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정기

(백두산 등정기 18) [大尾] 만주벌판 2,100km를 누비고 나서

거북이3 2007. 8. 2. 22:18
 

(백두산 등정기 18) [大尾]

   만주벌판 2,100km를 누비고 나서

                                                                                                              이   웅   재


  1:00경. 고려성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은 후 단동으로 이동하다. 6:00경 단동에 도착할 것이란다. 그리고 호텔 투숙, 이튿날은 일어나자마자 다시 대련으로 달려야 한다. 한 마디로 잘못된 코스인 것이다. 가이드도 말했다. 왜 심양으로 가서 거기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면 간단할 것을 꼭 단동을 거쳐 대련까지 가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여행사에서 현지 사정을 잘 모르고 초기에 다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니까 귀국하거든 인터넷을 이용하여 많이 건의를 해 달란다. 우리나라 여행사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직 멀었다. 손님의 구미를 맞출 줄 모르고, 효과적인 여행 일정을 잡을 줄 모르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정상적으로 세금 내고 장사할 수는 없어요.”

 가이드의 말이었다. 그가 경영하는 단고기집 얘기인 것이다. 그는 한때 금강산 관광 코스를 개발하려고 했었단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절대로 허가해줄 수 없다고 하더란다. 이유는 남한에서 항의 때문이라고 했다. 모처럼 큰 사업  한 번 해 보려다가 헛물만 켰다는 것이다.

 단동계(丹東界)의 산길로 들어서면서 길은 ㄹ자형으로 계속 꾸불꾸불 이어졌다. 지루할 만큼 그런 산길을 달리더니 간신히 평지로 접어들었는데, 달리는 건 우리뿐, 가끔 소떼, 염소떼 등이나 만나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완전히 시골길,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그런데, 어이쿠, 저, 저런! 한길 옆 냇물에서 남자 어른 서넛이 목욕을 하고 있는데, 완전 나체였다! 저, 저, 저 사람, 우리 버스 쪽을 바라보고 있잖아! 저 시커멓고 큼지막한 물건을 있는 대로 다 드러내고! 무신경하다고 해야 하나,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인 나도 얼굴을 돌렸는데, 우리 같이 가신 여성분들은 어떻게, 구경 한 번 잘 하셨는지요?

 헌데, 마을을 지날 적마다 이상한 것이 보였다. 거의 모든 집들이 지붕 끝에 나뭇가지 같은 것을 매달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비가 올 때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하기 위한 것인가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물었다.

 “아, 저거요? 그만 깜빡 잊고 말씀 못 드렸네요.”

 우리가 여행을 떠나오던 날이 음력 5월 5일, 단오일이었다. 중국에서는 단오가 춘절, 추석과 함께  ‘3대 명절’이라고 했다. 단오는 초나라 때의 충신 굴원(屈原)을 기리기 위한 날이란다. 억울하게 추방을 당한 굴원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고결한 성품을 기리기 위해 소금에 절인 오리알을 먹고, 집집마다 쑥을 뜯어 저렇게 지붕에 꽂아 놓는단다. 물론 그것은 벽사 진경(辟邪進慶)의 의미였던 것이다.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가 조그마한 도시로 들어섰다. 거기서 거지를 보았다. 사회주의 나라에는 거지가 없는 줄 알았는데…. 물론 그것은 자본주의의 선물이었다. 일본에서는 재벌급의 거지도 있었지만, 이곳의 거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빈털터리 거지였다. 그들에게는 재산만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일하고자 하는 의욕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길가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을 뒤져서 파먹고 버린 수박통을 꺼내어 머리를 파묻고 갉아먹더니 별로 먹을 것이 없는지 금방 다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린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가이드의 말로는 13억 인구 중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9억에 해당하는 농민들인데, 최근 들어 농민에 대한 처우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요새는 세금도 거의 없고, 금년부터는 의료보험도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의식부터 깨어야 할 것인데, 그들에게는 반항의식도, 단결의식도 없단다. 회사 같은 경우에도 사장이 웃으면서 인간적으로 대해 주어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고 했다. 욕하고 때리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지나친 관점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보고듣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지 싶었다.

 최근 중국인들의 외국인 선호도는 단연 한국 쪽으로 기울어졌단다. 일본 사람들과는 조어도(釣魚島) 문제 등으로 한때는 그 사이가 매우 껄끄럽기도 했단다. 심지어는 아파트 내에 주차되어 있는 일제차를, 위쪽에서 돌멩이 따위를 내려던져서 부서지게 만들어도 경찰이 수수방관하는가 하면, 백화점에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다행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라고 안심만 해서는 안 된다. 언제 그 ‘동북공정’ 따위의 문제로 일본처럼 마찰이 생기게 될지 누가 아는가?

 첫날 대련에서 묵었던 홍원호텔에 다시 도착하니, 로비에는 ‘단동 강치령 발전 유한공사’ 명의의 못 보던 플래카드가 하나 걸려 있었다.

 “조선 상무대표단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강치령(康齿灵), 아마도 북한 치과의사 협회쯤에서 회의차 온 모양이다. 혹시라도 지나치다가 말이라도 주고받을 기회가 있을까 했으나, 그 사람들, 회의 때문에 바쁜지 지나치면서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만주벌판 2,100km를 달린 마지막 날 밤의 기분은 그래서 허허로웠다.


 6월 23일. 토요일.

 03:00에 모닝콜, 04:00에 출발하여, 05:00경 고속도로 유일한 휴게소에 들렀다가, 대련에서 10:50 비행기로 인천으로 돌아오다. 그렇게 하여 4박 5일의 백두산 등정 및 고구려 유적 탐방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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