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유혹

지리산 종주기

거북이3 2006. 8. 25. 17:55
 

  지리산 종주기                                          

                                                                          이   웅  재

             1. 약속을 지키려고


 약속이란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지킬 수 있을까? 마음만 가진다고 지켜질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체력이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인데, 60의 고개에 올라서서 지리산 종주를 해 보겠다고 나서는 건 무리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늘 지리산과 한 약속을 어떻게든 지켜야만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지리산은 내게 신혼여행 중인 첫 번째 대면에서 화엄사를 무료 입장시켜 주었고, 그 고마움으로 찾은 두 번째 대면에서는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때문에 노고단까지도 올라가지 못하고, 그 희디흰 성감대와도 같은 쌓인 눈밭을 갉작갉작 파내어 배낭까지 묻었다가 간신히 찾아 내려오면서, 내 꼭 언젠가는 너를 정복하리라 다짐을 했었던 것이다. 다음 번인 세 번째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 밤중의 돌길을 걸어 노고단까지 가서(그때까지는 지금의 찻길이 나기 전이었다) 사방을 조망하려 하였으나 그녀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었다. 구름과 안개로 자신의 모습을 감싼 지리산, 내 영원한 애인을 대하며 나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나는 당신을 정복하러 다시 올 것이다. 그건 유린과는 다르다. 물론 침범과도 다른 것이다. ‘정복’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나에게 말해다오. ‘사랑’하러, ‘애무’하러 오라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7월 1일, 드디어, 지리산 종주 길에 나선 것이다. 일행은 6명. 설레는 가슴을 안고 강남 고속터미널을 떠나 진주를 거쳐 경남 시천면 중산리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17:00 경 지리산 계곡 모텔에 도착하여 휴대전화로 집에 연락을 했더니, 1시(오후) T․V 뉴스에서 비 때문에 지리산 등반을 전면 통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며 걱정을 하였다. 떠날 때부터 일기예보가 장마전선이 다가온다고 겁을 주는 바람에 꼭 가야만 되겠느냐고 반협박조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지리산과의 약속을 어길 수가 없어서 무시하고 떠난 터였다. 다행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모텔에 도착했을 때는 빗방울은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을 정도, 안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오랫동안 그리던 지리산을 ‘정복’해야겠다는 마음에 가슴이 벅차,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모텔 야외에서 콸콸 흐르는 계곡 물을 바라보며,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 푹 젖은 채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내일 장마비가 다시 내려서 산엘 오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별 후회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멋진 계곡이어서 모텔 하나는 잘 잡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2. 고추잠자리의 환영 비행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눈이 떠진 것은 그 ‘정복’에 대한 벅찬 기대감 때문이었으리라. 걱정과는 달리 날씨는 쾌청했다.

 오전 6시,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첫 등산객으로 매표소를 통과하여 산행을 시작했다. 어제 내린 비로 녹음은 싱싱했고, 계곡에서는 시원스런 물소리가 요란했다. 등산로는 약간 질척해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오르노라니 사흘 간의 식량까지 준비해 간 배낭이 자꾸만 어깨를 잡아 다녔다.

 로터리 산장에서 준비해 간 C레이션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법계사 옆길로 들어서니 경사는 차츰 심해진다. 어제의 입산통제 때문인지 오르내리는 등산객도 별로 없어 호젓한 산행이라 더더욱 정겹게 느껴지는 지리산이었지만, 차츰 호흡이 가빠지고 후줄근히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천왕봉에 오르는 최단 코스인 만큼 가파른 돌길인 때문이다.

 마지막 깔딱고개를 남겨두고 충분히 쉬어서 가라는 듯 평평한 지대가 나오는데, 왼쪽 절벽 아래 반가운 샘물이 있었다. 천왕샘이었다. 가물 땐 쉽게 말라버리기도 한다지만, 우리를 맞이하는 천왕샘은 철철 넘쳐흐르고 있어서, 한 쪽박 받아서 마시고 세수까지 하고 나니 온몸이 상쾌해진다.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 마지막 천왕봉 정상을 향해 기어올랐는데, 역시 ‘정복’이란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동료들의 도움과 함께 정상에 오르는 순간, 마치 헬리콥터로 환영 비행이라도 해주는 듯한 엄청나게 많은 고추잠자리의 어지러운 군무(群舞)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에 비 오듯 흐르던 땀방울들도 잦아들어 버리고, 사방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 그 사이사이로 열두 겹, 열세 겹의 산봉우리들만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골짜기마다 바람 따라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구름과 함께 출렁거렸다. ‘지리산 천왕봉(智異山 天王峰) 1,915m’라는 둥그스름한 표석을 옆에 끼고 기념촬영을 하고 시계를 보니 12:30분이었다. 지도를 보면 7.8km, 4시간 10분 거리로 나와 있는데, 6시간 반이나 걸렸으니, 중간에서 아침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느린 산행이 아니었나 싶지만, 분수 모르고 젊은이들 흉내를 내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일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스스로 자위해 보았다.

 이제부터는 능선을 타면 되는 일이니 제일 힘든 고비는 넘겼다 생각하니 천왕봉을 떠날 때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하지만 언제 또다시 이곳을 지나볼 것인가? 가급적 이 아름다운 지리산의 속살 하나하나를 압축하고 압축하여 눈에 담고, 마음에 심느라고 2.7km인 1시간 거리의 장터목 대피소까지 가는 데에도 1시간 반이나 걸려 14:00 경에야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다. 천왕봉에서부터는 혼자서 종주에 나섰다는 간 큰 아가씨 하나까지 혹으로 달려서 일행은 7명으로 불어났다.

 도중에는 마치 굴처럼 느껴지는 바윗길,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通天門)도 있어 금강산의 금강문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통천문을 지나 한 동안 걷다 보면 제석단 고사목 지대가 나온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군락지였던 모양인데, 생태계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잡초만 무성한 가운데 뼈대만 앙상한 고사목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산불로 인해 타 죽었다는 것인데, 일설에는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얘기도 있어 공연히 내 마음마저도 죄스러운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죽어서도 꿋꿋이 버티고 서있는 그 고사목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운치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다른 산에 비해서는 적당한 거리마다에 샘물이 있어서 비교적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지리산이기는 하지만, 장터목 대피소에서는 비교적 가파른 길로 100여 m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식수대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물을 아껴야 한다. 라면과 햇반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니 다시 힘이 솟아나 산행을 계속하였다.

 세석평전까지는3.4km, 지도에는 쌍방향 2시간 거리로 나와 있으니 크게 힘드는 오르막과 내리막길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걷는 시간만을 계산해 놓은 것이다 보니, 우리처럼 시간도 넉넉한데다가 쉬엄쉬엄 주변 경치 다 보면서 걷는 등산객에겐 그런 것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산엘 다니다 보면, 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즐기기 위한 산행이 아니라 마치 기록을 내기 위한 경주인 것처럼 그리 빨리 주파(走破)를 하려드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가 많다. 탁트인 시야, 마치 고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마냥 사방의 산봉(山峰)과 골짜기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걸을 수 있는 구간이 바로 이 장터목에서 세석평전까지의 주행길이거늘, 무엇 때문에 쫓기듯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만 하는가? 산행은 즐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산의 정상을 ‘정복’한다는 말도 썩 마음에 내키는 표현은 아니다. 한 구비 한 발작마다 알뜰살뜰히 ‘사랑’하고 ‘애무’하는 심정으로 산의 품속에 묻혀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등산로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철제나 목제 계단 따위는 산행의 정취를 앗아가는 인공물일 뿐이다. 때로는 험한 바윗길이라 하더라도 맨 땅을 밟아야만 산의 속살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싼 돈 들여서 외국의 원목을 수입하여 그 기계적인 계단을 만들어 놓아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자연은 자연대로 놓아두는 것이 바로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요,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다.

 17:00, 장터목 대피소를 떠난 지 3시간만에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국립공원 대피소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이 대피소는 한꺼번에 300여 명을 숙박시킬 수 있는 곳이라 하지만, 등산객이 적은 이날에는 잠자리가 아주 널널했다. 세석평전 바로 못 미친 곳에는 아고산지대의 습지가 있어 매우 소중한 지역이었고, 세석평전 자체는 원래 철쭉꽃 군락지였으나 무분별한 야영객들로 인해 원형이 거의 훼손되어 생태계 복원사업을 추진 중인 곳이다.

 자연을 짓밟아서야 어찌 그 재액을 되돌려 받지 않을 수가 있을까? 6.25 때 수많은 생명들이 처참하게 죽어간 곳이 지리산이요, ’98년 단시간에 내린 엄청난 폭우로 인하여 30여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도 지리산이다. 인명구조를 위해 한해에 유관기관에서 출동한 횟수만으로도 400여 건이 넘었다고 하니, 그게 모두 무분별한 훼손에 대한 자연의 앙갚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사랑하고 보호하는 만큼 혜택을 주고, 우리가 유린하는 만큼 재앙을 가져다 주는 것이 자연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 것도 어쩌면 이번 지리산 종주에서의 커다란 소득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으로 달려온 아가씨가 쌀을 준비해 왔기에, 모처럼 밥을 지어먹으니,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웠던 아침과 점심때보다는 훨씬 뱃속이 푸근하며, 그러지 않아도 덮누르는 피곤과 함께 아주 푸짐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3. 깊은 산 속의 개망초

 이튿날 아침 7:00.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후, 세석산장을 떠났다. 중간에 일행이 다시 2명이 늘었다. 어제 스쳐 지나갔던 젊은이 2명인데, 한 명이 다리를 다쳤다고 해서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주고 아대까지 빌려준 채 합쳤기 때문이다.

 어제는 주로 산등성이를 걸었기 때문에 대체로 흐린 날씨이기는 했으나 양 팔뚝이 새빨갛게 탔었는데, 오늘은 삼림욕을 하듯 우거진 나무숲 사이를 지나는 때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산새들의 해맑은 노랫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일월비비추가 등산로 양쪽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어 반기고 있었다. 옥잠화와 비슷하게 생긴 이 일월비비추의 꽃망울은 완두콩 크기의 동그란 모습에 보라색 꽃잎이 수줍은 듯 오므리고 있어, 마치 처녀의 젖꼭지를 연상시켜 공연히 가슴마저 설레는 것이었다.

 오늘은 벽소령 대피소와 연하천 대피소를 거쳐 뱀사골 대피소까지 가서 다시 일박을 할 계획이었으므로, 20.4km, 7시간이 소요되는 산행을 하여야 되는데, 동행인 장교수도 다리에 이상이 생겨 신교수의 나머지 아대를 하고 나니 2명의 환자가 생긴 셈이라서, 넉넉하게 9시간을 걷기로 하였다. 하루의 산행 거리로서는 만만치 않은 듯했으나 지난 번 설악산 공룡능선도 천신만고 끝에 주파한 터라,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교수의 말만 믿고 무작정 따르기로 했다. 사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기는 했지만 확실히 공룡능선보다는 훨씬 수월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흐렸던 어제에 비해서는 쨍쨍 햇볕이 내리쬐고 있어서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숨이 차지 않게 하려면 두 번씩 들이마셨다가 두 번씩 내쉬는 복식 호흡이 좋다고 하는 최교수의 말을 따라 ‘흡흡후후’, 마치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를 흉내내며 걷다 보니, 약간 경사가 진 널찍한 공지(空地)가 나온다.   선비샘이었다. 상공에서 본다면 기계충에 걸린 머리 모양 흉물스러운 모습이겠는데, 샘이 있는 곳이다 보니 무분별한 야영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텅빈 자갈밭이 되어 있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가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어도 어렸을 적 부르던 동요가 생각나서 혼자서 콧노래로 흥얼거려 보았지만, 따가운 햇볕만 무지막지하게 내리쬐는 선비샘은 동요 속의 옹달샘 분위기와는 영판 달랐다. 이것도 역시 우리 인간들의 자연훼손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마음이 울적해졌다.

 해서 묵묵히 앞만 보고 걷노라니 가다가다 구절초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서 이왕지사 툭툭 털고 즐거운 마음으로 산행을 하라고 말하는 듯하여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다른 산에서는 보기 힘든 산버들도 보여서,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대……’ 하는 홍원(洪原) 명기 홍랑(洪娘)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널리 알려진, 북평사(北評事)로 경성(鏡城)에 있던 애인 최경창(崔慶昌)을, 서울로 떠나 보내며 읊었던 시조가 생각나기도 해서 마음이 차츰 풀리려는데, 이건 또 무슨 헤살인고? 이 깊은 산 속에서 개망초를 만나다니? 북미 원산의 귀화초인 개망초는 민들레처럼 수과(瘦果)를 맺어 엄청나게 번식률이 높은 풀로서 우리나라 밭둑이나 길가를 온통 잠식하는 놈이 아닌가? 일설에는 6.25 때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수송물자에 묻어 들어왔다기도 하는데, 하긴 헬기를 비롯한 항공기에 의한 군수물자 수송 때 묻어온 것이라면 깊은 산중이라 해서 개망초가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모처럼 풀어지던 마음이 개망초 때문에 다시 울울(鬱鬱)해지고 말았는데, 일행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너무 힘에 부치면 쉬어가자고 한다. 말이 그렇지 힘에 부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다리 아픈 두 사람을 핑계 대고 마냥 쉬면서 가다보니 절벽 아래 샘물이 있었다. 평소라면 물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그 샘물은 정말로 ‘생명수’였다. 적당히 기진해 있었고 뱃속도 허허로웠는데, 혹으로 동행이 된 아가씨가 용의주도하게도 미숫가루를 가지고 왔기에, 비록 설탕이 없어서 밍밍하긴 했지만, 중요한 시점에서 요기(療飢)를 할 수가 있어 정말로 다행이었다. 왜 그런 생각들은 못했을까? 등산객들이 미숫가루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유사시를 위한 비상식량, 그 비상식량으로서 미숫가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6.25 때(비록 어렸을 때였긴 하지만) 적군을 피하여 밤길을 걸으면서, 졸음을 이기라고 볶은 콩을 쥐어 주며 계속되는 행군을 재촉하시던 선고(先考), 그리고 식사할 때가 되어서는 늘 불을 피워서는 안 되는 사정이기에 콩가루를 섞은 미숫가루를 물에 타주시던 선비(先妣), 빨치산이 마지막으로 항거하던 지리산에서 나는 민족의 비극을 나름대로 떠올려 보면서, 내 사랑 지리산의 아픈 과거를 되새겨 보았다.

  여기가 총각샘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지도에 나와 있는 총각샘은 연하천 대피소를 지난 다음에 있었다. ‘아무렴, 잘못은 나에게 있겠지……’, 스스로 너무 늦은 나이에야 지리산을 찾은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계속 힘든 발걸음을 떼다 보니 벽소령 대피소가 나온다. 이곳도 샘물은 가파른 산길을 50m쯤인가 내려가야만 있어서 물병을 채우려 내려가던 중, 혹으로 붙은 청년 2명 중 한 명이 자기가 한꺼번에 떠오겠다고 하여 ‘못이기는 체’ 맡겨버리고 말았다.


               4. 자득지학(自得之學)의 교훈

 벽소령(碧宵嶺), 아마도 푸르스름한 아침 신새벽의 경치가 멋져서 붙은 지명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세석대피소의 ‘세석(細石)’이 많았던 철쭉꽃 단지를 떠올려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꽃’이라고 하는 진달래꽃에 비해서 ‘개꽃’이라고도 불려 한 단계 낮게 취급하는 꽃이기는 하지만, 꽃 자체의 아음다움은 진달래꽃보다도 승(勝)한 것이 철쭉꽃이요, 가난한 시절 배고프면 따먹을 수 있었던 진달래꽃과는 달리 독성(毒性)이 있어서 함부로 따먹을 수 없는 철쭉꽃은 나름대로의 생존의 비법도 간직하고 있는 꽃이라는 생각에서, 나는 철쭉꽃에 대해 상당히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초기의 시가(詩歌)인 향가 중에서도 그 원초적인 모습을 보이는 소위 4구체[실은 “균여전”에 나오는 ‘삼구육명(三句六名)’이라는 유일한 향가 형식에 대한 명칭을 사용해서 ‘3명구체(三名句體)’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논문을 쓴 적이 있지만 ; “향가에 나타난 서민의식”, 백문사, ’90년 참조]의 향가인 ‘헌화가(獻花歌)’에 그 모습을 처음 보이고, 그 유명한 조선 선조조의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도 나오는 우리 문학의 전통적 소재가 바로 철쭉꽃이 아니던가?

 벽소령을 지나면서부터는 산행길이 조금 험해지는 듯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계속 산길을 걸어온 터였기에 같은 오르막, 같은 내리막길이라도 이쯤에서는 훨씬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한국인이 아니던가? 한국인은 누군가가 말했듯이 ‘걷기’를 그 특장(特長)으로 내세우는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양쪽에 철망으로 경계지워진 약간의 습지대가 나왔다. 식재(植材) 시범 지구인 모양이었다. 풀 냄새만으로도 풋풋한데, 질척질척 물기마저 있고 보니 더욱 청량감(淸凉感)이 더해져서 힘들이지 않고 걸어 연하천 대피소에 이르렀다.

 연하천(煙霞泉) ― 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이는 곳이라는 뜻인가?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땡볕만이 제 세상을 만난 듯한 14:00시, 시원한 샘물이 반가웠을 뿐이다. 대피소의 관리원인 구레나룻이 무성한 산사람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제발 음식물 찌꺼기를 화장실에 버리지 말아주세요!”를 외치고 있었다. 다른 대피소에는 공식적인 쓰레기 수거가 이루어지지만, 이곳은 민간구조대원이 맡아 경영하는 곳이라서 모든 쓰레기는 그 구레나룻이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변기에 버려진 쓰레기는 직접 손으로 끄집어내야만 한다고 사정사정을 하는데도, 더러 철면피들이 있어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쓰레기 처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OECD에도 가입했으니 형식적으로는 분명 선진국대열에 동참했지만, 우리의 시민의식은 언제쯤이나 선진화될 수가 있을까?    계획대로라면, 뱀사골 대피소에서 다시 1박을 해야겠지만, 해는 너무 길었고, 노고단을 보고 싶은 생각은 너무나 간절했다. 결국 우리는 ‘무리(無理)’를 하기로 결정했다.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별 무리 없는 산행이었는데, 연하천을 떠나자마자 이제까지의 자신만만함은 일종의 오기였음을 느끼게 되었다. 연하천으로 내려오는 데에만 가파른 목제 계단을 지나려면 40여 분 걸린다고 했으니, 반대로 올라가는 처지에서야 더 말하여 무엇할 것인가? 오르다 쉬고 오르다 쉬고……. 천왕봉 오르는 곳 말고는 능선을 타는 일이라서 비교적 평탄한 산행을 기대했었는데, 그건 모두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나중의 얘기지만, 다리가 아픈 장교수는 천왕봉까지가 문제이지 그 다음은 능선을 타는 일이라서 아주 수월한 산행이 된다는 신교수의 말을 떠올리며 ‘속았구나’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는 것이다.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놓았지만, 그런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느끼는 우리는 정말로 ‘쉬고 또 쉬고’ 하면서 그 나무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지겹고도 지겨운 나무계단을 오르고 나서도 또다시 이리꼬불 저리꼬불 지나간 후에 마지막 바윗돌을 잡고 끄응! 하고 발걸음을 떼어놓으니 휴식을 할 수 있는 약간 넓은 터가 나타났다. 이름하여 ‘삼도봉’ ― 경상북도, 전라북도, 전라남도가 한곳에 모여있는 곳이었다. 연하천을 떠난 지 한 두어 시간이 지난 저녁 4시경이었다.

 삼도봉에서 계곡을 바라보니, 지리산,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지리산이 나의 만용을 비웃고 있었다. 용기만은 가상타 하겠으나 지리산은 나에게 ‘너는 아직 멀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계속하여 보내고 있었다.

 ‘너는 아직 멀었다’ ― 자꾸만 강희맹의 ‘훈자5설’ 중 ‘도자설(盜子說)’을 생각나게 만드는 산길.


 도둑 아비가 아들에게 도둑의 비법을 가르치는 그 글은 ‘자득지학(自得之學)’의 중요성을 박진감 있게 보여주는 글이다. 아비의 도둑 술법을 다 배워 오히려 그 아비보다 뛰어난 술법을 지니고 있다는 아들 도둑에게 ‘너는 아직 멀었다’면서 아들을 데리고 야반에 보물창고를 털러 간다. 창고 속으로 아들을 들여보내고 아비는 밖에서 문을 잠궈버리는 것이다.

 이에 아들 도둑은 늙은 쥐의 갉작갉작하는 소리를 내어 주인이 물건이 상하겠다며 쥐를 잡으려고 창고 문을 열 때를 이용하여 도망을 간다. 주인집 식구 모두가 쫓아오니 쫓기던 아들 도둑은 잡힐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연못가를 뛰다가 물에 큰 돌을 집어 던지니, 주인집 식구들이 도둑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하고 불을 밝혀 찾고 있는 중에 무사히 집까지 도망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너는 이제는 마땅히 천하에 독주할 것이다”라고 하여 스스로의 터득[自得]을 강조한 그 글은 내가 항상 좌우명 삼아 대하고 또 대하는 글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너는 아직 멀었다’. 그것은 지리산 종주에서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이었다. 


           5. '속았구나'를 연발한 야간 등반

 지리산 ― 나는 그대를 영원한 내 애인이라고 함부로 결정해 버렸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아직 지리산의 품속에 안기기에는 너무나도 무지한 ‘건방진 자(者)’일 뿐이었다. 나는 이번 종주가 지리산의 ‘정복’의 대단원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어디 몇 번의 산행으로써 ‘정복’이라는 불손한 단어를 함부로 쓸 수 있는가? 그런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 깊은 산중에 둥두렷이 ‘무덤’을 만들어 놓고 쉬고 있는 어느 무명 산악인 말고는 가탕치도 않은 말이라 하겠다. 나도 산행하다 죽으면 저렇게 어느 지리산 자락에 묻힐 수가 있을까? 아마도 그건 얼토당토않은 내 욕심일 뿐이 아닐까 한다. 어찌 함부로 지리산의 깊은 속살 속에 나를 파묻을 수가 있을 것인가? 지리산이여! 나는 당신을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치기(稚氣)를 너그럽게 혜량(惠量)하여 주시옵소서.

 삼도봉을 지나고서도 길은 만만하지가 않았다. 물론 이제껏 걸어 피로가 쌓인 탓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긴 하겠지만, 노루목, 임걸령을 지나면서 계속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에 장교수는 그때마다 아픈 다리를 끌며 ‘또 속았구나’를 되뇌었다고 했다. 이제는 좌우의 경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노고단까지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지만, 한 명의 초심자인 포항 처녀와 다리가 아픈 환자 2명에다가 나 같은 거북이가 동행을 했으니, 예정된 시간이란 애초부터 무용지물, 돼지령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지고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8시경이었다.

 싱싱하게 앞장서 걸어가던 김교수는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더니 돼지령에 도착하니 거기 퍼질러 앉아 있었다.  “왜 좀더 빨리 가서 밥 지어 놓지 않고……” 했더니, “무서워서”란 대답이 돌아왔다. 무섭다니? 날씨가 어둑해지면서 귀신 얘기가 나오면 박교수가 그만하라고 하더니, 이번엔 김교수마저?

 그러나 알고 보니 멧돼지 엉덩이를 보았다는 것이다. 야행성의 동물이다 보니 혼자 가기가 무섭더라는 것인데, 조금 있자니 일행이 된 청년 중 하나가 “저기! 저기!”를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덩달아 “어디? 어디?”를 연발하며 청년의 손가락을 따라 잡았으나 이미 사라진 뒤, 이번에는 새끼 돼지였다는 것이고 보면 ‘돼지령’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돼지가 있었다면, 혼자서 가다가는 정말로 언제 어느 때 불의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간격을 띄지 않고 걷기로 했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야간 등반이 되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를 하여야만 했다. 플래시가 없는 사람들을 사이사이에 끼워 넣고 앞뒤로 플래시를 흔들면서 길까지 비춰가며 걷는 산행은 더욱더 느릴 수밖에 없었다. 밤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길은 왜 그렇게 돌로만 이루어져 있던지……. 삐끗하면 발목을 삘 염려 때문에 한발 한발 조심조심 걸어야 하니 힘도 배로 드는 것 같았다. 한 구비 돌면 이제는 ‘거의 다 왔겠지……’ 하는 생각이었으나 번번히 허탕이었고, 장교수는 그럴 적마다 ‘또 속았구나’를 되씹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노고단이 보이기 시작하여 모처럼 기운을 얻었지만, 빤히 건너다 보이는 곳이면서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V자형의 이쪽에서 저쪽을 건너다보고서 금방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리막을 한참 조심스레 걸은 후 다시 마지막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올라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를 마음 속으로 읊어가며 마지막 총력을 기울여 노고단에 올라서니, 아, 맑은 밤하늘엔 반짝반짝 빛나는 크고 작은 별들이 그렇게 많고, 그렇게 가까이 있을 줄이야……. 오랫동안 별바라기를 잊고 지냈던 나날들이 하찮게만 느껴졌다. 저쪽으로는 지난 번 노고단에 왔을 때 보았던 돌멩이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쌓아 올려 만들어 놓은 돌탑이 검은 모습으로 우뚝 서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카렌스인지 승합 자동차 하나가 철책 가까이 외롭게 세워져 있었다.

 맑고 시원한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 대피소를 향해 다시 잘 다듬어져 있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작용해서인지 대피소까지의 걷기도 왜 그리 힘이 들던지? 반짝이는 전깃불을 보면서 마지막 돌길을 내려서서 대피소 앞으로 다가가니, 나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있던 우리 아가씨가 매점에서 사온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준다. 벌컥벌컥 마시니 가슴속이 시원해지면서 이틀 동안의 우연한 만남이었음에도 그 살뜰한 인정이 온 몸속으로 좌악 퍼지는 것 같다.

 아가씨는 여기서 1박을 더 하고 내일 떠나겠다고 하여 남고, 우리는 대피소의 책임자에게 사정사정하여 직원의 자가용을 이용하여 환자 두 사람을 성삼재 주차장까지 타고 내려가게 하고, 나머지 6명은 또다시 도보행진을 계속하였다. 주차장에는 미리 연락을 해 놓아 택시가 대기하고 있어서, 광한루까지 가 볼 수는 없겠지만 이왕이면 춘향이의 숨결이 잦아들어 있는 남원으로 가서 일박을 하기로 하였다. 무려 15시간 동안의 산행을 감행하여, 산에서의 2박 예정 코스가 1박으로만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내딴에는 지리산 종주라고 했지만, 국립공원 제1호면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지리산의 극히 일부분만을 답사했을 정도인데, 감히 그 품속에서 2박까지 하기에는 스스로 죄스러웠던 때문이었다고나 할까?   1,369종의 식물과 40종의 포유동물, 94종의 조류, 그리고 양서․파충류 22종, 곤충류 2,537종이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에서 살고 있는데, 나마저 지리산의 치맛자락을 자꾸만 부여잡아서야 되겠는가? 너무 성급해 하지말고 다시 후일을 기약함이 옳을 듯싶다. 언제쯤 다시 내 사랑 지리산을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한 달쯤 지난 다음 다시 그대를 찾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차츰 멀어져가는 시커먼 지리산의 밤모습을 향해 ‘아듀!’를 고하였다.

                                                   (’01. 7. 14. 원고지 67매 분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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