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백두산 등정기 5) 백두산은 왜 중국 땅이 되었는가

거북이3 2007. 7. 22. 01:19
 

(백두산 등정기 5)

    백두산은 왜 중국 땅이 되었는가

                                                     이   웅   재


 단동 톨게이트에 다다르니 앞쪽으로 ‘중국장성동단기점(中國長城東端基点)’이란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단동(丹東)은 원래 안동(安東)이었는데, 1965년 그 명칭을 현재의 단동으로 바꾸었다. 시 전체인구는 240만 정도이고 시내인구는 70만, 조선족이 1만 8천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북위 39도, 따라서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하지만 우리나라보다도 더욱 천혜적인 기후조건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서쪽은 천산산맥, 북부와 동북쪽은 장백산맥이 있어서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찬 공기를 막아주어 겨울 날씨가 온난할 뿐만 아니라 해양을 끼고 있는 까닭에 여름날씨는 선선하다. 이러한 천혜적 조건을 십분 이용하여 중국 정부는 단동시의 개혁 개방에 박차를 가하여 최근 3~4년래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단동시 외곽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도로변으로 허물어 버린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재건축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도 이곳은 계속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거리의 간판에는 ‘鑫’, ‘众’ 자 들이 자주 보였다. 앞의 글자는 ‘기쁠 흠’자이고, 뒤의 글자는 ‘무리 중’ 자로 ‘중(衆)’과 같은 글자였다.

 오른쪽으로는 ‘금강산공원’이란 이정표가 보였는데, 한자로는 ‘錦江山公園’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中国石油’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 ‘가유첨(加油沾; 주유소)’이 있었다. 그런 주유소는 국가 관리의 주유소란다. 더러는 지자체나 개인 소유도 있다고 했다. 물론 그런 곳에서는 ‘中国石油’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다. 휘발유 값은 1ℓ에 한화 580원 정도. 외국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우리나라처럼 기름값이 비싼 곳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국제 유가의 등락에 따라 기름값이 널뛰기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 탄력 세율의 적용으로 유가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줄 필요가 있을 법한데 우리나라의 조세정책 당당자들은 눈 하나 꿈쩍 않는다.

 차츰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시장을 보아 가지고 가는 남자들이 많이 보인다. 퇴근시간이 된 것이다. 70년대 이후 밥 짓는 일은 60% 이상이 남성들 몫이란다. 여권 신장이란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나 싶다. 단적으로 여성절(3월 8일)까지도 있다지 않은가? 아침 식사는 대체로 밖에서 사 먹는단다. 거리에는 ‘小吃’라는 간판이 많이 보이는데 그런 곳이 싼 값으로 대중식사를 하는 곳이란다. 아무리 싸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직접 요리해 먹는 것보다는 비용이 많이 들 것으로 여겨지고, 이런 점은 동남아 지방과 마찬가지로 중국 서민들의 삶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저녁 7시쯤 호텔에 들어갔다가 압록강 변에 있는 북한 사람이 경영하는 청류관에서 석식을 했다. 중국에선 호텔을 가리키는 말이 많다. 대반점(大飯店), 대주점(大酒店), 대하(大廈), 빈관(宾錧) 등. 그리고 초대소는 정부에서 관리하는 여관이요, 그냥 여관, 객관 등은 민간이 운영하는 곳이란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압록강 철교와 단교(斷桥)를 일별하고 강 건너 북한 쪽 경치를 건너다보았다. 강 건너 쪽은 바로 신의주. 우리가 서 있는 단동의 호화찬란한 야경에 비해 신의주 쪽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더욱이 이쪽에는 새로 지은 30층짜리 금지(金地)아파트가 거리의 네온사인과 어울려 웅장하고도 사치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같았으면 프리미엄 2~3억쯤은 붙었음직한 강변아파트였다.

 6․25 때 미군의 폭격으로  절묘하게도 북한 쪽에 해당하는 절반 부분만 끊어진 압록강 단교에는 네온사인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떠한 애절한 색조를 띈 문학적 묘사보다도 더욱 애끊는 심정을 절감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절반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절반의 비극을 무언으로 드러내주는 그 모습은, 우리 한반도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토록 절실하게 느낄 수는 없으리라. 두 도시의 차이는 특히 야경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단동은 북한으로 들어가는 생필품의 80 퍼센트가 통과하는 경제 요충지이다. 평일이면 새벽 동이 틀 무렵부터  5톤~ 10톤가량의 트럭 수십여 대가 신의주에서 단동으로 들어오고  저녁 해질녘쯤이면 식량과 생활용품, 건설 자재나 온갖 기계류의 부품 등을 구입해 가지고 신의주로 돌아간단다.

 북한당국도 극심한 기아와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여러 모로 노력을 하기는 했다.  2001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정일은 신의주특별행정구 설치를 계획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위화도를 비롯한 압록강 내에 있는 모든 섬을 백두산의 1/3과 맞바꾸고 신의주를 대대적으로 개발하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다음해 9월에는 중국 자본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중국인 사업가 양빈(楊斌)을 행정장관에 임명하기도 했고. 그러나 중국은 양빈이 중국 공산당 쪽에 알리지 않고 갔다고 해서 2002년 10월 그를 탈세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김정일의 꿈을 간단히 꺾어버렸다. 그리하여 능력제를 인정하는 일부 시장경제 제도를 적용하는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던 북한 경제는 다시 주저앉고 만 것이다.

 가지광장(佳地廣場)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생활 댄스를 추고 있었다. 저녁 먹고 밤 10시 정도까지 늘 저렇게 춤을 춘단다. 건강관리에다가 여가 선용, 취미생활까지 겸한 다목적 춤이라는 것이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조금 더 많았는데 한 쪽에서는 비교적 격렬한 사교춤도 선보인다. 건너 쪽 대형 건물 벽에는 ‘丹東最好的商住公寓’라는 광고판도 번쩍이는 것이었다. 단동에서 제일 좋은 주상 복합 건물이라는 광고일 게다. 그렇게 단동은 신의주를 초라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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