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산에서 지낸 하루(2)
이 웅 재
복분자를 아무리 따 먹었어도 점심때가 훌쩍 지나니 슬슬 배가 고파온다. 나는 완전 맨몸, 달랑 부채 하나밖에 손에 쥔 게 없었지만, 한 분은 팩 소주 두 병, 다른 한 분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기에,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소주 몇 잔씩을 반주 삼아서 1인분의 도시락을 셋이서 나누어 먹었다. 뱃속에 들어간 복분자는 이참에 아예 복분자주로 탈바꿈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니 농지거리가 튀어나온다.
“여보, 아무개 선생, 저 나무 배꼽께에 비기(秘記)가 들어있구먼. 내 한 번 개탁(開坼)해 봄세…. 이런? 우찌 알았을꼬? ‘우아무개, 정아무개, 이아무개 어차암주선(於此巖晝饍; 이 바위에서 점심을 먹다)’라고 씌어 있는 걸…. 거 참 신통허이.”
“허허, 벌써 복분자주에 취한 모양이로구먼.”
다시, 스적스적 걷는 산길에는 개암나무와 야관문(夜關門)도 많았다. 개암나무의 열매 개암은 10월에 익는데, 밤맛 비슷하지만 밤보다도 고소하여 먹기에 좋아 옛날에는 구황식품(救荒食品)으로서도 사용되었다. 야관문은 밤에 빗장을 열어 주는 약초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비사리라고도 한다. 야관문으로 술을 담가 먹으면 천연비아그라 못지 않다기도 하는데, 9월에 채취해야 한다. 아무래도 9월과 10월에도 맹산 답사를 재삼 시도해야할까 보다.
자귀나무, 산초나무, 오동나무, 가래나무, 오리나무, 사시나무도 비교적 많았다. 요사이에는 가래나무[梓]를 보기가 어려운데, 예전엔 동네마다 많았었다. 집 둘레에는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전하여 생계의 밑천이 되게 하였기에 고향을 상재(桑梓)라고 하기도 했다. 뽕나무는 양잠을 위한 것, 가래나무는 재질이 단단하여 고급의 관(棺)을 만드는 재료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책을 출판에 붙이는 일을 상재(上梓)라고 하는 것도 목판의 재료로서 이 가래나무가 선호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원음은 ‘상자’이다. 예전에는 악력(握力)을 기르기 위해 손바닥 안에 넣고 달그락달그락 돌리던 물건도 이 가래였었는데, 요즘 가래가 귀하다 보니까 호두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호두는 동그래서 벅차고 갸름한 가래라야 제격이다. 더구나 가래는 양쪽 끝이 뾰족한 침(針)처럼 되어 있어 손바닥을 자극하는 기능도 있어 안성맞춤이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가노라니, 흰 나비 한 쌍이 알짱거린다. 산 너머 쪽에 화장터가 있어서 그 죽은 영혼들이 이처럼 흰 나비로 변신해서 우리들의 길을 안내해주는 것은 아닌지? 영혼의 모습은 잠자리 모양이란다. 잠잘 때 콧구멍을 통해 나와서 돌아다닌단다. 그때 겪는 일들이 꿈. 노인네들은 잠자는 사람 얼굴에 장난삼아 검댕이 칠을 하거나 하는 일을 보면 질색을 한다. 빠져나왔던 영혼이 주위 환경의 변화로 제 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죽는다는 것이다.
약수터를 만나면 빈 뱃속도 채울 겸 두세 컵씩 벌컥벌컥 들여 마시고는 가지고 간 페트병을 채우고, 수건도 적시고 세수도 하는 등 더위를 식히면서 가노라니, 배고픔도 별로 못 느끼겠고 찌는 듯한 더위도 참을 만했다. 가는 곳마다 반겨주는 새로운 나무나 풀들이 또 지루함을 달래주었고, 생각을 바꾸면서 사물을 대하노라니 모든 것이 새록새록 재미가 있었다.
층층나무의 그 정연(整然)함에 탄성을 발해보기도 하고, 싸리나무의 잎사귀가 벌레들의 집 때문에 말려 오므라든 것을 보고는, 저쪽은 안 그런데 이쪽으로는 아파트 건축 허가가 쉽게 나온 모양이라고 하며, 벌레들도 요새는 신도시 건설에 매우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탄복하기도 했다. 건드리면 피식 소리를 내며 포자(胞子)를 뿜어대는 방귀버섯도 신기했다. 가끔 가다 보면 낙엽송 잎이 떨어져 빗물에 흘러가고 바람에 쓸려가다가 남은 자취가 무슨 해독하기 힘든 암호 문자 같기도 하여, 아마도 이처럼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니 우주인들이 자기들끼리의 의사전달을 하던 흔적임에 틀림없다고 흥분하는 체해보기도 했다.
길을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가니, ‘증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신창맹공정태지실인(贈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新昌孟公正泰之室人)’이라 쓰인 어느 여인의 무덤에는 잡초만 우거졌기에, 술은 떨어졌고 약수를 술 대신으로 무덤 주위에 뿌려주기도 했다. 정부인(貞夫人) 광주이씨의 묘도 보였고, 통정대행성주판관(通政大行星州判官)을 지낸 맹숭선(孟崇善)과 그 숙인(淑人)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묘, 그리고 기세(棄世)한 지 별로 오래지 않은 맹한섭(孟漢燮)과 그 부인 이정순(李貞順)의 묘도 있었다. 묘 부근에는 어김없이 원추리꽃과 나리꽃이 피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아줄 이는 아무래도 그들 망자뿐이었을 텐데, 그들을 위해 저처럼 예쁘게 피어있는 모습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아직은 그리 억세지 않은 밤송이의 가시들도 어루만져 보면서 계속 전진하다 보니 직리(直里)가 나왔다.
거기서 우리는 ‘맹사성의 묘’를 찾아 다시 왼쪽길로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서서히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하는지, 여태까지와는 달리 힘이 드는 느낌이었다. 나폴레옹의 ‘최후의 5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으며 오르다 보니, ‘흑기총(黑麒塚)’에 대한 안내문이 보인다.
맹정승의 온양 고택 뒤에서 아이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검은 짐승 한 마리를 구해 주었더니, 정승을 따라와 늘 고불(古佛; 맹사성의 호)을 태우고 온양과 한양을 왕래했단다. 고불이 죽자 따라서 굶어죽었다는 충직한 동물, 그래서 무덤도 만들어주고 해마다 벌초도 하여주고 술잔도 따라준단다. 기려줄 만하기는 했지만, 그 자리는 사실 ‘맹사성의 묘’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여서 후손들의 무신경함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왼쪽은 흑기총, 오른쪽이 맹사성의 무덤이었다. 세종 때 좌의정에까지 올랐던 명정승 맹사성, 지금도 이분과 같은 청백리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우리는 7시간에 걸쳐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문인상 한 쌍, 동자상 한 쌍, 망주석 한 쌍이 피로에 지친 우리를 맞아주었다.
비석에 새겨진 많은 글 중에 ‘농적산수 기우초야(弄笛山水 騎牛草野)’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렇다, 피리를 불면서 검은 소를 타고 산수, 초야를 즐겨 다니던 그를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이 더위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술이 떨어졌으니 어쩔꼬?”
했더니, 저 땅 속에서 피리소리를 내면서 맹정승이 말했다.
“더위에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 모금 주게나.”
우리는, 각자 가지고 있던 물병을 상석 위에 올려놓고 두 손 모아 정성스레 재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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