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16)
졸본산성은 어디 가고 오녀산성만 남았는고
이 웅 재
6월 22일. 금요일.
예정보다 10분쯤 늦은 7:20경 호텔을 출발하다.
“호텔에 남겨둔 것 없지요?”
으레 하는 말이지만, 가이드에게는 중요한 발언 중의 하나이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 확인해 보아야만 할 말이다.
“마음만 남겨놓았는데요.”
그저 해보는 말이지만, 참말로 마음을 남겨놓았다면 그건 큰일이다. 오늘은 고구려의 유적지 졸본산성을 탐방해야 하는 날인데, 마음 없이 어떻게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적들을 역참(歷參)할 수 있겠는가?
가이드가 말했다.
“내년 7월쯤이면 ’08 올림픽을 겨냥한 송강하(松江河) 비행장이 백산시에 들어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3박 4일 코스로 서파, 북파의 백두산 등정이 충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구려 유적까지 보려면 1박 정도만 추가하면 되겠지요.”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환인현(桓因縣)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에 혼강(渾江; 沸流水)이 흐른다. 동부여에서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帶素)로부터 도망가던 주몽이 여기 비류수(당시의 이름은 엄체수[淹滯水], 일명 개사수[蓋斯水])에 이르러 배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하늘에 대고 "나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자인데(天帝孫河伯甥), 나를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소리치자 어별(魚鼈)들이 모여들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곳이다. 시간은 9:44. 여기서 우리는 버스를 갈아타고 졸본산성(卒本山城)을 오른다, 졸본산성, 고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우고 도읍했던 곳이다. 이곳 중국 사람들은 고구려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싶었다. 오른쪽으로는 자연석에 한글로 ‘국가지정공원’이라고 씌어 있었다.
산성의 서문 입구에 이르러 안내 지도를 보니, 졸본산성은 어디 가고 ‘오녀산성(五女山城)’만 있었다. 그렇다. 여기서도 동북공정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내지도의 우측 절반은 고구려 역사와 관련된 졸본산성의 유적인데, 좌측의 절반은 고구려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중국 쪽의 조작된 유적 지역이었다. 말하자면, 오른쪽은 졸본산성이요, 왼쪽은 오녀산성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전체의 이름으로서는 오녀산에 있다는 것을 내세워 ‘오녀산성’이라고 한 것이다.
처음 주몽이 나라를 세웠을 당시의 환인의 이름은 홀본(忽本) 또는 졸본(卒本)으로 불렸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흘승골성(紇升骨城)은 흔히 졸본산성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이 졸본산성이 느닷없이 오녀산성으로 둔갑을 한 것이다. 오녀에 대한 유래는 여러 가지다. 북쪽방향에서 바라본 오녀산의 봉우리가 다섯 개라서 붙은 명칭이라는 설도 있고, 당나라군에게 쫓기던 다섯 궁녀들이 꽃잎처럼 절벽 위에서 떨어져 죽어서, 그 애틋한 넋을 기리기 위해 붙었다는 설도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고구려와는 전혀 관계없는 중국 측의 설화마저 창작되어 유포된다고 한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 꾸며낸 이야기가 이 오녀산성, 아니 졸본산성의 유일한 유래로 남아 전하리라. 애재(哀哉), 애재요, 통재(痛哉), 통재로다.
산성으로 오르는 계단은 999계단이라고 했다. 백두산보다는 적었으나, 어제 백두산의 그 1,300계단을 올랐고, 이어서 금강대협곡도 걸어서 관광하였기에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햇볕은 또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여기서도 가마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마를 타고 오르기는 싫었고, 그래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강행군을 해 보았다.
정상으로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선 코스의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이요, 또 하나는 그 직선 코스를 가운데 두고 $자 식의 지그재그로 오르는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곧 죽어도 직선 코스로 올랐는데, 중간쯤 이상에서는 관절염도 있으면서 무리하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 $자 식의 지그재그길을 택하였다. 글쎄, 주위의 권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직선 코스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굴처럼 되어있는 곳의 철사다리를 올라가야 하는 마지막 깔딱고개도 있었다. 환도산성이 3면이 산악을 의지해 있었는데 비하여 이곳의 졸본산성은 4면 전체가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되어 있었다. 산 전체의 모습이 일반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철(凸)’자의 모양인 것도 특이했다. 그중에서 그래도 이 서문 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한 편이었는데, 여기도 그 마지막 부분은 이처럼 깔딱고개를 준비해 두고 있었으니, 예전 철사다리가 없었을 적에는 어떻게 적군이 성안으로 잠입을 할 수가 있었을까? 더구나 이곳 성문도 역시 옹문, 그러니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바위굴을 밑에서부터 기어오르는 적군들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가 있는 천혜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고구려군이 적과 싸울 적마다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워낙 용감무쌍한 그 기개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이처럼 천험의 지형을 이용한 철옹성으로서의 전시성(戰時城)을 가졌던 까닭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곳의 평지성은 물론 환인성이었을 것이고.
성의 위쪽은 높이 820m에 남북 1,000m, 동서 300여 m의 넓은 평지가 이어졌다. 성으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지닌 셈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을 훔쳐대며 확 트인 넓는 공지에서 일단 숨고르기를 한 다음, 성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굽이 돌아가니 왕궁터가 나온다. 여기가 고주몽이 지내던 곳이란다.
왕궁터라고는 하지만 별로 넓지는 않았다. 전시의 임시 거처를 고대광실 호화롭게 경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춧돌 자리는 7개, 그러니까 6칸짜리 왕궁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이 나라를 건국했던 고주몽이 언제, 왜, 우리 동네로 와서 불고기집을 하고 있는지, 아마 주몽은 활만 잘 쏘았던 것이 아니라(예전에는 ‘善射者’ 곧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다.) 장삿속도 무척 밝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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