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전 수필

(고전수필 순례 14) 경회루 기(慶會樓記)

거북이3 2008. 3. 17. 23:58
 

(고전수필 순례 14)

       경회루 기(慶會樓記)

                                                                     하 륜(河崙) 지음

                                                        이  웅  재  해설

전하(태종) 즉위 13년 봄 2월에 뒷 대궐 서루(西樓)가 기울어지고 또 위태하므로, 경복궁(景福宮) 제거사(提擧司)1)에서 의정부에 보고하여 전하께 아뢰니, 전하께서는 놀래어 탄식하며 이르시기를, “우리 선고(先考)2)께서 창업하시고 처음으로 세우신 것인데, 벌써 그렇게 되었단 말이냐.” 하시고, 이내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게, “농사 때가 가까웠으니, 아무쪼록 놀고먹는 자들을 부려서 빨리 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자청 등은 지면(地面)을 헤아려서 살짝 서쪽으로 당기고, 그 터에 따라 약간 그 규모를 넓히어 새로 지었으며, 또 그 땅이 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樓)를 에워서 못을 팠다. 완성이 되자 전하께서 거둥하여 올라 보시고,  “나는 이전 형태를 그대로 두고 수리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전보다 과하지 않느냐.” 하시니, 박자청 등은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 등은 후일에 또 기울어지고 위태하게 될까 두려워서 이와 같이 하였사옵니다.” 하였다. 이에 종친ㆍ훈신ㆍ원로들을 불러 들여 함께 즐기시며 누의 이름을 경회(慶會)라 하고 인하여 신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기(記)를 지으라 하시기에 나는 글이 졸렬하지만 감히 사양을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공자께서 노나라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시기를, “정사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을 잘 얻고 잘못 얻는 데 있다.” 하셨다 한다. 대개 인군(人君)의 정사는 사람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사람을 얻은 뒤에라야 ‘경회(慶會)’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개 정무의 여가에 도덕이 있고 정치의 대체를 아는 신하를 인견(引見)하는 것은 좋은 계획을 받아들이고 도의를 강론하여 정책을 마련하는 근원을 바르게 하려는 것이니, 이로써 더욱 전하께서 참으로 근정(勤政)의 근본을 알고 계심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적이 한 번 논해 보건대, ‘경회’라는 것은 군신 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니,…(중략) …

 우리 태조께서 이미 근정으로써 국가의 본을 삼아 다스리셨고 전하께서 또 경회로 근정의 본을 삼아 힘쓰시니, 창업의 아름다움과 계술(繼述)3)의 선한 점이 아, 성대하도다. 능히 3대4)의 경회를 따르고 3대의 정치를 이루어 그 모훈(謨訓)5)을 길이 세상에 끼치어 큰 복을 한없이 누리게 될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도다. 이를테면 산악은 수려하고 원지(園池)는 유심(幽深)하여 빙설(氷雪)이 궤안(几案)에서 나는 듯하고 강호(江湖)가 뜰에 접해 있는 듯하며, 송백(松柏)이 무성하고 화초가 우거지고 풍연운월(風烟雲月)과 조모음청(朝暮陰晴)의 경물들이 관람(觀覽)하는 사이에 있는 것을 이루 다 형용할 수는 없지만, 그 누의 흥복(興復)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기울어진 것을 바르게 하고 위태한 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선세의 업을 보존하는 것이요, 터를 다지기를 튼튼히 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뽑아낸 것은 큰 터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대들보와 주춧돌을 우람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은 빈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자잘한 재목이 구비되기를 취한 것은 작은 일을 맡은 자는 커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처마의 기둥을 탁 트이게 하는 것은 총명을 넓히려는 것이고, 섬돌을 높이 쌓은 것은 등급을 엄하게 하려는 것이고, 내려다보면 반드시 아슬아슬한 것은 경외하는 생각을 갖게 하려는 것이고, 사방이 빠짐없이 다 보이게 한 것은 포용(包容)을 숭상한 것이고, 제비가 와서 하례하게 하는 것은 서민이 기뻐하는 것이며, 파리가 붙지 않게 하는 것은 간사한 소인을 제거함을 의미한 것이다. 단청을 호화찬란하게 하지 않는 것은 제도 문물의 적절함을 얻기 위함이며, 유람의 즐거움을 때에 맞춰 하는 것은 문(文)ㆍ무(武)를 늦추고 조이는 적의한 방법이니, 진실로 오르내리는 때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그것으로써 정사에 베푼다면, 누의 유익됨이 진실로 적지 않을 것이다. 감히 이를 들어 아울러 기록하는 연유이다.


해설:

*숭례문의 방화로 국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은 숭례문뿐만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번호에는 ‘경회루 기’를 소개하기로 했다.

 “韓國文學槪論”(한국문학개론편찬위원회 편. 혜진서관. 1991)에서는  ‘기(記)’를 “어떤 사물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글, 紀事․志․述이라고도 함. 자기의 이론을 섞어 쓴 변체의 記도 있음”이라고 하면서, 이를 ‘비평수필’(pp.542-545)로 분류하였다.

 지은이 하륜(河崙: 1347∼1416)의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1365년 문과에 급제했는데 시험관 이인복(李仁復)이 대뜸 그릇됨이 큰 것을 알아보고 아우 인미(仁美)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풍수지리에도 밝아 태조의 계룡산 천도를 적극 저지했고, 한양의 모악(母岳)이 길지라 하여 정도전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고 문집으로는 “호정집”이 있다. 이글은 “동문선” 제81권에 실린 글이다.

**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전 민족문화추진회)의 것을 따랐으나 맞춤법, 띄어쓰기와 부분적 윤문과 주(註)는 해설자가 달았다.      

   (08. 3. 10. 원고지 16매 정도)   http://blog.daum.net/leewj1004

 

1) 경복궁을 관리하던 관아. 태조 3년(1394)에 설치하여 세조 12년(1466)에 전연사(典涓司)로 바꾸었다가 뒤에 선공감(繕工監)에 합쳤다.

2) 태조 이성계를 가리킨다.

3) 繼志述事, 곧 선대의 조상이 남긴 뜻을 계승하여(繼志), 그 이루어 놓은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述事)을 말한다.

4) 고대 중국의 세 왕조, 곧 하(夏), 은(殷), 주(周)를 이른다.

5) 뒤의 임금에게 계(戒)가 되는 가르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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