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15)
주장군전(朱將軍傳)
송세림(宋世琳) 지음
이 웅 재 해설
장군의 성은 주(朱;붉음)요, 이름은 맹(猛;사나움)이고, 자는 앙지(仰之; 치켜듦)니 그 윗대는 낭주(閬州=囊州; 陰囊을 가리킴)사람이었다. 먼 조상은 강(剛;단단함)인데, 공갑(孔甲; 구멍 난 조가비)을 섬기되 남방 주작(朱雀)의 역상지관(曆象之官; 천문을 보는 직책)을 맡아 출납(들어갔다 나갔다 함)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던 바, 공갑이 이를 가상히 여겨서 감천군(달콤한 샘)을 탕목읍(물건의 모가지를 씻는 욕탕)으로 식읍(食邑)을 삼게 하니 자손이 이로부터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아비의 이름은 혁(赩:낯붉음)이며, 열 임금을 두루 섬겨 벼슬이 중랑장(中郞將; 秦漢 시대에 宿衛[숙직하여 지킴]를 맡던 벼슬이 중랑이었으니, 중랑장은 그 중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이르렀고, 어미 음(陰)씨는 본관(本貫)이 주애현(朱崖縣; 붉은 물가의 고을)인데 대력(大曆) 11년에 맹을 낳았다. 맹은 타고난 생김새부터가 범상함을 뛰어넘었는데, 눈은 다만 한 개뿐이고 털이 숭숭하게 난 이마에 성격은 매우 강직하여 굽힘이 없었다. 게다가 여력(膂力;근육의 힘)이 남보다 뛰어나서 화를 낼 때에는 수염을 갑자기 뻗치고 울끈불끈 그 근육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읍하는 모습 그대로 굽힐 줄 모르기도 했으나, 남을 공경하고 근신할 줄도 알아서 수시로 몸을 꺼떡꺼떡하기도 했다. 언제나 적토(赤土)빛의 단령(團領;조선 시대에,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을 입고 비록 엄동(嚴冬)이나 폭서(暴暑)를 만날지라도 벗을 줄을 몰랐다. 또 동그란 알 튀기기를 잘해서 들락날락할 적마다 두 붉은 주머니를 치면서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독안용(獨眼龍;외눈박이 용)이라 불렀다.
이웃에 장중선(掌中仙;손바닥 가운데의 신선)과 오지향(五脂香;다섯 개의 기름진 향, 곧 통통한 다섯 손가락)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맹은 그녀들이 마음에 들어 함께 사통(私通)하였는데, 두 기생은 질투하여 서로 번갈아 받들어 모시는 바람에 맹은 눈시울이 몇 군데 찢어지고 눈물과 콧물이 옷깃을 적실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달게 받으며 희롱하여 말하되,『하루라도 너희들의 주먹으로 두들겨 맞지 않으면 비루해지고 한(恨)스러운 마음이 싹터 오르는구나.』라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러자 맹은 절조를 굽힌 것을 뉘우치고 깨달아 기운을 북돋우어 항시 늠름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하단갑(河亶甲;殷나라 10대 임금)이 卽位한 지 3년에 제군(齊郡; 齊는 臍[배꼽 제]와 통함) 자사(刺使; 刺史는 수령인데, 刺使라 하여 찔러대는 사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음.) 환영(桓榮)이[하단갑이나 환영은 세속에서 음탕한 창기를 가리키는 말. 하단갑은 물밑 조가비?, 환영은 화냥?] 아뢰기를,『군 아래(郡은 臍郡; 곧 배꼽 아래)에는 오래된 보지(寶池;보배로운 연못)가 있사온데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진 곳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가뭄이 심하여 물이 말라붙어 연못이 모두 불그스레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 못 기운이 위로 올라와 사라져버리고 습기가 차서 막혀버리고 있사오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즉시 조신(朝臣)을 파견하시와 지신(地神)을 달래시고 깊숙하게 뚫는 역사(役事)를 감독하시어 기름진 못물이 흘러내릴 수 있도록 하신다면 이는 한갓 천하의 근본을 잃지 않게 되올 뿐 아니오라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필부(匹婦)라 할지라도 그 어느 누가 폐하의 조치에 기꺼이 감동하지 않겠사옵니까? 왕은 그 아뢰는 말을 옳게 여기시었으나, 그렇게 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신하들에게 일일이 자문하니 온양부(溫陽府)의 경력(經歷;문서의 출납을 맡아 보는 직책) 주자(朱泚)가 맹을 추천하면서 가히 쓸 만하다고 하니, 왕은 이르기를,『속담에 이르기를…「눈이 바르지 못하면 그 마음도 바르지 못하다」했고, 또 이르기를 「나쁜 땅에는 초목이 나지 않는다」했는데, 내가 듣기로는 맹은 머리는 어린애머리처럼 민대가리인데다가 눈도 천박하게 세로로 쭉 찢어졌다 하니, 그것이 안타깝구려!』하였다. 주자가 관(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옛적 어진 임금은 오히려 두 알로써 간성지장(干城之將)을 버리지 않았다 했는데, 어찌 용모 하나가 칭함을 받지 못한다 하여 대뜸 버리시려 하시나이까?』
(다음 호에 계속) [수필문학 08.5월호에 게재]
해설:
* 한 동안 너무 점잖은 이야기만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모처럼 ‘어우동’을 링 위에 올려 보았더니, 그 어우동은 무엇을 좋아했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기에, 어우동이 잠자는 방을 몰래 엿보았더니, 이런! 외눈을 부릅뜬 성난 주장군(朱將軍; 男根)이 맨몸으로 반겨 맞이하는 바람에 한 동안 머쓱해졌었는데, 주장군 왈, “웃기고 있네! 지들은 안 그러는 척함시롱 온갖 주접은 다 떨더만!”, 일갈(一喝)을 하시는 바람에, 글 쓰려던 붓을 떨어뜨렸다가, 한참 후 정신을 차려 주위를 수습해 보니, 오호라, ‘주장군전’ 일습만 남았더라. 하여, 눈 딱 감고 소개하노니, 나중 미팅 주선 요청은 하지 마시길 앙망하면서 이번 호(다음호까지 계속)에는 ‘주장군전’을 소개하기로 한다.
가전체를 수필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미 ‘화왕계’를 소개할 때 언급한 바이라서 재론하지 않는다.
지은이 송세림(宋世琳)은 여산인(勵山人)으로 자는 헌중(獻中)이요 호는 눌암(訥菴)이니 성종 10년(成宗 1479) 태인(지금의 七寶面 詩山里)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겨우 20에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3년 뒤에는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연산 9년(燕山 1503) 이조좌랑(吏曹佐郞)까지 올랐으나 시묘(侍墓)살이를 하다가 병에 걸려, 그로 인해 세상에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다행히 연산 10년(燕山 1504)의 갑자사화에는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후 취은(醉隱)이라 개호하고 은둔하였는데, 한가로운 시간 ‘잠을 쫓는 방패’라는 뜻의 글 “어면순(禦眠楯)”을 지었다. 이 글은 “어면순” 속에 들어있는 글이다.
** 번역 및 주(註)는 김창룡(金昌龍)이 지은 “한국가전문학선”(정음사 간,1985)을 따랐으나 해설자가 맞춤법, 띄어쓰기, 그리고 부분적 윤문과 보주(補註)를 덧보탰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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