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유혹

우리 모두, ‘언덕을 넘어서 가자’ 3

거북이3 2007. 10. 29. 13:55
우리 모두, ‘언덕을 넘어서 가자’
이 웅 재
3. 늙마의 사랑도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

“날 좋아했다면, 내가 이혼한 후, 무교동 낙지집에서 만났을 때에라도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그랬어?”
“말했지. 어떤 돈 좀 있는 놈하구 재혼이라도 하지 그러냐 하구.”
관객들은 신나라고 웃어젖힌다.
“이제 어쩔 거냐? 다 늙어가지구.”
“글쎄, 70이 돼두 70살 난 여자가 여자로 보일까 생각해 봤었어. 그런데 넌 여자야. 내가 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 앞으로도 사랑할 여자. 너, 선택해. 저 껄떡거리는 놈 자룡이하구 나하구 둘 중에서 하날 택해!”
관객들이 요동을 친다. 우리도, 우리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활기를 찾은 것이다. 연출자의 의도를 따라오라는 식의 요즘 연극들과는 달리, 관객들을 배려해주는 연극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흐뭇한 느낌이었다.
“나 배고파. 밥부터 먹고 보자. 오늘은 내가 걸쭉하게 한턱 쏠게. 오늘 어떤 미친놈이 2,000만 원이나 주잖아, 글쎄.”
다혜의 말에 완애가 맞장구를 친다.
“봉 잡았네.”
관객들이 따라 외친다.
“봉 잡았네.”
―암전―
자룡이 신나게 춤을 춘다. 막춤이지만 격렬하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춤이다. 관객들이 격려의 박수를 친다. 자룡은 더욱 신이 나서 몸을 흔든다.
“이건 껄떡대는 것이 아니야. 다혜야.”
혼자서 독백을 하는데, 다혜가 몰라볼 정도로 쪽 빼입고 등장한다. 여행 복장이다. 셋이서 외국 여행을 떠나기로 했단다. 관객들이 일제히 ‘와아~’ 하는 탄성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요새 흔히 말하는 ‘큰 박수’가 아니다. ‘열렬한 박수’, ‘힘찬 박수’, ‘박수다운 박수’였다. 자룡과 다혜가 수작을 하는데, 침실 쪽으로부터 완애가 등장한다.
“내가 돈 좀 발랐다!”
다혜 못지않은 멋진 옷차림에 폼까지 잡는다. 몰라보게 변한 모습이다. 관객들이 또다시 ‘와아~’ 하고 탄성을 올린다. 고물상 구두쇠 영감의 티는 찾아보려고 해야 찾아볼 수가 없다. 나이도 십년 이상은 젊어 보인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늙을수록 젊게 입으라는 말이 틀리는 말이 아니었다. 음악이 흐른다.
“언덕을 넘어서 가자!”
셋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자룡이 다혜의 손을 잡는다. 노래 가사가 이어지다가 바로 ‘언덕을 넘어서 가자!’라는 대목에서 완애가 다혜를 빼앗아온다.
“젊은애들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구. 노년의 사랑은 위대한 거라구. 왜냐구? 퍼주고 퍼주어도 아까울 게 없거든.”
그 말을 받아 다혜가 말한다.
“잡초두 화분에 심고 기르면 예쁜 화초가 되듯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랑도 소중히 여기면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사랑이 되는 거지.”
그러는 사이에 자룡과 다혜가 나란히 서 있게 되자 그 사이를 완애가 파고든다. 밀려나던 자룡, 갑자기 윗주머니를 더듬더니 화들짝 놀란다.
“내 여권, 내 여권! 여권이 없어졌어!”
“그럼, 넌 못 가겠구나. 우리 둘이서만 가자!”
완애가 빙글거리며 말한다.
“아냐, 이겐 네 짓이야!”
자룡은 완애의 몸을 철저하게 수색한다. 공항 검색대에서 검색하듯 윗주머니에서부터 온몸을 주르륵 훑는다. 드디어 바짓가랑이까지 손이 내려가더니, 바짓가랑이를 들어올리고 양말 속에서 자신의 여권을 찾아낸다.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그는 완애에게 모범택시비도 내고 여행 중에 돈도 팍팍 써보라고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혜가 선언한다.
“택시 제일 늦게 타는 사람이 택시비 내기다.”
자룡과 완애는 서로 먼저 문 밖으로 나가려고 밀고 밀린다.
―암전 (대단원)―
그들의 사랑은 아직도 그렇게 경쟁적으로 이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3각관계가 치졸하지 않게 느껴지는 연극이었다. 모처럼만에 실버 관객을 상대로 한 연극을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웠다. 동국대 교수인 극작가 이만희 씨의 작품을 극단 오늘의 대표인 위성신 연출가가 연출을 한 작품이었다. 연극계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이호재와 국립극단 간판배우 오영수, 그리고 변치 않는 미모에 뛰어난 연기력의 전양자가 만나 잔잔하면서도 가슴 찡하게 느껴지는 순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젊은이들의 타산적인 사랑 얘기보다 신선하다. 늙마의 사랑도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극이었다. 배우들의 마지막 인사에 공연장이 떠나가라고 박수를 친 연유이다.
70대의 여류작가 박완서 씨의 단편집 “친절한 복희씨”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신문에서의 북리뷰를 보았더니, ‘관절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높은 구두를 신으면 고소공포증을 느낀다는 … 한심한 나이’라면서도, 50년 전 첫사랑이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얘기인 ‘그 남자네 집’의 마지막 단락에서, 젊은이들이 우글대는 카페에 들어선 할머니는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라 되는 건 아니란다.”
젊음을 부러워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그들은 아직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친절한 복희씨의 남편은 ‘중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흐느적대면서도 약국에서 비아그라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다.
64세의 신달자 시인의 “열애”를 보자.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내손을 가져가는 남자/ 두 손이 마주 잡히는 그 순간/ 따뜻한 집 한 채가 지구 위에 우뚝 세워졌다.… 나는 문득/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밥을 짓고 싶어.”(‘우리들의 집’에서)
그들에게는 아직도 사랑이 살아있는 것이다. 사랑, 그건 영원한 인생의 화두가 아니던가?
우리 모두, '언덕을 넘어서 가자' 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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