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2)
동북공정의 첫 실체를 보다
이 웅 재
중국 인구를 13억 대국이라 했다. 전 세계 인구의 1/5이니 엄청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기실 중국의 인구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길이 없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인구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1억이 넘을 것이란 얘기이니 어안이 벙벙하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무 호적 인구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구 억제책 때문이다. 아니, 그것만으로서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그 인구 억제책에다가 남아선호 사상이 함께 결합한 까닭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한족(漢族)의 경우, 부부의 출산은 한 명으로 제한되고 있었다. 바로 이 글을 쓰기 며칠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러니 딸을 낳았을 경우, 호적에 올리질 않았던 것이다. 소수민족의 경우는 보호책으로 2명, 조선족의 경우는 3명까지도 낳을 수 있었단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심각해지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랐을 경우, 학교엘 보내야 하는데 호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별 문젯거리가 될 수는 없다. 호적 담당 관리에게 뇌물만 주면 해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젯거리는 바로 그것이다. 부패-중국 관리의 부패지수는 도저히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가이드는 말했다.
“대학 졸업을 하면서 세무공무원으로 들어가려고 관련 공무원에게 100만 원(한화) 정도를 뇌물로 주었더니, �큼 받더라구요. 그래서 됐구나 싶었지요. 가까운 친척들에게는 한 턱 쏘기도 했다니까요. 그런데, 웬걸, 일주일쯤 지나니까 절 부르기에 신이 나서 달려갔지요. 헌데 뇌물 받는 사람이 제 돈을 돌려주면서 말하더라구요. ‘네 친구 하나가 200만 원을 가지고 왔더구나.’ 그 친구는 동기동창이었는데, 지금도 서로 만나서 그 얘길 하며 고량주 한 잔씩 하고 지내는 터수랍니다.”
뇌물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단다. 시골 출신은 도시로 이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서 뇌물을 주고 도시로 직장을 찾아 나서기도 하고, 뇌물을 주고 군대에 입대하기도 한단다. 그러면 도시 이주가 허가된다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돈만 집어주면 즉시 풀려나올 수가 있다고 했다. 법 조항이 허술한 점이 많아서 어느 조항을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징역을 살 수도 있고 무죄로 석방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윗감으로서의 인기 직종은 경찰. 교통 법규 위반 시의 벌금은 50위엔에서 300위엔 정도인데 그 벌금을 경찰이 받아 나중에 은행에 납부하면 된단다. 그러니 300위엔을 받고서도 50위엔만 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우리의 60년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중국 당국도 이처럼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하여 여러 모로 노력은 하고 있다. 예컨대 심양시장 등 4명의 고관을 한꺼번에 총살을 시킨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중국의 부정부패는 뿌리 뽑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련에 도착 후 첫 관광지는 성해(星海)공원. 몇 년 전 북경에 갔을 때와는 달리 자행거(自行車: 자전거)는 별로 많지 않았다. 공원은 깨끗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광장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바닷물이 깨끗했다. 어디를 가나 광장이 많았는데 그 광장이 제일 많은 곳이 대련이란다. 대련시 100주년(1899~1999) 기념 조각이 이채로웠다. 바다 쪽으로 향한 발자국들을 이어놓은 조각이었는데 바다를 향한 영원무궁한 발전을 상징한다고 했다. 좌측으로 보이는 박물관 건물들의 형태가 상당히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식 후 백두산맥의 최남단이며 고구려 천리장성 중의 한 지점인 비사성(卑沙城)으로 향했다. 비사성, 안시성, 구노성 등은 모두가 고구려의 성이었다. 수․ 당과 전쟁을 할 때면 적군과 대치하게 되는 최전선 산성이었던 비사성은 사면이 절벽이라서 웬만해서는 적군이 접근할 수가 없는 천연 요새였다. 사면이 절벽인 까닭에 서문 이외로는 오를 수가 없는 성이다. 오를 수가 없다는 것은 퇴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전투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목숨을 바치고 싸우던 고구려의 성(城)은 이제 서서히 중국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어 가고 있었다.
높이 663m, 근방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있는 이 비사성은 돌산이면서 악산인 대련 최고(最高)의 산, 대흑산(大黑山)에 있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있었다. 바로 비사성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성문 아래쪽의 돌로 된 안내판에서부터 그 변한 명칭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왕복 2000원(한화)을 따로 내고 에에컨도 없는 9인승 고물차를 타고 올랐던 비사성에서는 그렇게 동북공정의 첫 실체를 보았다.
4년제 요녕대학을 나왔다는 가이드도 사회인이 되기 전에는 이곳이 고구려 땅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말하고 있었다. 옛날 만주벌판으로 알려졌던 동북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변방사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역사적 작업이 바로 동북공정이요, 학력고사에서부터 국사 과목을 제외시켰던 우리나라는 그들의 야심적인 작업에 반론을 제기할 만한 국사학자마저 별로 없는 실정이니 통재, 통재로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는 때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은 가는 곳마다 고구려 시절의 이름이 병행되거나 그 흔적들이 남아 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둘러 사진, 비디오, 탁본 등으로 그 증거들을 확보해 놓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물쩍거릴 시간이 없다.
점장대(點將臺)로 올라가는 곳에는 용의 부조가 꿈틀거리며 고구려의 기상을 한껏 드높이고 있었고 그 양쪽으로는 세 쌍의 석상으로 된 인마(人馬)가 도열한 채 우리를 맞아주고 있었다. 고구려 역사탐방이랄 수 있는 관광을 마치고 내려온 주차장에는 유료 위생간(卫生间)이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도 문을 잠가 놓아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다.
가이드는 태연했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진실로 놀랄만한 방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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