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講 13. [해동고승전 (順道, 亡名, 摩羅難陀, 阿道 外 , 圓光 外)]
고승전의 편찬은 일찍부터 시도되었다. 신라 때에도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은 삼국 시대에 활약했던 승려들의 열전을 모아 놓은 책이다. 고려의 고승 각훈(覺訓)이 고려 고종 2년인 1215년에 왕명을 받들어 지은 책이다.
《해동고승전》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훗날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해동고승전》의 내용을 많이 참고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해동고승전》은 소실된 자료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성주의 한 불탑에서 일부분이 밝혀지면서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10권 이상으로 알려진 《해동고승전》은 현재 2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 두 권에는 당대에 활동했던 18명의 승려들의 전기가 실려 있다. 아쉽게도 원효나 의상과 같은 유명한 승려들의 전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해동고승전》의 편집자로 알려진 각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개성의 유명한 절인 영통사(靈通寺)의 주지승이었다는 점만 전해 내려지며, 《고려사》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편집] 내용
《해동고승전》의 현존판에는 다음 인물들의 일대기가 수록되어 있다.(원본 순서)
순도(順道) (알 수 없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음(亡名) (고구려)
의연(義淵) (고구려)
담시(曇始) (중국)
마라난타(摩羅難陀) (인도)
아도(阿道) (인도?) 법공(法空) (신라)
법운(法雲) (신라)
각덕(覺德) (신라)
지명(智明) (신라)
원광(圓光) (신라) - 진평왕 시대의 승려(세속오계)
안함(安含) (신라)
아리야발마 (신라?)
혜업(慧業) (?)
혜륜(慧輪) (신라)
현각(玄恪) (신라)
현유(玄遊) (고구려)
현태(玄太) (신라)
[이상 위키백과]
*각훈은 그 생몰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이인로(李仁老: 1152~1220년)․ 이규보(李奎報: 1168~1241년)․ 최자(崔滋: 1188~1260년) 등과 교유했던 사람이었다. 이《해동고승전》은 사선(師璿; 법명) 이회광(李晦光: 1840~1911년)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고전문헌을 수집하던 최남선(崔南善)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1910년에 설립)에 기증하여 보관되었다고 한다.[章輝玉,『海東高僧傳硏究』(서울: 民族社, 1991), p.14]
**균여전(1075)- 삼국사기(1145)- 해동고승전(1215)-삼국유사(1285?)…+70
海東高僧傳卷第一 流通一之一 順道 釋順道。不知何許人也。邁德高標。慈忍濟物。誓志弘宣。周遊震旦。移處就機。誨人不倦。
高句麗第十七解味留王(或云小獸林王)二年壬申夏六月。秦符堅發使及浮屠順道。送佛像經文。於是君臣以會遇之禮。奉迎于省門。投誠敬信。感慶流行。尋遣使迴謝。以貢方物。
或說.順道從東晉來。始傳佛法 則秦晉莫辨。何是何非。師既來異國。傳西域之慈燈。懸東暆之慧日。亦以因果。誘以禍福。蘭薰霧潤。漸漬成習。然世質民淳。不知所以裁之。師雖蘊深解廣。未多宣暢。 自摩騰入後漢。至此二百餘年.後四年。神僧阿道至自魏(存古文)。始創省門寺。以置順道。古記云 以省門為寺。今興國寺是也。後訛寫為省門。
又刱伊弗蘭寺。以置阿道。古記云 興福寺是也。此海東佛教之始。惜乎.之人也.之德也。宜書竹帛以宣懿績。其文辭不少槩見。何哉。然世之使於西方。不辱君命。必待賢者而能之。則特至他邦肇行未曾有之大事。非其有大智慧.大謀猷。得不思議通力。其何以行之哉。以此知其為異人。斯亦法蘭.僧會之流乎。
亡名 釋亡名。高句麗人也。志道依仁。守真據德。 人不知而不慍。考鍾于內。在邦必聞。霈然有餘。厥聞旁馳。 晉支遁法師貽書于云。上座竺法深。中州劉公之弟子。軆性貞峙。道俗綸綜。往在京邑。維持法綱。內外具瞻。弘道之匠也。遁公中朝重望。其所與寄聲交好。必宏材巨擘。況外國之士。非其勝人。寧有若斯之報耶。且佛教既從晉行乎海東。則宋齊之間。應有豪傑之輩與時則奮。而無載籍。悲夫。 然彼宋人朱靈期(或作虛)使自高麗。還失濟於洲上得杯渡之鉢。又齊時高麗未達佛生之事。問高僧法上。上以周昭之瑞為答。則高人烈士。西竺於中國。諮取綱要者固不少矣。時無良史羅縷厥緒為恨耳。
贊曰。 古者三韓鼎峙。開國稱王。彼佛聲光蔑有其兆。及感應道交。賢德聿來。以赴機叩。易曰.感而遂通天下之故。順道有之矣。始予躬詣所謂興國興福。因有綴文記事之志。無緣以發之。今謬承景命。乃以順道為傳首云(此贊當在順道傳下)。
摩羅難陀 釋摩羅難陀.胡僧也。神異感通。莫測階位。約志遊方。不滯一隅。按古記本從竺乾入于中國。附材傳身。徵煙召侶。乘危駕險。任歷艱辛。有緣則隨。無遠不履。 當百濟第十四枕流王。即位元年九月。從晉乃來。王出郊迎之。邀致宮中。敬奉供養。稟受其說。上好下化。大弘佛事。共贊奉行。如置郵而傳命。 二年春刱寺於漢山。度僧十人。尊法師故也。由是百濟次高麗而興佛教焉。逆數至摩騰入後漢二百八十有年矣。耆老記云。高句麗始祖朱蒙娶高麗女。生二子。曰避流恩祖。二人同志。南走至漢山開國。今廣州是也。本以百家渡河故名百濟。後於公州扶餘郡。前後相次而立都。 三韓東南隅海內有倭國。即日本國也。倭之東北有毛人國。其國東北有文身國。其國東二千餘里有大漢國。其國東二萬里有扶桑國。 宋時有天竺五僧。遊行至此。始行佛法此皆海中在。惟日本國僧。往往渡海而來。餘皆未詳。 夫三韓者。馬韓.卞韓.辰韓.是也。寶藏經云。東北方有震旦國。或云支那。此云多思惟。謂此國人思百端故。即大唐國也。然則三韓在閻浮提東北邊。非海島矣。佛涅槃後六百餘年乃興。中有聖住山。名室梨母怛梨(唐言三印山)峻峰高聳。觀世音菩薩宮殿在彼山頂。即月岳也。此處聖住未易殫書。然百濟乃馬韓之謂矣。 宋僧傳云。難陀得如幻三昧。入水不濡。投火無灼。能變金石。化現無窮。時當建中。年代相拒而不同。恐非一人之跡也。
贊曰。 世之流民。性忄龍戾。王命有所不從。國令有所不順。一旦聞所未聞。見所未見。即皆革面遷善。修真面內。以順機宜故也。
傳所謂出其言善。則千里之外應者。豈非是耶。然攝機之道。要在乘時。故事半古人。功必倍之。
阿道 外 釋阿道.或云本天竺人。或云從吳來。或云自高句麗入魏。後歸新羅。未知孰是。 風儀特異。神變尤奇。恒以行化為任。每當開講。天雨妙花。始新羅訥祇王時。有黑胡子者。從高句麗至一善郡。宣化有緣。郡人毛禮。家中作窟室安置。於是梁遣使賜衣著香物。君臣不知香名及與所用。乃遣中使賚香遍問中外。胡子見之稱其名目曰。 焚此則香氣芬馥。所以達誠於神靈。所謂神聖不過三寶。一曰佛陀。二曰達摩。三曰僧伽。若燒此發願。必有靈應。時王女病革。王使胡子焚香表誓。厥疾尋愈。王甚喜.酬贈尤厚。胡子出見毛禮。以所得物贈之。報其德焉。因語曰。吾有所歸請辭。俄而不知所去。
及毘處王時。有阿道和尚。與侍者三人。亦來止毛禮家。儀表似胡子。住數年無疾而化。其侍者三人留住讀誦經律。往往有信受奉行者焉。 然按古記。梁大通元年三月十一日。阿道來至一善郡。天地震動。師左執金環錫杖。右擎玉鉢應器。身著霞衲。口誦花詮初到信士毛禮家。禮出見驚愕而言曰。 曩者高麗僧正方來入我國。君臣怪為不祥。議而殺之。又有滅垢玭從彼復來。殺戮如前。汝尚何求而來耶。宜速入門。莫令鄰人得見。 引置密室。修供不怠。
適有吳使以五香獻原宗王。王不知所用。遍詢國中。使者至問法師。師曰以火燒而供佛也。其後偕至京師。王令法師見使。使禮拜曰。此邊國高僧何不遠。而王因此知佛僧可敬。敕許 班行。
又按高得相詩史。曰梁氏遣使曰。元表送沈檀及經像。不知所為。咨四野。阿道逢時指法相。註云。阿道再遭斬害。神通不死。隱毛禮家。則梁吳之使莫辨其詳。 又阿道之跡多同黑胡子。何哉。然自永平至大通丁未。凡四百十餘年。高句麗興法已百五十餘年。而百濟已行一百四十餘年矣。 若按朴寅亮殊異傳云。 師父魏人崛摩。母曰高道寧。高麗人也。崛摩奉使高麗。私通還魏。道寧因有身誕焉。師生五稔有異相。母謂曰。偏孤之子。莫若為僧。師依教。即於是日剃髮。十六入魏。覲省崛摩。遂投玄彰和尚。受業十九年。歸寧於母。母諭曰。 此國機緣未熟。難行佛法。惟彼新羅今雖無聲教。爾後三十餘月有護法明王御宇。大興佛事。又其國京師有七法住之處。 一曰金橋天鏡林(今興輪寺)。 二曰三川岐(今永興寺)。三曰龍宮南(今皇龍寺)。 四曰龍宮北(今芬皇寺)。五曰神遊林(今天王寺)。六曰沙川尾(今靈妙寺)。 七曰婿請田(今曇嚴寺)。此等佛法不滅前劫時伽藍墟也。汝當歸彼土。初傳玄旨。為浮屠始祖。不亦美乎。 師既承命子之聲。出疆而來寓新羅王闕西里(今嚴莊寺是也) 時當味鄒王即位二年癸未矣。 師請行竺教。以前所不見為怪。至有將殺之者。故退隱于續村毛祿家。今善州也。 逃害三年。成國宮主病疾不愈。遣使四方。求能治者。師應募赴闕。為療其患。王大悅問其所欲。師請曰。但刱寺於天鏡林。吾願足矣。王許之。 然世質民頑。不能歸向。乃以白屋為寺。後七年始有欲為僧者。來依受法。毛祿之妹名史侍。亦投為尼。乃於三川岐立寺曰永興。以依住焉。 味雛王崩後。嗣王亦不敬浮屠。將欲廢之。師還續村。自作墓入其內。閉戶示滅。因此聖教不行於斯盧。厥後二百餘年。原宗果興像教。皆如道寧所言。
自味雛至法興凡十一王矣。阿道出現年代卻如是其差舛。並是古文不可取捨。然若當味雛時。已有弘宣之益。則與順道同時明矣。以其中廢而至梁大通乃興耳。故並出黑胡子元表等。敘而觀焉。 贊曰。 自像教東漸。信毀交騰。權輿光闡。代有其人。若阿道.黑胡子。皆以無相之法身。隱現自在或先或後。似同異.若捕風搏影。不可執跡而定也。但其先試可而後啓行。始逃害而終成功。則秦之利方。漢之摩騰。亦無以加焉。易曰.藏器待時。阿道之謂矣。
海東高僧傳卷第二 流通一之二
圓光 外 釋圓光.俗姓薜氏。或云朴。新羅王京人。年十三落髮為僧(續高僧傳云入唐剎削)神器恢廓。惠解超倫。校涉玄儒。愛染篇章。逸想高邁。厭居情鬧。 三十歸隱三岐山影不出洞。有一比丘。來止近地。作蘭若修道。師夜坐誦念。有神呼曰。
善哉凡修行者雖眾。無出法師右者。今彼比丘經修咒術。但惱汝淨念礙我行路。而無所得。每當經歷。幾發惡心。請師誘令移去。若不從久住。當有患矣。 明旦師往告彼僧曰。 可移居逃害。不然將有不利。 對曰。至行魔之所妨。 何憂妖鬼言乎。 是夕其神來訊。彼答. 師恐其怒也。謬曰未委耳。何敢不聽。 神曰吾已俱知其情。且可默住而見之。 至夜聲動如雷。黎明往視之。有山頹于蘭若壓焉。 神來證曰。 吾生幾千年。威變最壯。此何足怪。 因諭曰。 今師雖有自利。而闕利他。何不入中朝得法波及後徒。 師曰. 學道於中華固所願也。海陸阻。不能自達。於是神祥誘西遊之事。 乃以真平王十一年春三月。遂入陳遊歷講肆。領牒微言。傳稟成實.涅槃.三藏數論。便投吳之虎丘。攝想青霄。因信士請。遂講成實。企仰請益。相接如鱗。
會隋兵入楊都。主將望見塔火。將救之。祗見師被縛在塔前。若無告狀。異而釋之。
開皇間攝論肇興。奉佩文言。宣譽京皋。
勣業既精。道東須繼。本朝上啓。有敕放還。 真平二十二年庚申。隨朝聘使奈麻諸父大舍橫川還國。俄見海中異人出拜請曰。
願師為我刱寺常講真詮。令弟子得勝報也。 師頷之。 師往來累稔。老幼相忻。王亦面申虔敬。仰若能仁。
遂到三岐山舊居。午夜彼神來問 往返如何。
謝曰。 賴爾恩護凡百適願。
神曰。 吾固不離扶擁。且師與海龍結刱寺約。其龍今亦偕來。 師問之曰。 何處為可。 神曰。 于彼雲門山當有群鵲啄地。即其處也。 詰旦師與神龍偕歸。 果見其地。即崛地有石塔存焉。便刱伽藍。額曰雲門而住之。神又不捨冥衛。 一日神報曰。 吾大期不久。願受菩薩戒。為長往之資。
師乃授訖。 因結世世相度之誓。又謂曰 神之形可得見乎。 曰。師可遲。明望東方。有大臂貫雲接天。 神曰。 師見予臂乎。雖有此 身。未免無常。當於某日死於某地。請來訣別。 師趁期往見。一禿黑狸吸吸而斃。即其神也。 西海龍女常隨聽講。適有大旱。師曰。 汝幸雨境內。 對曰。 上帝不許。我若謾雨。必獲罪於天。無所禱也。 師曰。 吾力能免矣。 俄而南山隮朝而雨。時天雷震動之即欲罰之。龍告急。師匿龍於講床下講經。天使來告曰。予受上帝命師為逋逃者。主萃不得成命奈何。 師指庭中梨木曰。 彼變為此樹。汝當擊之。 遂震梨而去。龍乃出謝禮。以其木代己受罰。引手撫之。其樹即蘇。 真平王三十年。王患高句麗屢侵封疆。欲請隋兵以征敵國。命師修乞師表。師曰。 求自存而滅他。非沙門之行也。然貧道在大王之土地。費大王之衣食。敢不惟命是從。乃述以聞。
師性虛閑。情多汎愛。言常含笑。慍結不形。為牋表啓書。並出自胸襟。舉國傾奉。委以治方。乘機敷化。垂範後代。
三十五年皇龍寺設百座會。邀集福田講經。師為上首。常僑居加悉寺講演真詮。
沙梁部.貴山。箒頂。詣門摳衣告曰。
俗士顓蒙無所知識。願賜一言。為終身之誡。 師曰有菩薩戒。其別有十。若等為人臣子。恐不能行。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奉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不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曰。 他則既受命矣。 但不曉殺生有擇。 師曰。 春夏月及六齋日不殺。是擇時也。不殺使畜。謂牛馬雞犬。不殺細物。謂肉不足一臠。是擇物也。過此椎其所用。但不求多殺。此可謂世俗之善戒。
貴山等守而勿墮。後國王染患。醫治不損。 請師說法。入宮安置。或講或說。王誠心信奉。初夜見師首領。金色如日輪。宮人共睹。王疾立效。 法臘既高。乘輿入內。衣服藥石。 並是王手自營用希專福。
襯施之資捨充營寺。惟餘衣缽。以此盛宣正法。誘掖道俗。
將終之際。王親執慰。囑累遺法兼濟斯民。為說徵詳。 建福五十八年。不豫經七日。遺誡清切。端坐終于所住。皇隆寺東北虛中。音樂盈空。異香充院。合國悲慶。葬具羽儀同於王禮。春秋九十九。即貞觀四年也。 後有兒胎死者。聞諺傳埋于有德人墓側。子孫不絕。乃私瘞之。即日震。胎屍擲于塋外。三岐山浮屠至今存焉。…
贊曰。 昔遠公不廢俗典。講論之際。引莊老連類。能使人悟解玄旨。若光師之諭世俗戒。蓋學通內外。隨機設法之效也。然殺生有擇者。夫豈湯網去三面。仲尼弋不射宿之謂耶。又其動天神返天使。則道力固可知也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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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고승전권제1 유통1지1 순도(順道) 석(釋) 순도(順道)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고매한 덕과 높은 표치(標致; 趣旨, 이상)로, 자비와 인욕(忍辱;『불교』마음을 가라앉혀 온갖 욕됨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음)을 발휘해 중생을 제도했다. 맹세한 뜻을 널리 펴서 진단(震旦; 해가 뜨는 곳이란 뜻으로 渤海를 달리 이르는 말. 震은 중국의 동쪽)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르는 곳마다 기회가 있으면 사람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구려 제17대 해미유왕(혹은 소수림왕이라고도 한다) 2년(372) 임신(壬申)년 여름 6월에 진왕(秦王) 부견(符堅; 前秦의 왕. 五胡十六國의 한 胡族으로서 중국의 제왕이 되어 漢 민족을 제압하기 위하여 인도 문화인 불교를 받아들였다. 천하를 통일하려고 長安을 출발하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이 사자(使者)와 부도(浮屠; 浮圖, 佛圖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중들의 舍利나 유골을 넣은 石鐘을 가리키는데, 중국에서는 옛날 중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하였다.)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이에 임금과 신하가 회우(會遇)하는 예로써 성문(省門)에서 받들어 맞이하였는데 정성과 공경, 신의로써 감사와 경축의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사자를 뽑아 보내어 사례하고 방물(方物)도 보내었다. 혹설(或說)에는 순도(順道)가 동진(東晋)으로부터 와서 불법을 비로소 전하였다고 하지만, 진(秦)나라인지 진(晉)나라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으니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모르겠다. 스님이 다른 나라에서 와서 서역의 자등(慈燈)을 전하여 동이(東暆;낙랑군의 속현)의 혜일(慧日)을 높이 밝혔다. 또한 인과의 법칙을 보여주고 화복의 이치를 가르쳐 주었으니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안개가 침윤(浸潤)하듯이 점차로 스며들어서 풍습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이 질박하고 사람들이 순후하여 결단을 내릴 줄 몰랐던 때문에 스님이 아무리 학문이 깊고 견해가 넓다 하더라도 그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였다. 마등(摩騰= 迦葉摩騰; 중인도 사람. 67년[後漢 永平 10]에 竺法蘭과 함께 중국에 들어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하였다.)이 후한에 들어온 뒤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이 되고, 그 뒤 4년에 아도(阿道; 일명 墨胡子. 신라 미추왕 2년[263]에 신라에 가서 불교를 전하였다.)가 위(魏)나라로부터 와서(古文에 있음) 성문사(省門寺;고구려 때 최초로 세운 절. 일명 肖門寺.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초문사라 하였는데, 肖는 省의 誤寫라고 한다.)를 처음 창건했는데 순도를 이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성문(省門)을 절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지금의 흥국사(興國寺)가 이것이다. 후인이 잘못 기사하여 성문(省門; 肖門이라야 할 것)이라 하였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 삼국유사에, 고구려 소수림왕 4년[374]에 阿道가 晉으로부터 왔는데, 왕이 伊弗蘭寺를 지어 그를 머물게 하였다 한다.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를 창건하여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으니 고기(古記)에 말한 흥복사(興福寺)가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초가 되는데, 아깝도다, 이분의 덕을 마땅히 죽백(竹帛; 書籍, 특히 역사를 기록한 책.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대쪽이나 헝겊에 글을 써서 기록한 데서 생긴 말이다. ≒竹素)에 써서 마땅히 훌륭한 공적을 선양했어야 할 것임에도 그 문사(文辭)마저 대강이라도 보기가 힘드니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서방에서 온 세상의 사신들이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어진 사람이라야 가능할 것인데, 특히 (순도는) 다른 나라에서 와서 일찍이 없었던 큰일을 처음으로 행하였으니 이는 큰 지혜나 큰 계획을 지니고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어찌 행할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그 이인(異人)됨을 알 수 있겠거니와 이는 또한 법란(法蘭;竺法蘭), 승회(僧會;康僧會. 10세에 양친을 여의고 吳나라 赤烏 10년[274]에 중국 建鄴에 이르니 孫權이 建初寺란 절을 지어주고 머물게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超化禪師라 이른다.)와 같은 사람이라 할 만하다.
무명(亡名) 석(釋) 무명(亡名)은 고구려 사람이다. 도(道)에 뜻을 두고 인(仁)에 의지했으며 진(眞)을 지키고 덕(德)에 근거하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다잡아 고구(考究)하였으므로 나라 안에 그의 성문(聲聞)이 필연적으로 패연(霈然)히 넘쳐나서 그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진(晉)나라의 지둔(支遁)법사(314-366. 俗姓은 閔, 字는 道林으로 東晋의 중.)는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상좌(上座;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로서 사찰의 중들을 통솔하고 사무를 관장하는 직명) 축법심(竺法深)은 중주(中州) 유공(劉公)의 제자로서 본성이 곧고 우뚝 솟아 도(道)와 속(俗)을 함께 어울렀고 지난날 서울이나 시골에 있을 때 법강(法綱; 법률과 기율(紀律)을 유지함으로써 나라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으니 도(道)를 널리 떨친 거장(巨匠)이었다.”라고 하였다. 둔공(遁公)은 중국에서도 덕망이 무거운 분으로 그와 더불어 말을 주고받고 좋은 사귐을 가진 이들은 반드시 훌륭한 인재와 뛰어난 학자였을 것인데, 하물며 (무명은) 외국의 선비로서 탁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와 같이 알리는 글을 보냈으리오? 또 불교가 이미 진(晉)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행하였으니, 송(宋)나라 제(齊)나라 사이에 응당 호걸의 무리들이 함께 때를 따라 떨쳐 일어났을 것인데, 기록해 놓은 전적(典籍)이 없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송(宋)나라 사람 주영기(朱靈期)[혹은 虛라 함]가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에서 돌아갈 때에 섬 위에서 (배를 잃어) 건너지 못하고 있더니 배도(杯渡; 晉나라의 奇僧)의 바리때[鉢]를 얻었다고 하고, 또 제(齊)나라 때 고(구)려가 불생(佛生)의 일을 효달(曉達)하지 못하였으므로 고승 법상(法上)에게 물었더니 법상이 주(周)나라 소왕(昭王) 때 나타났던 상서로운 일로써 답하였다 하니, 곧 고인(高人; 벼슬길에는 오르지 않은 뜻이 고결한 사람) 열사(烈士)들이 중국에서 서역 천축으로 가서 (불교의) 요강(要綱)을 물은 것이 정말로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에 사가(史家)들이 그분들 업적의 단서라도 실마리만큼이라도 벌여 (기록해) 놓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한스러울 뿐이다. 찬하여 말한다. 옛날 삼한(三韓)이 우뚝 정립하여 나라를 열고 왕을 일컬었을 때에는, 저 부처님의 성광(聲光)이 그 조짐조차 없었는데 도(道)와 교감하여 감응하게 됨에 이르러 어질고 덕이 있는 분들이 스스로 와서 기연(機緣)을 묻는 일에 응하였다. 역(易)에 이르기를, “감응하여 드디어 천하의 일에 통한다.” 하였으니, 순도(順道)를 두고 이른 말이라 하겠다. 처음에 내가 이른바 흥국사와 흥복사에 직접 갔을 때 글을 지어서 이를 기록해야겠다는 뜻이 있었지만 인연이 없어 이를 발현하지 못했는데, 이제 외람되이 경명(景命; 크나큰 命令, 곧 王命)을 받들게 됨에 이에 순도를 고승전 첫머리로 삼는다.(이 贊은 마땅히 순도전 다음에 있어야 할 것이다.)
마라난타(摩羅難陀) 석 마라난타(摩羅難陀)는 인도의 중이다. 신이(神異)함이 (사물에) 감통(感通)하여 그 정도[階位]를 헤아릴 수가 없다. 사방으로 주유(周遊)함에 뜻을 두어 한 곳에서 머물러 지내지 아니하였다. 옛 기록을 살피건대, 본래 천축(天竺)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인재를 따라 몸을 의지하고 남모르게 벗을 사귀어 위험을 무릅쓰고 간난과 신고를 겪으면서 인연이 있으면 그를 따라나서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백제 14대(15대 왕의 잘못임) 침류왕(枕流王) 즉위 원년(384) 9월에 진(晉)으로부터 오니 왕이 교외에 나가 영접하여 궁중으로 맞아들이고 공경히 받들어 공양하며 그의 설법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니, 윗사람이 좋아하므로 아랫사람도 교화되어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켜 함께 찬미하고 봉행(奉行)함이 마치 역참을 두어 명령을 전달하는 것과 같이 빨랐다.
2년 봄에 한산(漢山; 南漢山)에다 절을 창건하고 열 사람을 승려로 출가시키니 법사를 존숭(尊崇)하기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백 제가 고(구)려 다음으로 불교를 일으켰다. 거슬러 헤아려보면 마등(摩騰; 西涼 세력 , 조조를 역적이라 칭하고 유비와 한나라 충신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했으나 죽음)이 후한(後漢)에 들어온 후 280여 년이 된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 시조 주몽이 고(구)려 여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는데, 두 사람은 뜻이 같아 남쪽 한산(漢山)으로 달려와 나라를 세웠다 하였으니, 지금의 광주(廣州)가 바로 그곳이다. 본래 100호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왔으므로 이름을 백제(百濟)라 하였고, 뒤에 공주(公州)와 부여군(夫餘郡)으로 옮겨 전후하여 서로 번갈아 도읍을 세웠다.
삼한(三韓)의 동남쪽 바다 안에 왜국(倭國)이 있는데 이는 곧 일본국이고, 왜국의 동북쪽에 모인국(毛人國)이 있었고, 또 그 나라의 동북쪽에는 문신국(文身國)이 있었고, 그 나라의 동쪽 2천 리에 대한국(大漢國)이 있었고, 다시 그 나라의 동쪽 2만 리에는 부상국(扶桑國)이 있었다.
송나라 때에 천축(天竺)의 다섯 승려가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불법을 행하였다. 이 나라들은 모두 바다 가운데 있었는데 오직 일본국의 스님만이 왕왕 바다를 건너 왔었고, 그 밖의 나라들은 모두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대저 삼한(三韓)이란 마한(馬韓)․ 변한(弁韓)․ 진한(辰韓)이 그것이다. 보장경(寶藏經)에 이르기를, 동북쪽에 진단(震旦)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혹은 지나(支那)라 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다사유(多思惟)라고 하는 바, 이 나라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는 까닭이며, 곧 대당국(大唐國)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한즉 삼한(三韓)은 염부제(閻浮提; 閻浮提鞞波 또는 贍部洲라고 하는 須彌四洲의 하나로 須彌山의 남쪽에 있다.)동북쪽에 있고 해도(海島)가 아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 600여 년 만에 일어났다. 가운데에는 성주산(聖住山)이 있는데 이름을 실리모달리(室梨母怛梨)라 하고, 준봉(峻峰)이 높이 솟았는데 그 산정(山頂)에는 관세음보살 궁전이 있는데, 곧 월악산(月嶽山)이다. 이곳 성주(聖住)에 대해서는 쉽게 모든 것을 적을 수는 없지만, 백제는 곧 마한을 이름임은 분명하다.
송승전(宋僧傳)에는 이르기를, 마라난타(摩羅難陀)는 여환삼매(如幻三昧; 如幻三摩地; 요술을 부리듯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 보살이 삼매에 들어가면 제 뜻대로 남녀나 군병들을 만들어 내지만, 모두가 空이기 때문에 조금도 구애받음이 없는 것처럼, 중생을 제도하는 상마저 인식하지 않고 교화하는 작용이 자유자재함을 말한다.)를 얻어서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능히 금이나 돌로 변하는 등 그 변화하고 은현(隱現)함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이때는 건중(建中; 宣德王 良相 즉위 원년[780])에 해당하지만, 연대가 서로 어긋나서 같지가 않으니, 한 사람의 자취는 아닌 듯하다.
찬하여 말한다. 세상의 유민(流民)들이 흔히 성질이 농려(忄龍戾≒ 乖戾; 사리에 어그러져서 온당하지 못함)임금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고 나라의 법령도 순종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들어보지 못하던 말을 듣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는, 바로 모두가 얼굴빛을 고쳐 선(善)함으로 옮아가고 마음속으로 진(眞)을 닦았으니 이는 그 기의(機宜; [佛] 機는 마음의 움직임이고, 宜는 그 적절함에 따르는 것. 상대방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適宜의 작용을 이루는 것을 말함.)를 따른 때문이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그 말을 냄이 착하면 곧 천리 밖에서도 응한다’ 함이 어찌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섭기(攝機; 그 機를 굳게 지킴)하는 길은 요컨대 때를 잘 만나는 데 있는 것이니, 그러기에 일은 옛 사람의 절반 정도를 하고도 공은 반드시 갑절이나 되는 것이다.
아도 외(阿道 外) 석 아도(阿道)는, 어떤 사람은 본래 천축(天竺) 사람이라 하고 어떤 이는 오(吳)나라에서 왔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고구려에서 위(魏)나라로 들어갔다가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고도 말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풍모와 위의(威儀)가 남달리 특이하며 신령스러운 변화함이 더욱 기이하여 항상 교화를 펴는 일로써 임무를 삼았다. 매번 불법을 강할 때마다 하늘에서 아름다운 꽃이 비처럼 뿌렸다. 처음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흑호자(黑胡子; 삼국유사에는 墨胡子로 나온다.)란 사람이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으로 와서 교화를 펼 인연이 있었으니 그 고을사람 모례(毛禮)가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편안히 모셨다. 이 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의복과 향물을 보내왔는데 임금이나 신하가 향물의 이름과 사용하는 바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중사(中使; 왕의 명령을 전하던 內侍)에게 향을 주어서 나라 안팎으로 두루 다니면서 묻게 하였다. 흑호자(黑胡子)가 그것을 보고 그 이름을 대며 말하였다.
“이것을 태우면 냄새가 향기로운데 그 때문에 정성이 신령에게 통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른바 신성(神聖)이란 삼보(三寶)에 지나지 않는데 그 하나는 불타(佛陀)요 둘은 달마(達磨)이고 그 셋째가 승가(僧伽; 중)입니다. 만약 이 향을 사르고 발원(發願)을 한다면 반드시 신령한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공주가 병이 들어서 위독했다. 왕은 흑호자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서원(誓願)을 드러내었더니 그로 인하여 병이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그 보답으로 예물을 주고 더욱 후하게 대접했다. 흑호자가 나와 모례(毛禮)를 보고는 그 얻은 바 예물을 주어 그가 베풀어준 덕에 보답하고, 인하여 말하였다. “나는 가야할 곳이 있으니 그만 떠나야겠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어디론지 가 버렸다.
비처왕(毘處王; 炤知王이라고도 하며 신라 21대왕으로 射琴匣 설화의 주인공) 아도화상(阿道和尚)이 시자(侍者) 세 사람과 함께 또한 모례(毛禮)의 집에 와서 머물렀는데 그 모습이 흑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머물러 있은 수년 만에 아무런 병도 없이 죽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률(經律)을 읽고 외니 이따금 그를 믿고 가르침을 받아 받들어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옛 기록을 살펴보면, 양(梁)나라 대통(大通) 원년(527) 3월 11일에 아도(阿道)가 일선군(一善郡)에 오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스님은 왼손에 금환(金環)과 석장(錫杖)을 쥐고 오른손에는 옥발응기(玉鉢應器; 응기는 바리때)를 들고 몸에는 누더기 장삼을 입고 입으로는 화전(花詮;불교의 경전)을 외면서 처음 믿음을 지닌 선비 모례(毛禮)의 집에 찾아왔다. 모례가 나가 보고 깜짝 놀라 말하였다.
“지난날 고(구)려의 중 정방(正方)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군신(君臣)들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괴이쩍게 여겨 의논하여 죽였고 또 멸구빈(滅垢玭)이라는 이가 정방의 뒤를 따라 다시 왔는데 전과 같이 죽였습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구하러 왔습니까? 마땅히 빨리 문 안으로 들어와 이웃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를 밀실로 인도하여 지내게 하고 공양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침 오(吳)나라 사신이 다섯 가지의 향을 가지고 와서 원종왕(原宗王; 신라 23대 法興王[? ~540]의 이름이 原宗이다.)에게 바치었다. 왕은 쓸 데를 몰라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물어보게 하였다. 사자가 법사에게 가서 물었더니 법사는 “불로 태워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에 함께 경사(京師)로 돌아오니 왕이 법사에게 명하여 오나라 사신을 만나보라고 하였다. 사신은 법사에게 절하고 말했다. “이런 변방의 나라를 고승께서 어찌 멀다 아니하시고 찾아오셨습니까?” 왕은 이로 인하여 불승은 공경해야 함을 알고 칙령으로 반항(班行; 석차,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다, 포교하는 것을 허락하다.)을 허가하였다. 또 고득상(高得相)의 시사(詩史)를 살펴보면,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원표(元表)에게 침단향(沈檀香)과 불경 불상을 보내왔는데 어디에 쓰는지를 몰라 사방으로 물었는데 아도 스님을 만나서야 그 법상(法相; 諸法의 모양을 설명하는 교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그 주석에서는, “아도는 두 차례나 참륙(斬戮)의 해를 당하였으나 신통력으로 죽지 아니하였고, 모례의 집에 숨어 지내던 사람은 곧 양나라와 오나라의 사신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또 아도의 행적이 흑호자와 같은 데가 많은데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영평(永平)으로부터 대통(大通) 정미년(丁未年; 527)에 이르기까지 무릇 410여 년이고, 고구려에서 불법을 일으킨 지 150여 년이며, 백제에서도 이미 불법이 행해진 지가 140여 년이 되었다.
박인량이 지은 수이전(殊異傳)을 살펴보면, 이렇다. (아도의) 아버지는 위(魏)나라 사람 굴마(崛摩)이고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으로 고(구)려 사람인데 굴마가 고(구)려 사신으로 왔다가 사통(私通)하고 위나라로 돌아가고, 고도령이 임신하여 낳았다. 스님은 태어난 지 5년이 되자 이상한 모습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했다. “아비 없는 아들이니 중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스님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곧 그날로 머리를 깎았다. 16살에는 위(魏)나라에 들어가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드디어 현창화상(玄彰和尚)에게 몸을 맡겼다. 배움을 받은 지 19년 만에 어머니 고도령에게 돌아오니, 어머니가 타일러 말했다.
“이 나라는 기연(機緣)이 아직 성숙되지 못하여 불법을 행하기가 어렵다. 생각건대 저 신라는 지금은 비록 성교(聲教)가 없지마는 이후로 30여 개월 만 지나면 불법을 보호할 밝은 임금이 아와 나라를 다스려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또 그 나라 서울에는 7군데의 법주(法住)할 곳이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의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興輪寺)이고, 둘은 삼천기(三川岐; 지금의 永興寺)이며, 셋은 용궁 남쪽(지금의 皇龍寺)이요, 넷은 용궁 북쪽(지금의 芬皇寺)이며, 다섯은 신유림(神遊林;지금의 天王寺)이고, 여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靈妙寺), 일곱은 서청(婿請)의 밭(지금의 曇嚴寺)이다. 이런 곳들은 불법이 멸하지 않고 전겁(前劫) 때의 절터이다. 너는 마땅히 그곳으로 가서 먼저 (불법의) 현묘한 뜻을 전하면 부도(浮屠)의 시조가 될 것이니,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스님은 아들에게 명하는 (어머니의) 말씀을 이어받아 경계를 벗어나 신라 왕궐의 서쪽 마을(지금의 嚴莊寺가 이곳이다.)에 우거(寓居)하였다. 이때는 미추왕(味鄒王)이 즉위한 지 2년인 계미년(癸未年; 263)에 해당한다. 스님은 (왕에게) 불교[竺教]를 시행할 것을 청했는데, (왕은)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바라서 괴이쩍게 여겼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사람마저도 있었으므로 속촌(續村) 모록(毛祿; 삼국유사에서는 毛禮의 잘못이라 했다.)의 집으로 물러나 숨었으니 지금의 선주(善州)이다. 해를 피하여 도망쳐 산 지 3년이 되던 해에 성국궁주(成國宮主)가 병이 들어 낫지를 않게 되자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능히 치료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스님이 이에 응모하여 대궐로 가서 그 병환을 치료하여 낫게 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하고 싶어하는 바를 물었다. 스님이 청하여 가로되, “단지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창건해 주신다면 제 소원은 족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단순하고 백성은 완악(頑惡)하여 (불교로) 돌아와 구하지를 않아서 이에 허술한 초가집으로 절을 삼았다. 그 뒤 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부처께 귀의하고 설법을 들었다. 그리고 사시(史侍)라는 이름의 모록(毛祿)의 여동생도 또한 몸을 던져 비구니가 되었다. 이에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세워 영흥사(永興寺)라 이르고 그곳에 의지해 살았다.
미추왕이 죽은 뒤에 대를 이은 왕 또한 부도(浮屠)를 공경하지 않아서 장차 폐하려고 하였다. 스님이 다시 속촌(續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적멸(寂滅)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사로(斯盧; 신라)에서는 성교(聖教)가 행해지지 않았다. 그 후 200여 년을 지나 원종왕(原宗王) 때에야 과연 상교(像教)가 일어났으니, 이 모두가 고도령(高道寧)이 말한 바와 같았다.
미추왕으로부터 법흥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11왕을 지났으니 아도(阿道)가 나타난 연대는 이와 같이 그 차이가 있으나 이는 아울러 고문(古文)에 있는 것이므로 취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미추왕 때에 이미 널리 선교(宣敎)하는 이로움이 있었다면, 순도(順道)와 동시대임이 분명하다. 그 중간에 폐했다가 양(梁)나라 대통(大通)에 이르러서야 진흥하였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흑호자(黑胡子)와 원표(元表) 등을 아울러 내세워서 서술해본 것이다.
찬하여 말한다. 상교(像教)가 동쪽으로 서서히 옮아옴으로부터 믿고 헐뜯는 소리가 번갈아 일어났으나 처음 시초로부터 빛이 열려 대대로 그 사람이 이어졌으니 아도와 흑호자 같은 분들은 모두 무상(無相)의 법신(法身)으로서 은현(隱現)을 마음대로 하여 혹은 앞서고 혹은 뒤따르며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여 마치 바람을 잡는 듯 그림자를 잡는 듯하여 그 자취를 잡아 정할 수가 없다. 다만 먼저 그 옳음을 시험한 뒤에 그 행함을 열었고, 처음에는 해침을 피해 도망갔지만 끝내는 공을 이루었으니 이는 진(秦)나라의 이방(利方)이나 한(漢)나라의 마등(摩騰)이라도 또한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그릇을 감추어 때를 기다린다.’ 하였으니, 아도를 두고 이름이었다.
해동고승전권제2 유통1지2
원광 외(圓光 外) 석 원광(圓光)은 속성(俗姓)이 설씨(薛氏), 혹은 박씨(朴氏)라 하며 신라 왕경인(王京人)이다. 나이 열세 살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續高僧傳에는 唐나라에 들어가 절에서 삭발했다고 한다.) 신통한 기량(器量)이 크고 넓었으며 지혜(惠解≒慧解;<불교> 지혜로 모든 사리를 잘 해득함.)는 무리에서 뛰어났다. 도교와 유학을 널리 섭렵하였고 서책과 문장을 사랑하여 깊숙이 젖어들었다. 생각은 세상을 벗어나 고매하고 정에 얽혀 시끄럽게 사는 것을 싫어하였다. 서른 살에 삼기산(三岐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그림자마저도 동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비구승 하나가 가까운 곳에 와서 머무르며 난야(蘭若; 阿蘭若의 준말. 비구가 수행하는 데에 알맞은 空閑處를 가리킴.)를 짓고 수도하였다. 스님이 밤중에 정좌하고 불경을 외고 있었는데, 신이 나타나 불러 말하였다. “훌륭하도다. 무릇 수행하는 자가 비록 무리를 이루지만 법사를 (오른쪽으로) 뛰어넘는 자가 없소. 지금 저 비구가 불경을 닦고 주술을 행하고 있지만 다만 그대의 깨끗한 생각을 괴롭히고 나의 행하는 길을 막을 뿐 소득이 없소. 매양 여러 가지 일을 겪고 당할 때마다 악심을 발하는 기미가 있으니 청컨대 스님께서는 타일러 옮겨가도록 하여 주시오. 만약 따르지 않고 오래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근심이 있을 것이오.” 이튿날 아침에 스님은 그 중에게 가서 고하여 말하였다. “거처를 옮겨 해를 피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장차 이롭지 못함이 있을 것이오.” 대답하기를, “지극한 고행은 마귀의 방해하는 바가 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요귀(妖鬼)의 말을 걱정하리오?” 이날 저녁에 그 신이 다시 나타나서 비구의 대답을 물었다. 스님은 그가 성낼까 두려워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아직 말하지 못했으나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그 실정을 다 알고 있으니 가만히 있으면서 보도록 하시오.”하였다. 밤이 되자 우레 같은 소리가 진동하였다. 날이 밝아 가 보았더니 산이 무너져 난야를 덮쳐누르고 있었다.
신이 와서 증명하여 말하였다. “내가 살아온 지 몇천 년에 위엄과 변화가 가장 웅장하였으니 어찌 족히 괴이쩍게 여기리오.” 인하여 개유(開諭)하여 말하였다. “지금 스님께서는 비록 자신의 이로움은 있으나 남을 이롭게 함은 부족하니 어찌하여 중국에 들어가 불법을 얻어서 뒤의 무리들에게 파급시키지 않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중화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진실로 바라는 바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험하게 막혀서 스스로는 능히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신은 서유(西遊)의 일에 대하여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진평왕 11년(589) 춘3월에 드디어 진(陳)나라에 들어가 강사(講肆; 경을 강하는 장소. 肆는 저자니, 경을 강하는 자리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므로 「肆」라 한 것이다.)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배워 조그만 말까지도 요 긴하게 기록하였으며 성실(成實;성실론. 인도의 하리발마가 지은 책으로 모 두 16권. 그 大義는 ‘우주의 모든 형상은 假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결국 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함.’)․열반(涅槃)․ 삼장수론(三藏數論) 등을 전해 받았다. 그리고는 곧 오(吳)나라의 호구(虎丘)로 몸을 던져 생각을 맑은 하늘처럼 다잡으니 그로 인하여 믿음을 지닌 선비들이 청하여 드디어 성실을 강론하였더니 모두 우러러보고 가르침을 더욱 청하여 서로 몰려옴이 마치 고기비늘처럼 잇닿았다.
마침 수(隋)나라 군사가 양도(楊都)에 쳐들어왔는데 그 주장(主將)이 탑에 불이 일어남을 보고 막 끄려고 하다가 스님이 탑 앞에 결박당한 채 마치 어디에 고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있기에 이상히 여겨서 풀어주었다. 개황(開皇; 隋나라 때 쓰던 연호. 581-600) 연간에 섭론(攝論; 攝論宗. 無着이 지은 攝大乘論을 근본으로 하는 宗旨. 후에 玄奘이 法相宗을 열자 병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가서 들여왔다.)이 비로소 일어나니 그 문언(文言)을 받들어 마음에 지니고 경고(京皋 ≒京鄕)에 널리 드러내었다. 닦은 업적이 이미 정묘하게 되니 그 도를 우리나라에 반드시 이어주려고 하여 본조(本朝)에서 장계(狀啓)를 올려 칙명으로 돌아오게 하니 진평왕 22년(600) 경신(庚申)에 조빙사(朝聘使) 나마(奈麻; 11등급) 제보(諸父;삼국사기에서는 諸文)와 대사(大舍;12등급) 횡천(橫川)을 따라 환국하는데, 문득 바다 가운데에서 이상한 사람이 나와 절하며 청하여 말하였다.
“원컨대 스님께서는 저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늘 참된 도리를 강하여 제자로 하여금 좋은 과보를 얻도록 하여 주십시오.” 법사가 승낙하였다. 법사가 (중국에) 왕래한 지 여러 해 만이라 늙은이나 아이들이 서로 기뻐하였고 왕도 또한 대면해 보고는 경건하게 말하고 부처님[能仁; 능히 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를 달리 이르는 말]처럼 우러러보았다.
드디어 삼기산(三岐山) 옛 거처에 도착하니 오야(午夜; 子正)에 전에 보았던 귀신이 와서 물었다. “가고 오는 길이 어떠하였소?”
스님이 사례하여 말하였다. “당신께 입은 은혜로운 보호로 모든 일이 원했던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귀신이 말했다. “나는 진실로 (법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호하였소. 법사께서는 바다의 용과 절을 창건할 약속을 맺었는데, 그 용이 지금 또한 함께 와 있소.” 법사가 물었다. “어느 곳이 좋겠습니까?” 신이 말했다. “저 운문산(雲門山)에 가면 뭇 까치가 땅을 쪼고 있는 곳을 만날 것인즉 바로 그곳이오.” 이튿날 아침 스님은 그 신룡(神龍)과 함께 가서 과연 그곳을 보고 곧 땅을 파니 석탑 하나가 있었다. 바로 절을 창건하고는 편액을 운문(雲門)이라 하고는 그곳에서 머물렀다. 귀신도 또한 남몰래 지켜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는 귀신이 알려 말하였다. “나는 죽을 날[大期; 보통은 해산달. 음양이 열리고 닫히는 운수.]이 오래되지 않으니 보살계(菩薩戒)를 받아 저승길[長往; 영원히 감]의 자량(資糧; 路資와 食糧]을 삼기를 바라오.” 법사가 이에 계율 주기를 마치고, 인하여 세세로 서로 제도해줄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신(神)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왈, “법사께서는 기다리시오.” 하였다. 밝을 무렵 동방을 바라보니,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아 있었다. 신이 말했다. “법사께서는 내 팔을 보았소. 비록 이 몸은 있으나 무상(無常)함을 면치는 못할 것이라 아무 날 아무 땅에서 죽게 될 것이니, 청컨대 그날 와서 결별하기를 바라오.”
스님이 그때를 좇아가서 보니, 한 마리 털 빠진 검은 삵이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처럼 죽어 있었으니, 곧 그 신이었다. 서해의 용녀(龍女)가 늘 따라와 강론을 들었는데, 마침 큰 가뭄이 있어 스님이 말하였다. “네가 우리나라 안에 비를 내려주었으면 다행이겠노라.” 대답하였다. “상제(上帝)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만약 제 마음대로 비를 내리면 반드시 하늘에 죄를 짓게 되거늘 기도할 곳이 없게 됩니다.”
스님이 말했다. “내 힘으로 능히 면하도록 해 주겠노라.” 갑자기 남산에 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비가 내렸다. 이때 하늘에서 우레와 벼락을 치는 것이 곧 용녀를 벌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용(녀)이 급히 고하니 스님이 강론하는 책상 아래 용(녀)을 숨기고 경문을 외었다. 천사가 와서 고하기를, “나는 상제의 명을 받았는데, 스님께서는 (죄를 짓고) 도망간 자를 위하여 오게 하여 도와주고 계셔서 명령을 이룰 수 없게 하니 어찌해야 할까요?” 스님이 뜰 가운데의 배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변하여 이 나무가 되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그를 쳐야 할 것이니라.” 드디어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갔다. 용(녀)이 이에 나와서 사례를 하고, 그 나무를 자기 대신 벌을 받았다고 하여 손을 뻗어 어루만지니 그 나무가 곧 소생하였다. 진평왕 30년(608) 왕은 고구려가 누차에 걸쳐 영토를 침범해 오는 것을 걱정하여 수(隋)나라 군대를 청하여 적국을 정벌하고자 하고, 법사에게 명하여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니, 법사가 말했다. “스스로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사문의 행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빈도(貧道; 도를 닦음이 아직 부족하다는 뜻으로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것으로 범어의 沙門을 번역한 말.)가 대왕의 토지에 살고 대왕의 의식(衣食)을 소비하고 있으니, 감히 명을 옳게 여겨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곧 지어서 바쳤다. 스님은 성품이 텅 빈 듯 한가로웠고 정이 많아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성낸 빛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牋)․ 표(表)․ 계(啓)․ 서(書)를 쓸 때에는 아울러 자신의 흉금을 풀어 드러내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떠받들었다. 지방을 다스리도록 맡기면 기회를 이용하여 교화를 펴서 모범을 후대에까지 드리웠다. 35년에 황룡사에 백좌회(百座會= 百高座; 獅子座를 백 개를 마련하고 고승들을 초치하여 설법하는 큰 법회. 獅子座는 부처가 앉는 자리. 부처는 인간 세계에서 존귀한 자리에 있으므로 모든 짐승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였다.)를 베풀고 복전(福田; 복을 거두는 밭이라는 뜻으로, 삼보(三寶)ㆍ부모ㆍ가난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삼보를 공양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면 복이 생긴다고 한다.)을 모아 불경을 강하는데, 법사가 상수(上首; 우두머리 좌석에 앉는 사람)가 되었고 항상 가실사(加悉寺)에 거처하면서 참된 도리를 강연하였다. 사량부(沙梁部)의 귀산(貴山; 신라의 화랑. 箒項과 함께 원광법사 밑에서 세속오계를 배웠다.), 추항(箒項)이 법사의 문에 나아가 옷을 걷어 올리고 말하였다. “세속의 선비가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시어서 평생의 계율로 삼게 해 주십시오.” 법사가 가로되,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별은 열 가지이다. 너희가 남의 신하와 자식이 되었으므로 능히 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어 이제 세속의 다섯 가지 경계를 말해 주겠다.
그 하나는 임금을 섬기되 충(忠)으로써 할 것이요, 그 둘은 어버이를 받들되 효(孝)로써 할 것이요, 그 셋은 벗을 사귀되 신(信)으로써 할 것이요, 그 넷은 싸움에 이르러서는 물러나지 말 것이요, 그 다섯은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행함에 소홀히 말 것이니라.”
귀산이 말하였다. “다른 말씀은 이미 명을 받아들였사오나, 단지 살생유택이란 효득(曉得; 깨달아 앎)하지 못하겠습니다.” 스님이 말하였다. “봄이나 여름철, 그리고 육재일(六齋日; 한 달 가운데서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齋戒하는 여섯 날. 음력 8ㆍ14ㆍ15ㆍ23ㆍ29ㆍ30일로, 이날에는 사천왕이 천하를 돌아다니며 사람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라고 한다.) 에는 생물을 죽이지 말아야 함을 말함이니 이는 때를 가림이니라. 가축으로 부리는 것들은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소․ 말․ 닭․ 개를 이름이니라. 작은 동물들을 죽이지 말 것이니 그 고기가 한 점도 못됨을 이름이니 이는 물(物)을 가림이니라. 그 소용되는 것이 이를 지나쳐서 단지 많이 죽임을 구하지 말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 할 것이니라.”
귀산 등이 이를 지켜 어기지 아니하였다. 뒤에 국왕이 병환에 걸려서 의원이 치료하게 하였으나 병환이 덜어짐이 없었다. 이에 법사에게 설법을 청하여 왕궁에 들어가 지내면서 혹은 불경을 강하기도 하고 불법을 설법하기도 하였는데 왕이 성심으로 신봉하니, 첫날밤에 스님의 머리에 둥근 해 모양의 금빛을 보았는데 궁인(宮人)들도 함께 목도했고 왕의 질병은 즉시 나았다.
법랍(法臘; 승려가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 臘은 12월에 신에게 제사하는 이름으로서 歲末을 일컫는 말인데, 비구는 세속과 달라 安居의 제도에 의하여 음력 7월 15일을 연말로 하고, 안거를 마친 횟수에 의하여 나이를 센다.)이 높았으므로 가마를 타고 궐내를 드나들었으며, 의복과 약석(藥石; 약과 침이라는 뜻으로, 여러 가지 약을 통틀어 이르는 말. 또는 그것으로 치료하는 일.)은 이를 왕이 손수 마련하여 오롯한 복을 누리기를 바랐다.
왕이 친시(襯施; 齋를 지낸 뒤에 하는 설법을 法施라 하는데, 이에 대하여 화전(貨錢)이나 물건을 보시하는 것을 가리킨다.)하는 재물을 희사하여 절을 운영하는 데 충당하니 오직 남는 것은 가사와 바리[鉢]뿐이었다. 이로써 정법(正法)을 널리 베풀고 도속(道俗; 승려와 세속인)을 이끌어 가르쳐주었다.
장차 생을 마칠 즈음에는 왕이 친히 위문하였는데, (법사는) 불법을 물려줄 것과 백성을 구제해줄 것을 거듭 부탁하고 길상(吉祥)을 부르는 법을 설법해 주었다. 건복(建福) 58년(588) 예경(豫經; 불경을 즐기다)을 하지 못한 지 7일 만에 청정하고 간절한 계율을 남기고 거주하고 있던 황륭사(皇隆寺) 동북쪽 빈방에 단정히 않아 종명(終命)하니 음악이 공중에 가득 차고 기이한 향기가 사원(寺院)에 충만하였다. 온 나라가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경사(慶事)로 여겼으며 장구(葬具)와 우의(羽儀; 의식에 장식으로 쓰던 새의 깃)를 임금의 예(禮)와 똑같이 하였다. 춘추(春秋)는 99세였으니 곧 정관(貞觀) 4년(630)이었다. 뒤에 아이가 태사(胎死)한 자가 있었는데 덕이 있는 사람의 무덤 곁에 묻으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속담을 듣고 몰래 (법사의 무덤 곁에) 묻었더니 그날로 벼락이 쳐서 태시(胎屍)를 무덤 밖으로 던져버렸다. 삼기산(三岐山)의 부도(浮屠)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찬하여 말한다. 옛날에 원공(遠公)이 세속의 경전을 폐하지 않고 강론할 때에 장로(莊老)와 관련되는 무리를 인용하여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그 현묘한 뜻을 깨달아 알게 하였거니와 원광법사가 세속을 가르친 오계(五戒)와 같은 것은 대개 학문이 내외를 통하여 기회 따라 불법을 베푼 공효라 하겠다. 그러나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는 것은 대저 은탕(殷湯)이 (고기를 잡되) 그물망의 삼면을 터놓은 일과 중니(仲尼)가 잠든 (새는) 쏘지 않은 일과 어찌 다르겠는가? 또 천신(天神)을 감동시키고 천사(天使)를 돌려보냈은즉 도력(道力)을 진실로 알 만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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