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16)
주장군전(朱將軍傳)[下]
송세림(宋世琳) 지음
이 웅 재 해설
왕이 말없이 오래도록 앉았다가,『경의 말이 옳도다. 다만 맹이 고개를 깊은 숲속으로 처박고 품은 정기도 감추고 지내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제 모습이 보일까 걱정하고 있는 판국이니 그가 짐을 위하여 기꺼이 벌떡 일어나 줄지 의문이오.』주자가 이르기를,『맹의 성품이 단단하고 부드러움을 겸하고 있으니, 신기(神氣)를 드러내면 그 위력이 연못[寶池]의 밖에서는 마치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 같이 요란스러우나, 절개를 굽혀 연못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사지에 뼈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리지만, 아마 폐하께서 성심껏 힘써 청하신다면 무슨 말로 사양할 수가 있겠나이까?』
왕이 주자로 하여금 날을 받아 폐물을 가지고 찾아가도록 영을 내려 재촉하였더니, 맹이 흔쾌히 부름에 응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당장 절충(折衝;상대와 교섭하거나 담판함)장군에 임명하시고 보지소착사(寶池䟽鑿使;보배로운 연못을 툭 트이도록 뚫는 사신)로 명하시니, 맹은 명을 받들자마자 당장에 시행하였다. 이에 앞서 이성(尼城) 사람 맥효동(麥孝同)이[속담에 이르기를 음탕한 비구니가 보릿가루를 빚어 (남근 모양의)고깃덩어리의 기구를 만들어 그 모양으로 이름하여 맥효동(보리로 만든 효자, 同은 輩와 통하여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였다. 곧 남근 모양의 기구.] 사사로이 방책을 세워서 깊이까지 뚫는 효험을 보이고자 힘써 분투하다가 장군이 이르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장군은 사방을 두루 살피고 수염을 치켜들고 턱을 끄덕거리면서 말하기를,『이 땅은 북으로 옥문(玉門;음문)산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 황금굴(음문의 통로)이 이어져 있으며, 동서쪽으로는 붉은 낭떠러지가 서로 둘러서 있고, 그 가운데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모양은 흡사 감씨(陰核을 말함)를 닮아서, 진정 술객(術客)들이 이르는 바, 「요충(要衝)의 땅이요, 붉은 용이 구슬을 머금은 형세라」 진실로 힘이 쇠잔한 자만 아니라면 쉽게 뚫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로다.』하고 드디어 그 형세를 조목조목 진술하여 표(表)를 올리니, 그 대략은 이러하다.
『신 맹은 선조가 남기신 업적을 이어받아 성스러운 임금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니, 천리의 적을 꺾어 죽음으로써 한 번 충절을 본받으려 하는 바이라, 어찌 외방에서의 오래된 수고로움이라 하여 꺼리겠습니까? 공로를 이룬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을 다짐하옵는 바, 지금 몸이 감천(단물이 나오는 샘)군에 이르렀지만 감히 일을 갑작스럽게 도모할 수야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옥문관(玉門關) 속에 들어와서 오직 날마다 형세를 관망하고 있는 중입니다.』
왕이 표를 보시고 즐겨 마지않으시면서, 옥새(玉璽)가 찍힌 문서를 보내어 그의 공적을 칭찬하는 글을 내렸다.『서방[서방(西方)은 세속에서 말하는 ‘서방(書房)’이다.]의 일은 경에게 맡겼으니, 경은 힘쓸지어다.』맹이 조서를 받들어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빼어 홀로 그 일을 담당하였다. 혹은 살살 타이르기도 하고 혹은 깊숙이 파헤치기도 하며, 또 가다가는 얼굴을 반만 내보였다가 때로는 얼굴 전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구부렸다가 폈다가 내려다보았다가 올려다보았다가, 번갈아 들락날락, 몸을 굽혀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일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일이 미처 반도 되지 않아서 비로소 맑은 물줄기 몇 갈래가 흘러나오더니, 갑자기 희뿌연 물길이 세차게 용솟음쳐 나와 모든 섬과 수풀이 몽땅 물에 잠기게 되었다. 장군도 머리와 온몸이 흠뻑 젖었으나 스스로 태연자약하게 꼿꼿이 서서 터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침 슬생(이)과 조생(벼룩)이 있어 일찍이 ‘좃’씨[‘爪氏는 방언에서 손톱을 지칭한다’며 눙침.]의 환(患)을 당하여 숲속에 숨어 있다가 역시 세찬 물결에 표류하여, 흘러서 황금굴까지 흘러와 우거(寓居)하다가 슬피 울며 살려달라고 하니, 굴신이 입을 찡그리며 근심스럽게 말하였다.
『요사이는 나 역시 이런 환난을 여러 번 당했는데 그가 미음이라도 먹여주는 것을 고맙게 여겨 자루 끈을 동여매듯 말하지 않음이 오래였으나 이제 그대들 두 사람을 위해서 그치도록 도모해 보겠소.』조생 등이 좋아라고 날뛰면서 말하였다.『이 일은 저희들의 생사에 관한 일이요, 뼈에 살을 붙임과 같은 일입니다!』
굴신이 지신(池神)에게로 가서 힐문하여 말하였다.『너희 집에 심한 손님이 언제나 이환낭(二丸囊; 불알)을 우리 집 문 앞에다가 척 걸어두고 때도 없이 들락날락하기를 처음은 드문드문하더니 나중에는 너무 잦아져 우리 집 뜰과 문을 흠뻑 적실 뿐만 아니라 문짝까지도 어지럽게 쳐대니 감히 이처럼 미친 듯 경솔할 수가 있느냐?』 지신이 사죄하여 말했다.『손님은 거칠고 주인은 유약해서 그 폐가 존신(尊神)께 누를 끼쳤으니, 이제 존신을 위하여 마땅히 그를 죽여 버리겠습니다.』바야흐로 오밤중이 되어 지신이 주장군이 힘써 노역하는 것을 가만히 엿보다가, 몰래 장군의 머리를 깨물고 또 두 언덕의 신에게 칙령을 내려 협공케 하니 장군은 기력이 다하여 몇 숟갈의 골수를 흘리며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죽고 말았다.
부음을 듣고, 왕은 몹시 애통한 나머지 조회마저 파하고 맹에게 특별히 <장강온직효사홍력공신(長剛直效死弘力功臣;길고 빳빳하고 곧으며 사력을 다해 온 힘을 바친 공신)이란 호를 내리시고, 예를 갖추어 곤주(褌州; 잠방이)에 장사지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장군이 모자를 벗고 이마를 드러낸 채 늘 보지(寶池) 가운데에서 노니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불생불멸을 물리치는 석가모니의 도를 배운 자가 아닌가?
사신(史臣)은 말한다.『장군은 일찍이 사람을 감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초야에서 떨쳐 일어나, 만 번이나 죽을 계획을 세우고, 털 하나 없는 곳에까지 깊숙이 들어가 정력을 쏟아 붓는 혜택을 베풀었다. 연못은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 깊어서 십 년이나 걸려야 할 봇도랑의 혈(血)을 통하게 하는 공을 하루아침에 시원스레 이루어서 가히 깊이 박은 뿌리는 튼튼하고 그 근원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마지막에는 지신의 오해를 받아서 숨 한 번 쉴 사이에 운명하고 말았으나, 그 행한 바 일들의 업적을 공평하게 생각해 보면, 가히 용감하기도 하였으나 겁도 잘 내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인(仁)을 성취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아하, 애처러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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