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⑮
왕을 하라고 해도 싫다고 했던 김인문(金仁問)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州府 人物條]
이 웅 재
왕을 하라고 해도 싫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요,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金仁問)이다. 자(字)는 인수(仁壽),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유가(儒家)는 물론, 노장(老莊) 및 불가에도 정통했다. 그런가 하면 글씨도 잘 썼고 말타기, 활쏘기도 명수였으며, 요사이 가수 못지않은 음악에 대한 소질도 대단하였다.
그러한 그가 진덕왕 5년(651), 23살 꽃다운 나이에 왕명으로 입당(入唐) 숙위(宿衛)하였다. 숙위란 원래 궁궐에서 군주를 호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입당해 당의 국학(國學)에서 수학하고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후 당의 수도에서 친위(親衛)하는 관비유학생을 말한다. 공짜 유학(留學)하고 그 나라 대통령 호위병까지 하고…그 정도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당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다. 그는 왕자인 것이다.
그가 한 차례 귀국하여 아버지를 뵌 후의 일이다. 신라가 여러 차례 백제의 침공을 받자, 당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그 수치를 씻으려고 숙위하러 가는 인문을 통하여 군사를 청하게 하였다. 마침 당 고종이 소정방을 대총관(大摠管)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려는 중이었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서 지형지물에 대해서 물었다. 인문이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아주 자세히 알려주었다. 황제가 기뻐하여 제서(制書;황제의 글. 제후나 왕의 경우 敎旨 또는 王旨라 칭한다.)를 내리어 그를 부대총관(副大摠管)에 임명하였다.
드디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지금의 덕적도)에 이르렀는데,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가득 실은 큰 배 100척으로 맞이하게 하였다. 사기충천한 당군이 백제군과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도성에까지 들어가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등을 포로로 잡았다. 대왕은 인문의 공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각간으로 높여주었다. 그 후 인문은 곧 다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문무왕 원년(661)에 당 고종이 인문을 불러서 말했다.
“내가 이미 백제를 멸하여 너희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였는데, 이제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하니, 너는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여 군사를 출동, 함께 칠 수 있도록 하라.”
황제가 소정방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이 결사 항전하는데다가 큰 눈이 내렸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인문은 다시 당에 들어가 황제의 수레를 따라 태산(泰山)에 올라가 봉선(封禪;중국고대의 제천의식)의 의식에 참여, 우효위(右驍衛; 궁성 내외를 지키는 일을 맡은 관직) 대장군으로 승격 임명되었다.
문무왕 8년(668)에 다시 당 황제가 이적(李勣)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하면서 또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한 달 이상이 지나 고구려왕 장(臧;보장왕의 이름. )과 연개소문의 세 아들 남생(男生), 남산(男産),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아 이를 소정방이 데리고 돌아갔다.
문무왕 13년(673)에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니, 당나라 황제가 크게 노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와서 치고, 조서(詔書)로써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그리고 인문을 형 대신 신라의 임금으로 봉하였다.
우리는 왕의 자리를 놓고 혈육 간의 골육상쟁을 벌인 일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그런데 인문에게는 뜻하지 않게 왕의 자리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인문은 간곡히 사양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 인문의 사람됨을 알아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인문의 간곡한 사퇴와 더불어 문무왕이 사절을 보내 사죄를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곧 황제가 왕의 관작을 회복하여 주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던 인문도 중도에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전의 관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문무왕 19년(679)에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무위위(行右武威衛; 무위위는 대궐을 경호하는 부대의 하나이다. 行은 위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위계의 관직을 받을 때에 붙이는 것이다. 김인문이 종2품으로써 종3품의 직을 받았기 때문에 ‘行’자를 붙인 것이다.) 대장군에 보임되고, 신문왕 10년(690)에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임해군개국공(臨海郡開國公) 좌우림군장군(左羽林軍將軍;우림군은 날랜 말을 타고 조회 시에는 황제를 호위하며, 순행 시에는 길 양쪽에서 호위하는 의장을 담당하는 군대이다.)에 제수되었다. 효소왕 3년(694) 4월 29일에 병으로 누워 당나라 서울에서 죽으니, 향년이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매우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하고, 여러 고관들로 하여금 그의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왕(孝昭王)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였다. 그리고 그의 영구(靈柩)는 이듬해 10월 27일,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인 경주의 서쪽 언덕(西原; 경주 西岳 아래. 지금 西岳書院 構內에서 金仁問의 묘비 일부가 발견되었다.)의 태종무열왕릉 아래에 묻혔다. 인문이 일곱 번 당에 들어가 그 조정에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무릇 15년이요, 당나라에 머물었던 기간은 22년이나 된다. 자세한 행장은 삼국사기 권44 열전 제4에 기록되어 있다.
요새는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자꾸만 김인문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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