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3)
모두들 “신콜라(수고했습니다)”
이 웅 재
사람은 먹어야 산다. 먹으면 배설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배설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넓은 만주 벌판에는 배설할 곳이 별로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문젯거리로 느껴진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위생간(卫生间)이었다. 세수간(洗手间)이라고도 하는 화장실을 만나기가 왜 그리 힘든 일인지? 보통 4~5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여행 코스에서 화장실 구경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유료 위생간마저 잠가놓은 판국이었으니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할까? 배설할 곳이 없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이드가 말했다.
“저쪽에 철거하다가 남은 건물 벽이 하나 있지요? 그 왼쪽은 여성분들이, 그리고 그 오른쪽은 남성분들이 이용하세요.”
대한민국의 문화 시민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처음엔 모두들 펄쩍 뛰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의지가 아무리 굳어도 배설작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망설이고 눈치만 보던 문화 시민들은 정말로 급한 한두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가자, 때는 이때라는 듯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여긴 ‘남좌여우’도 없나? 그러나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왼쪽은 비교적 은폐가 용이한데 오른쪽은 그대로 툭 터진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시원스런’(노천이라서 더욱) 방뇨를 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버스로 올라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순식간에 측소(廁所; 여기선 시골의 화장실)로 변했는데, 이 측소에서는 ‘일보전진’, ‘조준정확’과 같은 유의사항들도 없어서 더욱 후련한 배뇨를 할 수가 있어 좋았다. 이와 비슷한 일들은 이후로도 종종 연출되었던 것이니, ‘화장실 문화가 그 나라의 문화 척도를 대변한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닌 듯싶었다.
따라서 이 만주벌판을 누비고 다니려면 반드시 휴대하여야 할 물건이 있으니, 그건 바로 화장지인 점을 알아야만 한다. 누군가가 옥수수 밭에서 큰일을 본 후 그만 단체비자인 A4용지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나서, 뒤미처 그 사실을 깨닫고 그 난감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에 관한 가이드의 얘기를 듣고는, 모두들 웃을 수도 없어서 혼이 나기도 했다. 모두들 “신콜라(수고했습니다).”
자, 이제는 분명해졌다. 중국의 발전은 화장실 문화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말이 나온 김에 최근 중국의 발전 단계를 한번 짚어보자. 어느 나라이고 간에 나라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도 지도자의 철학이 뚜렷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첫 번째 단계가 모택동 시대라 할 것인데, 그는 중국을 열강의 손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공산주의를 실시하여 도둑이나 거지가 없는 사회를 건설한 공이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가 주도했던 문화혁명은 지식인 배척 운동, 쇄국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될 수 있을 만큼 중국의 역사 발전을 한 40년쯤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 단계는 등소평 시대. 그는 ‘백묘흑묘(白猫黑猫: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아주기만 하면 좋은 고양이’라는 뜻)란 말을 남기며 1978년 개혁 개방 정책을 내세워 경제발전에 전력투구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길을 잘 닦아야 한다.’ 등소평의 실용주의 노선을 상징하는 문구라 하겠는데, 그렇게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데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경제적 부를 성취하도록 하자는 주장 아래 지역적으로는 연해(沿海) 지역과 남부를 먼저 개발하고 거기서 얻은 힘으로 동북부와 서부의 내륙지역을 개발한다는 구상을 내세웠다. 이러한 정책(소위 선부론[先富論])은 필연적으로 빈부차이의 심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그 다음 단계는 강택민 시대가 된다. 그는 홍콩(1997년)과 마카오(1999년) 등을 흡수하는 등 실지(失地) 회복을 함으로써(등소평 시대에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놓은 일이기는 하지만) 조국 통일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망을 충족시키면서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 정책을 견지하여 왔다. 그는 또한 자본가계급도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이들을 중국사회주의 발전의 주체세력으로 삼아 개혁개방을 한 차원 더 높이는 역사적이면서도 전략적인 정책을 동시에 이루려 하였다.
다음 단계는 호금도 시대이다. 그는 등소평의 선부론을 비방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지만, 동부 연안지방과 서부 내륙지방 간, 산업 간, 도농(都農) 간, 업종 간 심각한 빈부의 격차를 없애자는 균부론(均富論)을 전면으로 내세우면서 전면적인 개방 정책을 펴기에 이른다. 아직 '미해방' 지역인 대만에 대해서도 하나의 중국이라는 기본적인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교적 유연한 자세로 임하였다. 이를 흔히들 ‘양식장의 물고기’ 전략이라고 한다. 대만의 정권이 ‘독립’을 명언하거나 국민투표로 독립을 결정하지 않는 이상 중국으로의 귀속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을 강행하려 할 때는 언제라도 잡아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양식장의 물고기’인 것이다.
시원스레 노천 측소를 이용한 우리 일행은 이제 단동(丹東)으로 향했다. 단동까지는 버스로 4시간쯤 걸린단다. 중간에 대고산복무구(大孤山服务区)라는 휴게소가 단 1군데 있을 뿐인 고속도로를 달렸다. 차창 밖으로는 보이는 풍경은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과 별 차이가 없는 듯싶었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라면 산자락마다 보였어야 할 무덤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측면과는 다른 면에서 등소평이 거목처럼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마저도 죽으면 화장을 하라고 유언을 했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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