에 순응할 경우 이례적으로 중용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06)


당시 서울에 있던 여러 분들은 이렇게들 말했다.

“임금님께서 『열하일기』를 거론하신 건 기실 노여워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장차 파격적인 은총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님의 분부 중에 여러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면서도 특히 박아무개를 들어 죄인 중의 우두머리라고 하신 것은 임금님께서 박아무개에게 주의를 주어 그 글이 좀더 발전되게 함으로써 장차 문임(文任)을 맡기려는 의도이시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08)


지계공이 보내온 편지…

“…제 생각으로는 약간의 우스갯소리만 찾아내어 없애버린다면 『열하일기』 이 책이 바로 순수하고 바른 글일 거외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09)


“나는 새로 글을 지어 바치려고는 하지 않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10)

아버지께서 지은 글 가운데 임금님의 명을 받아 지어 올린 글이 모두 네 편인데,…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10)


죽촌(竹邨) 이공(李公; 이우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그 어른은 대상의 모습을 핍진하게 그렸으며 진부한 말을 절대 쓰지 않았어요. 그분이 지으신 글은 자구가 아담하고 뜻이 참신하여 절로 법도를 이루었지요.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52)


글의 형식

평범한 안목밖에 갖고 있지 못한 채 쩨쩨하게끔 글의 형식에나 얽매어 있는 자들과 어찌 그 고하(高下)를 비교할 수 있겠소.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54)


형식과 내용

박지원(朴趾源)이 합변(合變)을 주장하면서도 잊지 않았던 것은 지나친 기교(技巧)에 대한 경계였다. 내용을 무시한 지나친 형식의 화려함은 오히려 고인(古人)의 법(法)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楚亭集序. 與其?新而巧也 無寧法古而陋也)는 그의 생각은 문학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다시 강조한 것이다.

                           (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43)

내용

글이란 뜻을 표현하는 데 그칠 뿐이다. 글 題에 임하여 붓을 잡는 사람들은 문득 옛말을 생각하고, 애써 經典의 뜻을 찾아다가 근엄하게 그 뜻을 빌려 쓰고 逐字하기를 矜莊스럽게 하고 있다. 이는 마치 畵工을 데려다 초상화를 그릴 때 자기의 얼굴 모습을 바꾸어 나서는 것과 같다. 눈은 떴으나 눈동자는 움직임이 없고 옷 무늬는 가지런하게 되었으나 常道를 잃었으니 비록 훌륭한 畵工이라 하여도 그 眞像은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것이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를까.

     (朴榮喆編. 燕巖集.[慶熙出版社 影印本.1966.] 卷3. p.57. 「孔雀?文槁」自序)

     (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43에서 재인용)


발상의 전환; 창의성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오신 후 이웃에 사는 여러 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을 때다. 그분들은 이전에 자기가 다스리던 고을 봉록의 많고 적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다가 아버지더러 양양은 어떻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농담으로 이렇게 대꾸하셨다.

“1만 2천 냥 받았소이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고말고요!”

그분들은 반신반의하며 어서 자세히 말해보라고 성화였다. 아버지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1만 냥 가치는 되고 녹봉이 2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1만 2천 봉과 겨룰 만하지 않소!”

이 말에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60)   


창신; 소리를 귀로 들으려 하지 마라.

소리는 귀로 듣지 않는다.

텅 빈 마음으로 들어라

귀로 듣는 소리는

마음에 공연한 작용을 일으켜

허상을 만들어 낼뿐이다.

마음을 비우면 내 안으로 강물이 차올라서

내가 바로 강물이 된다.

- 연암 박지원 -


묘사

조금 뒤에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히니, 해가 이미 서 발은 솟았는데 하늘에는 한 점 티끌도 없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낫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 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비유 잘하는 이도 흔히들 강물빛 같다 하고 또는 호수(湖水)빛 같다 하나, 말끔하고도 어리어리한 것이 그 무엇인지는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네와 집, 수레와 말들이 모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 태복은,

“이것이 곧 계문(?門)의 연수(煙樹)올시다.”    (열하일기.일신수필(馹?隨筆). 7월 16일)


朴趾源이 묘사하는 대상은 일반적인 사물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內面世界의 보다 근원적인 것에까지 미치고 있다. (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130)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人生)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한 곳이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였다. 정 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그래 그래, 아니 아니. 천고의 영웅(英雄)이 잘 울었고, 미인(美人)은 눈물 많다지. 그러나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기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金)ㆍ석(石)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하였소.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중에서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欲]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오. 지극한 정(情)이 우러나오는 곳에,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는다면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인생의 보통 감정은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고,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로 인하여 상고를 당했을 때 억지로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지. 그러나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란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그러므로, 저 가생(賈生)은 일찍이 그 울 곳을 얻지 못하고, 참다 못해서 별안간 선실(宣室)을 향하여 한 마디 길게 울부짖었으니, 이 어찌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히 여기지 않으리오.”

한즉, 정은,

“이제 이 울음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 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한다. 나는,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 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가. 그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기쁘지 않을 리 없지. 이러한 기쁨이 늙도록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리 없으며 의당 즐겁고 웃어야 할 정만 있어야 하련만, 도리어 분한(忿恨)이 가슴에 사무친 것같이 자주 울부짖기만 하니, 이는 곧 인생이란 신성(神聖)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결같이 마침내는 죽어야만 하고 또 그 사이에는 모든 근심 걱정을 골고루 겪어야 하기에, 이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서 스스로를 조상함인가. 그러나 갓난아기의 본정이란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거요. 무릇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나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할 것이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저 비로봉(毗盧峯)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長淵 황해도의 고을)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며,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膠]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하였다.

                              (열하일기.도강록(渡江錄).7월 8일)


한시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에게>란 글에선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문학을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말도 하고 있다



옛날을 기준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은 참으로 비속하다. 하지만 옛사람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스스로를 옛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터이다. 당시에 그 시를 살펴보던 사람 역시 일개 ‘지금 사람’이었을 뿐이다. …… 지금 무관懋官은 조선 사람이다. 조선은 산천이며 기후가 중국 지역과 다르고, 그 언어나 풍속도 한나라, 당나라 시대와 다르다. 그런데도 글 짓는 법을 중국에서 본뜨고 문체를 한나라, 당나라에서 답습한다면, 나는 그 글 짓는 법이 고상하면 할수록 내용이 실로 비루해지고, 그 문체가 비슷하면 할수록 표현이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따름이다.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中에서 연암집 제 7 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영처고서(?處稿


무릇 물고기가 물에서 놀면서 눈으로 물을 보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뿐이니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이제 자네의 책이 마룻대까지 닿고 서가에 그득 꽂혀 전후좌우로 온통 책뿐이나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노는 것과 다름없네. 독서하느라 3년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동중서에게 독서법을 본받고, 무엇이나 기록하기 좋아했던 장화에게 기록을 도움받고, 암송을 잘 했던 동방삭에게 암송 재주를 빌려온다고 해도 아마도 자득(自得)할 수 없을 것이네. 그래서야 되겠는가?”연암이 책을 열심히 모아 서재를 꾸민 선비에게 던진 고언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연암이 대답한다. “몸을 방 밖에 두고 창구멍을뚫고 보는 게 제일 낫네. (중략)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것이 옳으리라. (중략) 글을 완상한다는 것이 어찌 눈으로만 보아서 살핀다는 뜻이겠는가. 입으로 맛보면 그 맛을 얻을 것이며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얻을 것이며 마음으로 깨달으면 그 정수를 얻을 것이네.”거칠게 요약하면, 책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항해를 즐기라는 뜻이겠다.

독서론


경험의 중요성;

아버지는 늘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하셨다.…

“신독(愼獨)의 공부가 있어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남들과 함께 거처하며 악의 싹을 미연에 막는 게 낫느니라. 상고시대 사람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학교에 모여 공부하게 한 뜻은 단지 공부에 서로 도움을 주고자 해서만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25 .) 


'그의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그의 문장은 천하의 으뜸이라 할 만하며, 후생(後生)이 배워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구한말 유수한 문장가 김윤식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문장을 이렇게 평하였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문장



서민의식; 박지원의 문학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한결같이 마이너리그로써 똥퍼는 사람, 거지, 장사꾼, 덜떨어진 선비, 과부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한결같이 ‘나사 풀린 사람’이다.

연암문집에 나오는 田家라는 시 한편을 감상해 보자


새쫓는 할마범 밭뚝에 앉았고

개꼬리 조 이삭에 참새 달리네

큰 아이 작은 아이 들에 나가고

외딴집 해종일 사립문 닫혔네


병아리 채려던 소리개 멀찍이 돌고

울 밑의 뭇 닭은 야단만 치네

광주리 인 새아씨 내 못 건너하는데

어린애 누렁이 함께 따랐네


민중시에 해당된다.

이 시는 극한 대립적인 구도가 설정돼 양쪽 진영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할아범과 참새, 혹은 개고리 조 이삭과 참새, 병아리 닭과 소리개 등이 그렇다.

여기에서 할아범 조이삭, 병아리 닭은 기층민중을 상징하고 참새와 솔개는 기득권자, 즉 민중들을 억압하는 사대부 즉 소위 말하는 양반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아내가 건강이 좋지 않자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잇는 처가로 보내고 혼자 집을 지킬 때였다. 그때 젊은 학자였던 박제가가 박지원선생을 최초로 찾았다, 첫만남이었는데, 그는 박제가의 신분을 밝히자 오래전에 익히 들었던 바라 맨발로 마당으로 뛰어가 덥석 두손을 잡고 맞았다. 때가 밥을 먹을 시간이라 그는 부엌에 가 쌀을 씻고 손수 밥을 해서 밥상을 박제가에게 올렸다. 문제는 박제가가 서자출신이다.


박지원은 신분이라는 허울을 파괴하고 명문 거족 중에 거족인 신분을 버리고 아랫것들이 해야 하는 밥을 손수 지어서 대접하고, 학문하는 사람으로써 수평적인 만남을 가진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안의현감시절에 손수 고추장을 담가 서울로 오가는 인편 편으로 편지와 함께 보냈다. 에헴 하고 수염을 쓰다듬을 수 있는 신분이지만, 그는 손수 고추장을 담갔던 것이다


장사치는 4민(四民) 가운데 비록 천한 직업이기는 하나 장사치가 없으면 온갖 물건이 유통될 수 없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p.78)


현실 세계를 편견 없이 탐구하려는 개방적 자세를 강조하였으며, 인식의 상대성을 철저히 자각한 위에서 관점의 대담한 전환을 통하여 자기 중심의 편협한 사고로부터 탈피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아버지는 글 짓는 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론 부분의, 말이 전환되는 곳에는 깔끔하고 진중한 글자를 써야 글의 울림이 밝고 조리가 명쾌해진다. 예로부터 좋은 작품은 글의 울림[音響] 역시 좋게 마련이다. 비단 시만이 글의 울림을 중요시하는 게 아니라 산문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44.)


아버지는 음률을 잘 분별하셨고 담헌공은 악률(樂律)에 대단히 밝으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36.)


이 세 부류의 (명예, 권세, 잇속을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킨다)을 버리고 비로소 밝은 눈으로 이른바 벗이란 것을 찾아보니, 도무지 한 사람도 없사외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p.52)


담헌공(湛軒公)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그 장례 일을 돌보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53)


아버지는 담헌공(홍대용)이 돌아가시자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원문은 현단지비(絃斷之悲)] 때문에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으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15)


숭실(崇實)



완물상지-연암 박지원

골동 그릇을 팔려고 했으나 3년이 지나도 팔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바탕은 툭박진 돌이었다.

술잔으로 쓰자 해도 겉이 비뚤어지고 안쪽으로 말려들었으며 기름때가 본래의 광택을 가리고 있었다.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건만 거들떠보는 자가 없었다. 부귀한 집을 내리훑었으나 값은 더욱 내려가서 수백 전에 이르게 되었다.

하루는 서여요(徐汝五,여오는 徐常修의 자)에게 가져다 보인 자가 있었다. 여오는,

"이것은 붓씻개이다. 이 돌은 중국 복주 수산(福州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오는 것으로 옥 다음으로 쳐주는 옥돌과 같은 것이다."

값의 고하를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8천을 주었다. 돌의 기름때를 닦아내니, 이전에 툭박지게 보이던 것이 그제서야 돌의 무늬가 생기고 푸른 빛을 띠었다. 비뚤어지고 말려든 모양은 가을날 연잎이 마르면서 그 잎을 말아놓은 것과 같았다. 드디어 나라 안에 이름난 골동품이 되었다.

여오가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 가운데 그릇으로 쓰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적당한 용처를 얻어 사용하기에 달렸을 뿐이다."

하였다.

무릇 붓털이 먹물을 머금어 아교가 굳어지면 쉽게 빠져버리므로 먹물을 항상 씻어서 부드럽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 그릇이 붓을 씻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무릇 서화 골동(書畵古董)에는 수장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 감상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사람은 부유하여 많이 수장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자신의 귀만 믿는 자이다.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할 수 없는 사람은 가난하기는 해도 자신의 눈을 저버리지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장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서적은 모두 중국 복건성 건양(建陽) 지방에서 찍은 방각본(坊刻本)이고, 서화는 강소성 금창(金창) 지방에서 만든 가짜이다. 밤톨 껍질 같은 빛깔의 화로를 곰팡이가 피었다고 여겨 갈아 없애려 하고, 대장경이나 경전의 종이가 더러워졌다 해서 씻으려 한다. 엉터리 물건을 보고는 값을 올리며, 진품은 버려두고 수장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플 뿐이다.

신라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입학했고, 고려 사람은 원나라에 유학해서 과거에 급제했다. 이리하여 능히 안목을 넓히고 흉금(胸襟)을 틔웠으니, 그들의 감상하는 학식 역시 당세(當世)에 골고루 갖추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300∼400년 동안에는 풍속이 더욱 더러워지고 촌스러워졌다. 비록 해마다 연경(燕京)과 물건을 중개하지만 썩어빠진 한약재나 거칠고 엉성한 견사뿐이다. 우·하·은·주의 골동품이나 종요(種繇)·왕희지(王羲之)·고개지(顧愷之)·오도자(吳道子)의 진적(眞蹟)이야 어찌 일찍이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던가.

근세의 감상가로서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씨를 일컫는다. 그러나 그에겐 창조적 사고가 없으니 감상가로서 완전하다 할 수는 없다. 대체로 김씨는 감상하는 방법을 개창한 공이 있었고, 여오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으로 볼 수 있는 온갖 사물의 진위를 변별하고, 게다가 창조적 사고까지 겸했으니 감상을 잘하는 사람이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문장에 능하고 작은 해서(海西) 글씨에 공교했다. 아울러 미불(米불)의 발묵법(潑墨法)을 잘하고 한편으로 음악에도 정통했다. 봄 가을 틈이 있는 날이면 뜰과 집에 물을 뿌리고 깨끗이 쓸어 향을 사르며, 차 맛을 품평하였다. 집이 가난해서 좋은 골동품을 수장할 수 없음을 탄식하였고 더욱이 세속적인 무리들이 이를 두고 입방아를 찧어댈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울울 답답해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를 두고 완물상지(玩物喪志)한다고 꾸짖는다면 어찌 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시경》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의 신발을 보고서 감동되어 분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북두칠성을 보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문장에 능하고 작은 해서(海西) 글씨에 공교했다. 아울러 미불(米불)의 발묵법(潑墨法)을 잘하고 한편으로 음악에도 정통했다. 봄 가을 틈이 있는 날이면 뜰과 집에 물을 뿌리고 깨끗이 쓸어 향을 사르며, 차 맛을 품평하였다. 집이 가난해서 좋은 골동품을 수장할 수 없음을 탄식하였고 더욱이 세속적인 무리들이 이를 두고 입방아를 찧어댈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울울 답답해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를 두고 완물상지(玩物喪志)한다고 꾸짖는다면 어찌 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시경》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의 신발을 보고서 감동되어 분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북두칠성을 보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위로하였다.

"감상이란 사람 품격의 등급을 매겨 벼슬에 임명했다는 소위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이다. 옛날 중국의 허소(許소)란 인물이 사람들의 착함과 간특함을 품평하여, 그 판단이 대단히 분명했다고 하나 당시 세상에서 허소를 알아준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지금 여오는 감상의 솜씨가 특출하기에, 많은 사람이 거들떠보지 않는 데에서 이 붓씻개를 능히 알아보고 뽑은 것이다. 아! 슬프다. 여오를 알아줄 사람이장차 누구이랴?"      

                                                                       (筆洗說)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에서

대개 풍속이 다름에 따라 보고듣는 게 낯설었으므로 인정물태(人情物態)를 곡진히 묘사하려다 보니 부득불 우스갯소리를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국수집에나 어울리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서리를 능가하고 흰 눈과 겨룰 만하다’는 뜻이다. 이는 밀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하는 말로 국수집에 걸어놓는 글귀이다.)이라는 글귀를 전당포 주인과 머리장식품 파는 가게 주인에게 써 준 일을 서술한 대목…등이 그런 경우다.

(‘성경잡지’ 7월 13일과 14일 일기에 보인다.)(나의 아버지 박지원. p.48)


지산(芝山) 유화(柳?)는…

“연암 선생이 사람을 깨우치고 계발해주는 방법은 대개 우스갯소리에 있으니,…”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44-145)

권위주의에 저항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의의를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창작 방법 중의 하나가 戱文이라는 문장 스타일로 나타나고 있다.(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50)


박지원이 문학가이자 평론가이자 화가이고 개혁사상가이고 실학자라는 것엔 다들 알고 있을 테지만 박지원이 농업전문가이고 농기구 전문가라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의 酒旗에는,


신선의 옥패 소리 이곳에 머물렀고 / 神仙留玉佩

공경의 금초구는 끌러서 주는구나 / 公卿解金貂


라 씌어 있다. …다락 위로 올라가니, …두 오랑캐들의 생김생김이 사납고도 더러워서, 올라온 것이 후회가 되기는 하나, 이미 술을 청했는지라 그 중 한 좋은 교의를 골라서 앉았다. 술심부름꾼이 와서,

“몇 냥(兩)어치 술을 마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여기서는 술 무게를 달아 파는 것이다. 나는,

“넉 냥만 쳐 오려무나.” 하고 가르쳐 주었다. 심부름꾼이 가서 술을 데우려 하기에, 나는,

“데워선 못 써. 찬 것 그대로 달아 와.” 했더니, 술심부름꾼이 웃으면서 부어 와서 먼저 작은 잔 둘을 탁자 위에 벌여 놓으므로, 나는 담뱃대로 그 잔을 쓸어 엎어 버리고,

“큰 술잔을 가져 와.” 하여, 모두 부어서 대번에 다 들이켰다. 뭇 되놈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래서 넉 냥쭝을 단숨에 마신 것은, 이것으로 저들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대담한 척하려 함이니, 이는 실로 겁쟁이 짓이요, 용기가 아니었다. 내가 찬 술을 달랄 때 여러 되가 이미 3분(分)쯤 놀랐는데, 단번에 마시는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서, 도리어 저쪽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주머니에서 8푼을 꺼내어 심부름꾼에게 술값을 치러 주고 나오려는데, 여러 되가 모두 교의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한 번 앉기를 권하고는, 그 중 한 사람이 제 자리를 비워서 나를 붙들어 앉힌다. 저희는 호의로 하는 것이나, 나는 벌써 등에 땀이 배었다.… 한 되놈이 일어나 술 석 잔을 부어 탁자를 두드리면서 마시기를 권한다. 나는 일어나 그릇에 남은 차(茶)를 난간 밖에 버리고는, 그 석잔을 모두 부어 단숨에 쭈욱 들이켜고, 몸을 돌려 한 번 읍한 뒤 큰 걸음으로 층층대를 내려오는데, 머리끝이 으쓱하여 무엇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와서 길 가운데 서서 위층을 쳐다보니, 웃고 지껄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 내 말을 하는 모양이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1780.8.11)


아버지는 늘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대부분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을 병/통으로 여기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34.)


朴趾源은 日記에서 여인을 대상으로 한 묘사들이 많았지만…

             (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129)


아버지는 평소 소실을 둔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기생을 가까이 하지도 않으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14)


상이 이르기를, “외물(外物)의 맛은 잠깐은 좋아할 만하지만 오래되면 반드시 싫증이 난다. 독서하는 맛은 오래될수록 더욱 좋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음악이나 여색(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문사(文士)와 경(經)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 정사를 하는 여가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서적뿐이다. 그러나 패관(稗官)의 속된 글들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들 문자는 실용(實用)에 무익할 뿐 아니라 마음을 방탕하게 하니, 그 말류의 폐해를 이루 말할 수 없다. 세상에 실학(實學)에 힘쓰지 않고 방외(方外)의 학문에 힘쓰는 자들을 나는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정조. 弘齋全書 제161권.日得錄 1.文學 1]


허난설헌에 대한 평

대체로 규중 부인으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나, 이 외국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겠다.[열하일기.피서록(避暑錄)]


세상 경험이 없어서는 안 된다. 옛날 만석(曼碩)이라는 중은 10년 동안 참선을 했지만 끝내 한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세상 경험이 없던 탓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26)


瀋陽을 향해 가는 도중의 모습에는 음담패설 수준의 대목까지도 나온다.

비장과 역관들이 말등에서, 맞은 편에서 이리 보고 오는 만녀나 한녀 중에서 각기 첩 하나씩을 정하는데, 만일 남이 먼저 차지한 것이면 감히 겹으로 정하지 못하고 법이 몹시 엄격하다. 이를 구첩(口妾)이라 하여 가끔 서로 샘도 하고 골도 내며 욕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하여, 이 역시 먼 길에 심심풀이로서 한 가지의 방법이다.              (열하일기.도강록(渡江錄). 7월9일)


「虎叱」의 女主人公 東里子는 姓이 각기 다른 아들 다섯이 實存하고 있음에 反하여 이 林烈婦(烈女咸陽朴氏傳)야말로 너무 지나친 殉烈이었을뿐더러…

              (李家源. 燕巖小說硏究. 乙酉文化社.1965.p.738)


燕巖은 벌써 그의 初期作인 「廣文者傳」 중에서도 男女 性慾의 공통성을 열렬히 主唱하여…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                     

                     (李家源. 燕巖小說硏究. 乙酉文化社.1965.p.745)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마음에 드는 글을 새로 창작했을 때 한두 사람 뜻이 맞는 이들과 조금 술잔을 기울이다가 글을 잘 읽는 의젓한 젊은이로 하여금 음절을 바로하여 한번 낭낭하게 읽게 하고서는 누워서 글에 대한 평이나 감상을 듣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14-115)

용모;

아버지는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셨으며 용모가 엄숙하고 단정하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73)

아버지는 안색이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거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렛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주름이 있으셨다. 몸은 키가 크고 살졌으며 어깨가 곧추 솟고 등이 곧아 충채가 좋으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74)

아버지는 평소 잠이 적으셨다. 매양 자정을 지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하셨으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75)

옷과 이불에 두꺼운 비단을 사용하는 걸 꺼리셔서 한겨울에 입는 옷이 서민의 가을옷처럼 얇았다. 이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176)


아버지는 시를 퍽 적게 남기셔서 고체시(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를 다 합해도 50수밖에 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48)


연암의 산문은 천하에 오묘하다. 그러나 공은 만큼은 몹시 삼가 좀처럼 지으려 하지 않으셨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48)  [李德懋. 청비록(淸脾錄)]


흩어져 망실된 시가 대체 몇 편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그것 역시 온전한 건 아니며 시의 한두 구절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평측(平仄)을 따져야 하니 시 짓는 일 어렵고

고향 생각에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네.                 (나의 아버지 박지원. p.250)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을 보면 "나는 언문을 모르니까"라는 말이 나온다.


과정록(過庭錄);

과정’은 논어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뜰을 지날 때 공자가 불러를 배우라고 깨우쳐 준데서 유래한다. ‘아버지의 가르침’이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함’을 뜻하는 말이다. 자식이 아버지의 언행과 행적을 기록한 책을 흔히『과정록』이라 한다.


「玉匣夜話」에 나오는 9가지의 奇文은…朴齊家는 이 글들에 대하여 評하기를, “대략은 杜光庭이 지은 ??客傳에 司馬遷의 「史記」 貨殖列傳을 합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대만본 『熱河日記』第 5冊. 卷21. 「玉匣夜話」 後識小註.            

    姜東燁.熱河日記 硏究. 一志社. 88. p.17에서 재인용)


燕巖을 前後하여 몇 十年 사이 文壇의 傾向은 小說에 대하여 깊이 認識되어 있었으며, 그 당시 社會相이 역시 이러한 小說들을 낳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p.112)/

樊巖 蔡濟恭의 記錄(樊巖集)에 의하면, 閨房의 女士들의 愛讀하는 悖說의 권수가 千種에 이르는 한편 그들은 首飾을 팔기도 하려니와, 또는 빚을 내가면서도 書?들에서 세책을 빌렸다 한다.…(p.113)/

형암 이덕무도(청장관전서. 권5. 영처잡고 1. 歲精惜譚)…靑年들이 金甁梅를 읽지 못한 것을 커다란 羞恥로 삼을 만큼 그를 愛讀하였다고 하였다.…(p.114)/

正祖王과 같이 稗官? 小說을 극력 배격하면서도(p.115)/

담배가게에서 小說 읽는 소리를 흥미있게 듣다가, 英雄이 失敗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義憤을 이기지 못한 채 담뱃칼을 앗아서 小說 읽는 자를 찔러 즉시에 죽여버렸다는 옛 이야기를 이끌어서 義俠心에서 저지른 罪囚 申汝倜(?)를 釋放하였다. (p.116)

(“종로거리 연초 가게에서 짤막한 야사를 듣다가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풀베던 낫을 들고 앞에 달려들어 책 읽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게 하였다고 한다. 이따금 이처럼 맹랑한 죽음도 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수많은 사형수를 처리하였으나 그중 기개가 있고 녹록하지 않은 자를 신여척에게서 보았다. … 신여척을 방면하라.” [정조실록 권31. 張]6. 14년 庚戌 下])

                                          (李家源. 燕巖小說硏究. 乙酉文化社.1965.)



열하일기;

권1<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도강록(渡江錄)>:서문은 필자 미상이나, 풍습 및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건물·경목(耕牧)·도야(陶冶) 등 이용후생에 관계되는 일체의 방법을 거짓없이 기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또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랴오양[遼陽]까지 15일간(1780.6.24∼7.9)의 기행문으로 중국인이 이용후생적인 건설에 심취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권2<성경잡지(盛京雜識)>: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譚)><상루필담(商樓筆譚)><고동록(古董錄)>은 흥미 있는 내용이다.


권3<일신수필(馹隨筆)>:신광녕(新廣寧)에서 산하이관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그 서문 중의 이용후생학에 대한 논술이 독특하다.


권4<관내정사(關內程史)>:산하이관에서 연경까지 11일간의 기록으로, 여기 수록된 한문 고대소설 <호질(虎叱)>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의 하나이다.


권5<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연경에서 열하까지 5일간의 기록으로, 열하에 대하여 소상히 기록하였고, 그곳을 떠날 때의 아쉬운 심경을 그렸다.


권6<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열하에 있는 태학(太學)에서 6일간 지낸 기록으로 당시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나눈 한·중 두 나라 문물제도에 관한 논평 및 지동설(地動說)·달세계 등에 관한 토론이다.


권7<구외이문(口外異聞)>:구베이커우[古北口] 밖의 기문이담(奇聞異談)을 적은 것으로, 반양(盤羊)에서 천불사(千佛寺)에 이르는 60여 종의 이야기이다.


권8<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간의 기록으로, 대개 교량·도로·방호(防湖)·방하(防河)·탁타(駝:庭園師)·선제(船制) 등에 관한 논평이다.


권9<금료소초(蓼小)>: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으로 《연암집(燕巖集)》에서는 이를 <보유(補遺)>라 한다.


권10<옥갑야화(玉匣夜話)>:이본(異本)에 따라서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된 것도 있다. 여기 수록된 <허생전(許生傳)>은 연암 소설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권11<황도기략(黃圖紀略)>:황성(皇城)의 구문(九門)에서 화조포(花鳥鋪)까지 38종의 문관(門館)·전각(殿閣)·도지(島池)·점포(店鋪)·기물(器物) 등에 관한 기록이다.


권12<알성퇴술(謁聖退述)>: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권13<앙엽기(葉記)>: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20개의 명소(名所)를 두루 구경한 기록이다.


권14<경개록(傾蓋錄)>:열하의 태학(太學)에서 6일간 머물며, 그곳 학자들과 응수한 기록이다.


권15<황교문답(黃敎問答)>: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권16<행재잡록(行在雜錄)>:청나라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의 자세한 견문록이다. 여기서 특히 청나라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연유를 밝혔다.


권17<반선시말(班禪始末)>:청 황제의 반선(班禪)에 대한 정책을 논하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권18<희본명목(戱本名目)>.


권19<찰습륜포(札什倫布)>:찰습륜포란 티베트어(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열하에 있을 때의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권20<망양록(忘羊錄)>:음악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과 서로의 견해를 피력한 기록이다.


권21<심세편(審勢編)>:당시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기록이다.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을 펼쳤다.


권22<곡정필담(鵠汀筆譚)>:중국 학자 윤가전(尹嘉銓)과 더불어 전날 태학(太學)에서 미진하였던 토론을 계속한 기록이다. 즉,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흡하였던 이야기인 월세계·지전(地轉)·역법(曆法)·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술이다.


권23<동란섭필(銅蘭涉筆)>:동란재(銅蘭齋)에 머물 때 쓴 수필이다. 주로 가사·향시(鄕試)·서적·언해(諺解)·양금(洋琴) 등에 대하여 쓴 것이다.


권24<산장잡기(山莊雜記)>:열하산장에서의 여러 가지 견문기이다.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상기(象記)> 등은 가장 비장하고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권25<환희기(幻戱記)>: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아래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한 소감을 적은 이야기이다.


권26<피서록(避暑錄)>:열하의 피서 산장에서 지낸 기록이다. 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한편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최근 <양매시화(楊梅詩話)>가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주고받은 한시화(漢詩話)로서, 당시 옮겨 쓰려다가 우연히 누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국판 286면 활자본으로, 32년 박영철(朴榮喆)이 6책 활자본으로, 48년 김성칠(金聖七) 국역본이 정음사(正音社)에서 각각 나왔으며, 56년 타이완[臺灣]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사본(寫本)을 영인(影印) 출판하였다. 또 최근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국역총서(古典國譯叢書)》 18∼19책으로 간행된 26권 2책의 이가원(李家源) 국역본이 있다.





☆ 참고3 ;


인터넷한겨레

2006년03월17일 제601호 승려는 사랑을 할 수 없는가


“육체를 타고나서 식욕이나 색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다. 억제할수록 더욱 심해질 뿐이고 오직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지만 않으면 군자다. 그 욕망을 억지로 억누른다면 은근한 음행을 범하게 돼 풍속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높다. 불교를 아내 삼아 평생 독신으로 살 영웅이 있다면 그를 존경하지만, 평범한 이의 수준에 맞추자면 관세음보살이 미인으로 몸을 나타내 음탕한 사나이를 제도했다는 고사대로 하나의 방편으로 수행자에게 결혼을 허해야 한다.”(<조선불교유신론>, 1913)


욕망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 욕망을 칼로 자르듯이 억제할 수 없으므로 있는 대로 긍정하면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뜻일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밤에 어여쁜 낭자로 나타나 묵고 목욕까지 시켜주기를 청했는데 이를 무심으로 도와준 노힐부득이란 수행자가, 이 여성이 자신을 유혹한다며 쫓아낸 달달박박이라는 동료보다 더 먼저 미륵보살로 성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보살핌에 기반하는 이성과의 관계가 수행자에게 허용되고 그 이성에게 성적 욕구가 있다면 현실을 인정하고 욕구을 충족하는 것이 오히려 ‘자비’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부설거사의 설화를 보면 그러한 경우가 나온다.


전북 부안군 월명암 소장의 <부설전>에 의하면, 부설이라는 신라 승려가 그와 결혼을 안 하면 죽겠다는 한 여인의 간청을 받아들여 환속해 거사가 되어 남녀를 낳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수행을 해온 그의 도력은 비구 생활을 해온 다른 동료에 비해 월등히 강했다는 것이다. 만약 상황상 성생활이 더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다면 이를 받아들여 ‘마음 안의 수련’과 ‘몸의 생활’을 어우르는 것도 수행의 방법일 수 있다. 만해가 했던 말은 결국 그 이야기가 아닌가?


☆ 기타 ;

  *?화왕계?, ?조신몽 설화? 이외에도 예컨대 고려 제1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경설(鏡說)?, ?슬견설(?犬說)?, ?괴토실설(壞土室說)?,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도자설(盜子說)?,?등산설(登山說)? 같은 ?훈자오설(訓子五說)?, 최연(崔演:1503-1549년)의 ?묘포서설(猫捕鼠說)?, 남용익(南龍翼:1628-1692)의 ?주소인설(酒小人說)?, 장유(張維, 1587∼1638) 의 ?필설(筆說)?,  어효첨(魚孝瞻)의 「논풍수소(論風水疏)」

 「논풍수소(論風水疏)」등 우리 고전의 훌륭한 수필들을 널리 알리는 일도 매우 긴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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