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강독(성남문화원)

古講 6 金現感虎 등

거북이3 2008. 12. 20. 13:13

 

(古講 6) 金現感虎

 

 

 

 

新羅俗 每堂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競遶興輪寺之殿塔爲福會 元聖王代 有郞君金現者 夜深獨處不息 有一處女念佛隨遙 相感而目送之 遶畢 引入屛處通焉 女將還 現從之 女辭据而强隨之 行至西山之麓 入一茅店 有老嫗問女曰 附率者何人 女陳其情 嫗曰 雖好事不如無也 然遂事不可諫也 且蔣於密 恐汝弟兄之惡也 把郞而匿之奧 小選有三虎 咆哮而室 作人語曰 家有腥膻之氣 療飢何幸 嫗與女叱曰

 

爾鼻之爽乎 何言之狂也 時有天唱 爾輩嗜害物命尤多 宣誅一以徵惡 三獸聞之 皆有憂色 女謂曰 三兄若能遠避而自懲 我能代受其罰 皆喜俛首妥尾而遁去

女入謂郞曰 始吾耻君子之辱臨弊族 故辭禁爾 今旣無隱 敢布腹心 且賤妾之於郞君 雖曰非類 得陪一夕之歡 義重結禑之好 三兄之惡 天旣厭之 一家之殃 予欲當之 與其死於等閑人之手 曷若伏於郞君刃下 以報之德乎 妾以明日入市爲害劇 則國人無如我何 大王必募以重爵而捉我矣 君其無㤼 追我乎城北林中 吾將待之

現曰 人交人 彛倫之道 異類而交 蓋非常也 旣得從容 固多天幸 何可忍賣於伉儷之死 僥倖一世之爵祿乎 女曰 郞君無有此言 今妾之壽天 盖天命也 亦吾願也 郞君之慶也 予族之福也 國人之喜也 一死而五利備 其可違乎 但爲妾創寺 講眞詮 資勝報 則郞君之惠莫大焉 遂相泣而

別 次日果有猛虎 入城中 剽甚無敢當 元聖王聞之 申令曰 勘虎者爵二級 現詣闕奏曰 小臣能之 乃先賜爵以激之 現持短兵入林中 虎變爲娘子 熙怡而笑曰 昨夜共郞君繾綣之事 惟君無忽 今日被爪傷者 皆?興輪寺漿 聆其寺之螺鉢聲 則可治 乃取現所刀 自頸而仆 乃虎也 現出林而託曰 今玆虎易搏矣 匿其由不洩 但依諭而治之 其瘡皆效 今俗亦用其方

 

 現旣登庸 創寺於西川邊 號虎願寺 常講梵綱經 以道虎之冥遊 亦報其殺身成己之恩 現臨卒 深感前事之異 乃筆成傳 俗姑[始]聞知 因名論虎林 稱于今

 

貞元九年 申屠澄自黃冠 照補漢州什邡縣之尉 至眞符縣之東十里許 遇風雪大寒 馬不能前 路傍有茅舍 中有煙火甚溫 照燈下就之 有老父嫗及處子 環火而坐 其女年方十四五 雖蓬髮垢衣 雪膚花臉 擧止姸媚 父嫗見澄來 遽起曰 客甚衝寒雪 請前就火 澄坐良久 天色巳暝 風雪不止 澄曰 西去縣尙遠 請宿于此

 

父嫗曰 苟不以蓬蓽爲陋 取承命 澄遂解鞍施衾幃 其女見客方止 修容靘粧 自帷箔間出 有閑雅 之態 猶過初時 澄曰 小娘子明惠過人甚 幸未婚 敢請自媒如何

 

翁曰 不期貴客欲採拾 豈(非)定分也 澄遂修子婿之禮 澄乃以所乘馬 載之而行 旣至官 俸祿甚薄 妻力以成家 無不歡心 後秩滿將歸 已生一男一女 赤甚明惠 澄尤加敬愛 嘗作贈內詩云

 

一官慙梅福 

三年愧孟光 

此情何所喩 

川上有鴛鴦 

 

其妻終日吟諷 似黙有和者 未嘗出口 澄罷官 경室歸本家 妻忽悵然謂澄曰 見贈一篇 尋卽有和 乃吟曰

 

琴瑟情雖重 

山林志自深 

常憂時節變 

辜負百年心 

 

遂與訪其家 不復有人矣 妻思慕之甚 盡日涕泣 忽壁角見一虎皮 妻大笑曰 不知此物尙在耶 遂取披之 卽變爲虎 哮吼拏攫 突門而出 澄驚避之 携二子尋其路 望山林大哭數日 竟不知所之

噫 澄現二公之接異物也

變爲人妾則同矣 而贈皆人詩 然後哮吼拏攫而走 與現之虎異矣 現之虎不得巳而傷人 然善誘良方以救人 獸有爲仁如彼者 今有人而不如獸者 何哉

 

詳觀事之終始 感人於旋遶佛寺中 天唱徵惡 以自代之 傳神而方救人 置精廬講佛戒 非徒獸之性仁者也 盖大聖應物之多方 感現公之能致精於旋遶 欲報冥益耳 宜其當時能受禧佑乎

 

 

讚曰 

山家不耐三兄惡 

蘭吐那堪一諾芳 

義重數條輕萬死 

許身林下落花忙 

 

 

 

 

 

 

 

 

 

 

 

 

 

 

 

김현감호(金現感虎)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파일에서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를 행했다.

원성왕 때에 김현이라는 낭군이 있어서 밤이 깊도록 혼자서 탑을 돌기를 쉬지 않았다. 그때 한 처녀가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눈을 주더니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정을 통하였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가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지만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길을 가다가 서산 기슭에 이르러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처녀에게 물었다. "함께 온 자는 누구냐." 처녀가 사실대로 말하자 늙은 할머니는 말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이어서 나무랄 수도 없으니 은밀한 곳에 숨겨 두거라.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두렵다." 하고 김현을 이끌어 구석진 곳에 숨겼다. 조금 뒤에 세 마리 범이 으르렁거리며 들어와 사람의 말로 말했다. "집에서 비린내가 나니 요깃거리가 어찌 다행하지 않으랴." 늙은 할머니와 처녀가 꾸짖었다. 

 "너희 코가 잘못이다. 무슨 미친 소리냐."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이 즐겨 생명을 해치는 것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을 징계하겠노라." 세 짐승은 이 소리를 듣자 모두 근심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세 분 오빠께서 만약 멀리 피해 가서 스스로 징계하신다면 내가 그 벌을 대신 받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모두 기뻐하여 고개를 숙이고 꼬

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말했다. "처음에 저는 낭군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짐짓 사양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숨김없이 감히 진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저와 낭군은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얻어 중한 부부의 의를 맺었습니다. 세 오빠의 악함은 하늘이 이미 미워하시니 한 집안의 재앙을 제가 당하려 하오나, 보통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서 은덕을 갚는 것만 하겠습니까? 제가 내일 시가에 들어가 몹시 사람들을 해치면 나라 사람들은 저를 어찌 할 수 없어서, 임금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로써 사람을 모집하여 저를 잡게 할 것입니다. 그 때 낭군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 북 쪽의 숲속까지 오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김현이 말했다. "사람이 사람과 사귐은 인륜의 도리지만 다른 유(類)와 사귐은 대개 떳떳한 일이 아니오. 그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한 세상의 벼슬을 바라겠소." 처녀가 말했다. "낭군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 제가 일찍 죽는 것은 대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저의 소원이요 낭군의 경사이며, 우리 일족의 복이요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 가지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 터에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불경을 강론하여 좋은 과보를 얻는데 도움이 되게 해 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큼이 없

겠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범이 성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몹시 해치니 감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원성왕이 듣고 영을 내려, "범을 잡는 사람에게 2급의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다. 김현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다. "소신이 잡겠습니다." 왕은 먼저 벼슬을 주고 격려하였다. 김현이 칼을 쥐고 숲속으로 들어가니 범은 변하여 낭자(娘子)가 되어 반갑게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마음속 깊이 정을 맺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螺鉢)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입니다."하고는, 이어 김현이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고꾸라지니 곧 범이었다. 김현이 숲속에서 나와서, "범은 쉽게 잡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연유는 숨기고, 다만 범에게 입은 상처를 그 범이 시킨 대로 치료하니 모두 나았다. 지금도 민가에서는 역시 그 방법을 쓴다.

 김현은 벼슬에 오르자, 서천(西川)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항상 범망경(梵網經)을 강론하여 범의 저승길을 인도하고 또한 범이 제 몸을 죽여 자기를 성공하게 해 준 은혜에 보답했다. 김현은 죽을 때에 지나간 일의 기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이에 붓으로 적어 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비로소 듣고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름은 논호림(論虎林)이라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렇게 일컬어 온다.

 정원 9년에 신도징(申屠澄)이 야인으로서 한주십방현위에 임명되어 진부현(眞符縣)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길 옆의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불이 피워 있어 매우 따뜻했다. 등불 밑에 나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았는데, 그 처녀의 나이는 바야흐로 14, 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롯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처럼 흰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며 동작이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징이 온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심한 한설(寒雪)을 만났으니 앞으로 오셔서 불을 쬐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은 "서쪽으로 현(縣)에 가려면 길이 아직 머니 여기서 좀 재워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유

 부모는 말했다. "누추한 집안이라도 관계치 않으신다면 감히 명을 받겠습니다."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침구를 폈다. 그 처녀는 손님이 묵는 것을 보자 얼굴을 닦고 곱게 단장을 하고는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조용하고 품위가 있는 태도는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나았다. 신도징이 말했다. "소낭자(小娘子)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아직 미혼이면 감히 혼인하기를 청하니 어떠하오."

 그 아버지가 말했다. "기약치 않는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하고 타고 온 말에 여자를 태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임지에 이르러 보니 봉록이 매우 적었으나 아내는 힘써 집안 살림을 돌보았으므로 모두 마음에 즐거운 일 뿐이었다. 그 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1남1녀를 두었는데 또한 총명하고 슬기로워 그는 아내를 더욱 공경하고 사랑했다.

일찍이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했다.

 

한 번 벼슬하니 매복(梅福)이 부끄럽고,

3년이 지나니 맹광(孟光)이 부끄럽구나.

이 정을 어디다 비길까,

냇물 위에 원앙새 떠 있구나.

 

 그의 아내는 종일 이 시를 읊어 속으로 화답하는 것 같았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아내는 문득 슬퍼하면서 말했다. "요전에 주신 시 한 편에 화답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읊었다.

 

금슬(琴瑟)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도다.

시절이 변할까 항상 걱정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허물하도다.

 

 드디어 함께 그 여자의 집에 갔더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아내는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종일토록 울었다.  문득 벽 모퉁이에 한 장의 호피(虎皮)가 있는 것을 보고 아내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구나." 마침내 그것을 뒤집어쓰니 곧 변하여 범이 되었는데, 어흥거리며 할퀴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도징이 놀라서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아! 신도징(申屠澄)과 김현(金現) 두 사람이 짐승과 접했을 때 그것이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똑같다. 그러나 신도징의 범은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주고 으르렁거리고 할퀴면서 달아난 것이 김현의 범과 다르다. 김현의 범은 부득이 사람을 상하게 했지만 좋은 약방문을 가르쳐 줌으로써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그와 같은데, 지금 사람으로서도 짐승만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이 사적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외쳐 악을 징계하려 하자 스스로 이를 대신했으며, 신효한 약방문을 전함으로써 사람을 구하고 절을 지어 불계(佛戒)를 강론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짐승의 본성이 어질기 때문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었던 까닭에 김현공(金現公)이 능히 탑을 돌기에 정성을 다한 것에 감응하여 명익(冥益)을 갚고자 했을 뿐이다. 그 때에 복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찬(讚)해 말한다.

산가(山家)의 세 오라비 죄악이 많아,

고운 입에 한 번 승낙 어떻게 할까.

의리의 중함 몇 가지니 죽음은 가벼운데,

숲속에서 맡긴 몸 낙화(落花)처럼 져 갔도다.

 

 

 

 

 

 

 

 

 

 

 

 

 

 

 

 




融天師彗星歌 眞平王代

 第五居烈郞 第六實處郞 (一作突處郞) 第七寶同郞等 三花之徒 欲遊楓岳 有彗星犯心大星 郞徒疑之欲罷其行 時天師作歌歌之 星恠卽滅 日本兵還國 反成福慶 大王歡喜 遺郞遊岳焉 歌曰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鳥隱城叱肹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

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獎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比所音叱彗叱兄有叱故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제5 거열랑, 제6 실처랑 (혹은 돌처랑), 제7 보동랑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風岳)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였다. 낭도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그 여행을 중지하려고 했다. 이때에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은 즉시 사라지고 일본(日本) 군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낭도(郎徒)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으니, 노래는 이렇다.

 

 

옛날 동해(東海)가에

건달파가 놀던 성[蜃氣樓]을 바라고,

'왜군(倭軍)이 왔다'고 봉화를 들게 한

 변방이 있어라.

 

 

 

세 화랑의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쓸 별을 바라보고

'혜성(慧星)이여' 하고 말한 사람 있구나.

 

아아, 달은 저 아래로 떠갔거니,

보아라, 무슨 혜성(慧星)이 있으랴.

 

 

 















信忠掛冠 

孝成王潛邸時 與賢士信忠 圍碁於宮庭栢樹下 嘗謂曰 他日若忘卿 有如栢樹 信忠興拜 融數月 王卽位賞功臣 忘忠而不第之 忠怨而作歌 岾於栢樹 樹忽黃悴 王恠使審之 得歌獻之 大驚曰 萬機鞅掌 幾忘乎角弓 乃召之賜爵祿 栢樹乃蘇 歌曰

 

 

物叱好支栢史 

秋祭戶不冬爾屋支隨米    汝於多支行薺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兒史沙叱望阿乃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後句亡 由是寵現於兩朝 景德王 (王卽孝成之弟也 ) 二十二年癸卯 忠與二友相約 掛冠入南岳 再徵不就 落髮爲沙門 爲王創斷俗寺居焉 願終身立壑 以泰福大王 王許之 留眞在金堂後壁是也

 

南有村名俗休 今訛云小花里 (按三和尙傳 有信忠奉聖寺 與此相混 然計其神文之世 距景德已百餘年 況神文與信忠乃宿世之事 즉非此信忠明矣 宜詳之) 又別記云 景德王代 有直長李俊(高僧傳作李純) 早曾發願 年至知命 須出家創佛寺 天寶七年戊子 年登五十矣 改創槽淵小寺爲大刹 名斷俗寺 身亦削髮 法名孔宏長老 住寺二十年乃卒

與前三國史所載不同 兩存之闕疑 讚曰

 

 功名未已鬚先霜

 君寵雖多百歲忙

 隆岸有山頻入夢

 逝將香火祝吾皇

 

 

 

 

 

신충괘관

효성왕이 잠저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궁정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일찍이 말하기를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하니 신충이 일어나서 절했다. 몇 달 뒤에 효성왕이 왕위에 올라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얻어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정무(政務)가 복잡하고 바빠 각궁(角弓)을 거의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야 다시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믈흿 자

 안 이우리디매

너 엇뎨 니저 이신

울월던 치 겨샤온

 

 그림제 녯 모샛

녈 믌결 애와티

 라나

 누리 모 갓 여온 여

 

후구(後句)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에 대한 총애는 양조(兩朝)에 두터웠다.

경덕왕( 왕은 곧 효성왕의 아우임) 22년 계묘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는데,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면서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의 진영(眞影)을 모셔두었는데 금당 뒷벽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라고 한다(삼화상전을 살펴보면 신충봉성사가 있는데 이것과 서로 혼동된다. 따져보면 신문왕 때는 경덕왕과 100여 년이나 되는데,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숙세의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이 신충이 아님이 명백하다. 자세히 살펴야 할 일이다).

또 별기에는 이러하다.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 (고승전에는 이순이라고 하였다.)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중이 되어 절을 세우게 되리라 했다. 천보 7년 무자에 50세가 되자 조연소사를 고쳐지어 큰 절을 만들고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했다. 이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다 실어 의심나는 점을 덜고자 한다.

찬(讚)해 말한다.

 

공명은 다하지 못했는데 귀밑털이 먼저 세고,

임금의 총애 비록 많으나 한평생이 바쁘도다.

언덕 저 편 산이 자주 꿈속에 드니,

가서 향화(香火)를 피워 왕의 복을 비오리라.

 

 

 

 

 

 

 






















永才遇賊

釋永才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暮歲將隱于南岳 至大峴嶺 遇賊六十餘人 將加害 才臨刃無懼色 怡然當之 賊怪而問其名 曰永才 賊素聞其名 乃命□□□作歌 其辭曰

 

自矣心米 

兒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鳥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主

次弗□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

好尸曰沙也內乎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㵛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賊感其意 贈之綾二端 才笑而前謝曰 知財賄之爲地獄根本 將避於窮山 以錢一生 何敢受焉 乃投之地 賊又感其言 皆釋劒投果 落髮爲徒 同隱智異 不復蹈世 才年僅九十矣 在元聖大王之世 讚曰

 

  策杖歸山意轉深

  綺紈珠玉豈治心

  綠林君子休相贈

  地獄無根只寸金

 

 

 

 

영재우적(永才遇賊)

중 영재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를 잘했다. 만년에 장차 남악에 은거하려고 대현령에 이르렀을 때 도둑 60여 명을 만났다. 도둑들이 그를 해치려 했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 섰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화기롭게 대하였다. 도둑들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대답했다. 도둑들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명하여 □□□노래를 짓게 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제 마음에

형상(形相)을 모르려던 날,

멀리 □□ 지나치고

이제란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破戒主)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돌아가리?

 

이 칼날이 지나고 나면

좋을 날이 오리니,

아아, 오직 요만한 선(善)은

아니 새 집이 되니이다..

 

 

도둑들은 그 노래에 감동되어 비단 2필을 그에게 주니 영재는 웃으면서 사양하여 말했다.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장차 궁벽한 산중으로 피해 가서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이에 땅에 던지니 도둑들은 다시 그 말에 감동되어 가졌던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깍고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90살이었으니 원성대왕의 시대이다.

찬(讚)해 말한다.

 

지팡이 짚고 산으로 돌아가니 뜻이 한결 깊은데,

비단 구슬이 어찌 마음 다스리랴.

녹림의 군자들아 그런 것 주지 말라.

지옥은 다름 아닌 재물이 근원이네.

 

 

 

  勿 稽 子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 古自國(今固城) 史勿國(今泗州) 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 將軍一伐等 率兵拒之 八國皆降 時勿稽子軍功第一 然爲太子所嫌不賞其功 或謂勿稽曰 此戰之功 唯子而已 而賞不及子 太子之嫌君其怨乎 稽曰 國君在上 何怨人臣 或曰 然則奏聞于王幸矣 稽曰 伐功爭命 揚己掩人 志士之所不爲也 勵之待時而已

十年乙未 骨浦國今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 (疑屈弗也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稽所獲數十級 而人不言稽之功 稽謂其妻曰 吾聞仕君之道 見危致命 臨難忘身 仗於節義 不顧死生之謂忠也 夫保羅(疑發羅 今羅州) 竭火之役 誠是國之難 君之危 而吾未會有忘身致命之勇 此乃不忠甚也 旣以不忠而仕君 累及於先人 可謂孝乎 旣失忠孝 何顔復遊朝市之中乎 乃被髮荷琴 入師彘山(未詳) 悲竹樹之性病 寄托作歌 擬溪澗之咽響 扣琴制曲 隱居不復現世

 

물계자(勿稽子)

제 10대 내해왕이 즉위한 지 17년 임진에 보라국ㆍ고자국; 지금의 固城)ㆍ사물국(史勿國; 지금의 泗州)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해서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은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의 군공이 제일이었다. 그러나 태자에게 미움을 받아 그 상을 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이번 싸움의 공은 오직 당신뿐인데, 상은 당신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태자가 그대를 미워함을 그대는 원망하는가"하고 묻자, 물계자는 대답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위에 계신데 인신(人臣)인 태자를 어찌 원망하겠소"하니 그 사람이 "그렇다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는 것이 옳지 않겠소"하니, 그는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다투며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가리는 것은 지사의 할 바가 아니오. 힘써 때를 기다릴 뿐이오"하였다.

 

10년 을미에 골포국(지금의 合浦)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屈弗인 듯하니 지금의 蔚州)를 침범하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했다. 물계자가 죽인 적병이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말하지 않았다. 물계자는 그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들으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환란을 당해서는 몸을 잊어버리며, 절의를 지켜 사생을 돌보지 않는 것을 충이라 하였소. 보라(發羅인 듯하니 지금의 羅州)와 갈화의 싸움은 진실로 나라의 환란이었고 임금의 위태로움이었소. 그러나 나는 일찍이 자기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용맹이 없었으니 이것은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오. 이미 불충으로써 임금을 섬겨 그 누(累)가 아버님께 미쳤으니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소." 이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메고서 사체산(師彘山; 未詳)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대나무의 곧은 성벽(性癖)을 슬퍼하고 그것에 비유하여 노래를 짓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비겨서 거문고를 타고 곡조를 짓고 하였다. 그 곳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

牟粱里(一作浮雲村) 之貧女慶祖有兒 頭大頂平如城 因名大城 家窘不能生育 因役傭於貨殖福安家 其家俵田數畝 以備衣食之資 時有開土漸開 欲設六輪會於興輪寺 勸化至福安家 安施布五十疋 開呪願曰 檀越好布施 天神常護持 施一得萬倍 安樂壽命長 大城聞之 跳跟而入 謂其母曰 予聽門僧誦倡 云施一得萬倍 念我定無宿善 今玆因匱矣 今又不施 來世益艱 施我傭田於法會 以圖後報何如 母曰善 乃施田於開

未幾城物故 是日夜 國宰金文亮家 有天唱云 牟梁里大城兒 今託汝家 家人震驚 使檢牟梁里 城果亡 其日與唱同時 有娠生兒 左手握不發 七日乃開 有金簡子彫大城二字 又以名之 迎其母於第中兼養之

旣壯 好遊獵 一日登吐含山 捕一熊 宿山下村 夢熊變爲鬼 訟曰 汝何殺我 我還啖汝 城怖懅請容赦 鬼曰 能爲我創佛寺乎 城誓之曰喏 旣覺 汗流被蓐

自後禁原野 爲熊創長壽寺於其捕地 因而情有所感 悲願增篤 乃爲現生二親 創佛國寺 爲前世爺孃創石佛寺 請神琳表訓二聖師各住焉 茂張像設 且

酬鞠養之勞 以一身孝二世父母 古赤罕聞 善施之驗 可不信乎

將彫石佛也 欲鍊一大石爲龕盖 石忽三裂 憤恚而假寐 夜中天神來降 畢造而還 城方枕起 走跋南嶺爇香木 以供天神 故名其地爲香嶺

 其佛國寺雲梯石塔 彫鏤石木之功 東部諸刹未有加也

古鄕傳所載如上 而寺中有記云 景德王代 大相大城以天寶十年辛卯始創佛國寺 歷惠恭世 以大歷九年甲寅十二月二十大城卒 國家乃畢成之 初請瑜伽大德降?住此寺 繼之至于今 與古傳不同 未詳孰是 讚曰

牟梁春後施三畝 

香嶺秋來獲萬金 

萱室百年貧富貴 

槐庭一夢去來今 

 

 

 

 

 

 대성효2세부모 신문왕대 

모량리(牟梁里; 혹은 浮雲村)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리가 평평하여 성(城)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했다. 집이 군색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약간의 밭을 얻어 의식의 자료로 삼았다. 이때 개사(開士) 점개(漸開)가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興輪寺)에서 배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가서 보시(布施)할 것을 권하니, 복안은 베 50필을 보시하므로 점개는 주문(呪文)을 읽어 축원했다. "단월(檀越)이 보시(布施)하기를 좋아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지켜 주실 것이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게 되는 것이니 안락하고 수명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대성이 듣고 뛰어 들어가 그 어미에게 말했다. "제가 문간에 온 스님이 외는 소리를 들었는데 한 가지를 보시하면 1만 배를 얻는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저는 숙선(宿善)이 없어 지금 와서 곤궁한 것이니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來世)에는 더욱 구차할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法會)에 보시해서 뒷날의 응보(應報)를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므로, 이에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성은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밤 국상(國相)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지금 네 집에 태어날 것이다." 집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하게 하니, 대성(大城)이 과연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외치던 때와 같았다. 김문량의 아내는 임신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왼손을 꼭 쥐고 있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大城) 두 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가 있었으므로 다시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그 어미를 집에 모셔 와서 함께 봉양했다.

이미 장성하자 사냥하기를 좋아하더니 어느날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변해서 귀신이 되어 시비를 걸며 말했다. "네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환생하여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서 용서해 달라고 청하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하여 절을 세워 주겠느냐"하고 말했다. 대성은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꿈을 깨자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그 후로는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금하고 곰을 잡은 자리에 곰을 위해서 장수사를 세웠다. 그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 있어 자비의 원(願)이 더욱 더해 갔다. 이에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세우고, 신림(神琳)ㆍ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각각 살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설치하여 부모의 양육한 수고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전세와 현세의 두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또한 드문 일이었다. 그러니 착한 보시의 영험을 가히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石佛)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龕蓋)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고개로 급히 달려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을 향령(香嶺)이라고 했다.

 

불국사의 운제(雲梯)와 석탑은 돌과 나무에 조각한 기공(技工)이 동도(東都)의 여러 절 가운데서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옛 향전(鄕傳)에 실려 있는 것은 이상과 같다. 그러나 절 안의 기록에는 이렇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대상(大相)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 신묘(辛卯)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왕(惠恭王) 때를 거쳐 대력(大歷) 9년 갑인(甲寅)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이를 완성시켰다. 처음에 유가교(瑜跏敎)의 고승(高僧) 항마(降魔)를 청해다가 이 절에 거주하게 했고 이를 계승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렇게 고전(古傳)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모량(牟梁)에 봄이 지니 삼무(三畝)의 밭을 보시하고,

향령(香嶺)에 가을이 오니 만금(萬金)을 거두었다.

어머니는 백 년 사이 가난과 부귀(富貴)를 겪었는데,

귀정(槐庭)은 한 꿈 사이에 이세(二世)를 오갔구나.

 

 

 

 

 

 

 








向得舍知割股供親 景德王代

能(熊)川州有向得舍知者 年凶 其父幾於餒死 向得創股以給養 州人具事奏聞 景德王賞賜租五百碩

향득사지 할고공친(割股供親) 경덕왕대

웅천주(熊川州)에 향득(向得)이란 사지(舍知)가 있었다. 흉년이 들어 그 아버지가 거의 굶어 죽게 되자 항득은 다리의 살을 베어 봉양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자세히 상주(上奏)하자 경덕왕(景德王)은 곡식 500석을 상으로 하사했다.

孫順埋兒 興德王代

孫順者 (古本作孫順) 牟梁里人 父鶴山 父沒 與妻同但傳人家 得米穀 養考孃 孃名運烏 順有小兒 每奪孃食 順難之 謂其妻曰 兒可得 母難再求 而奪其食 母飢何甚 且埋比兒 以圖母腹之盈 乃負兒歸醉山(山在牟梁西北) 北郊 堀地忽得石鐘 甚奇 夫婦驚怪 乍懸林木上 試擊之 舂容可愛 妻曰 得異物 殆兒之福 不可埋也 夫亦以爲然 乃負兒與鐘而還家 懸鐘於梁扣之 聲聞于闕 興德王聞之 謂左右曰 西郊有異鐘聲 淸遠不類 速檢之 王人來檢其家 具事秦王 王曰 昔郭巨瘞子 天賜金釜 今孫順埋兒 地湧石鐘 前孝後孝 覆載同鑑 乃賜屋一區 歲給粳五十碩 以尙純孝焉 順捨舊居爲寺 號弘孝寺 安置石鐘 眞聖王代 百濟橫賊入其里 鐘亡寺存 其得鐘之地 名完乎坪 今訛云枝良坪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손순(孫順; 고본古本에는 손순孫舜이라고 했다)은 모량리(牟梁里) 사림이니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이산은 모량리牟梁里 서북쪽에 있다)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石鐘)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前世)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貧 女 養 母

孝宗郞遊南山鮑石亭 或云三花述 門客星馳 有二客獨後 郞問其故 曰 芬皇寺之東里有女 年二十左右 抱盲母相號而哭 問同里 曰 此女家貧 乞啜而反哺有年矣 適歲荒 倚門難以藉手 贖賃他家 得穀三十石 奇置大家服役

日暮橐米而來家 炊餉伴宿 晨則歸役大家 如是者數日衣 母曰 昔日之糠枇 心和且平 近日之香秔 膈肝若刺 而心未安 何哉 女言其實 母痛哭 女嘆己之但能口腹之養 而失於色難也 故相持而泣 見此而遲留爾 郞聞之潛然 送穀一百斛 郞之二親亦送衣袴一襲 郞之千徒 斂租一千石遺之 事達辰聰 侍眞聖王賜穀五百石 幷宅一廛 遣卒徒衛其家 以儆劫掠 旌其坊爲孝養之里 後捨其家爲寺 名兩尊寺

 

빈녀양모(貧女養母)

효종랑(孝宗郞)이 남산(南山) 포석정(포石亭; 혹은 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했다)에서 놀고자 하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여인이 있는데 나이는 20세 안팎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어머니를 껴안고 서로 통곡하므로 같은 마을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해서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한 지가 이제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해다가 살리기도 어렵게 되어 이에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곡식 30석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해왔습니다.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 먹고 어머니와 같이 잠을 자고, 새벽이면 주인 집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전일에 강비(糠粃)를 먹을 때는 마음이 편하더니 요새 쌀밥을 먹으니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는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을 하고 색난(色難)을 하지 못함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효종랑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해하여 곡식 100석을 보냈다. 낭의 부모도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수많은 낭(郎)의 무리들도 곡식 1,000석을 거두어 보내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 때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 주고 또 군사들을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해서 도둑을 막도록 했다. 또 그 마을을 표창해서 효양리(孝養里)라 했다. 그 뒤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 했다.

 














(史記. 권41.列傳 제1. 김유신 상)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祖武力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 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初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妁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赴萬弩郡

舒玄庚辰之夜夢 熒〔惑 據顯宗本〕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夢 見童子衣金甲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況古之賢人有名庾信 蓋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陁炤娘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噬手指 歃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 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蓋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非庸人也 今來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

王欲橫問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相飮 酒酣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 言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黙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本大國地分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逭死耳

(此與本言眞平王十二年所書〔眞平王十二年 亦當作善德王十一年; 據 新羅本紀〕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김유신 상)

 

 김유신(金庾信)은 서울 사람이었다. 그 12대 할아버지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에 이르렀다. [구해는] 혹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유신의 증조(曾祖)이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하였으니, 남가야의 시조 수로와 신라는 같은 성씨였다.

 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官)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聖王]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량주[지금 陜川]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서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은 자(字)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지금 충북 鎭川] 태수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이 문간을 때리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없었다.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드디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서현이 경진일 밤에 형혹성[或은 顯宗本에 의하면 惑; 火星]과 진성[土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임신하여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다. 때는 진평왕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595]였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

“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그러나 예기에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 유신(庾信)이라고 이름 지은 이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짓지 아니하랴?”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의 진주(鎭州)[현재의 충북 鎭川]이다. 처음 유신의 태를 고산(高山)에 묻었으므로 지금까지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선덕대왕 11년 임[642]에, 백제가 대량주[陜川]를 격파하였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공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이다. 지금 내가 만약 저 곳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유신이 말하였다.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후에 유신은 압량주[慶山] 군주(軍主)가 되었다. 춘추가 훈신(訓信) 사간(沙干) 과 함께 고구려에 예방하러 갈 때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두사지(豆斯支) 사간이 청포(靑布) 300보(步)를 주었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왕[寶藏王]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 蓋蘇文]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식사 대접을 특별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구려왕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 같으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고구려] 왕은 무리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그를 욕보이게 하려고 말하였다.

 “마목현[聞慶]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춘추가 대답하였다.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좇을 수 없습니다.”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미처 처형하지 않았는데, 춘추가 청포 300보를 은밀히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차려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얼근히 올랐을 때 도해가 농담조로 말하였다.

 “그대도 또한 일찍이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들었는가? 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토끼 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어 ‘제가 그것을 얻어 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가기만 하면 편히 살아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간이 약이 된다고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 하였다. 토끼가 말하기를 ‘허허!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와서 간이 아직도 그 곳에 있으니, 어찌 되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편이 다 좋은 일이 아닌가?’ 하였다.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다. 겨우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다.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을 것이냐?’ 하니, 거북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월을 보내 말하였다.

 “두 영(嶺)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 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감한 군사 3천 명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사람을 당해 내며,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으니 그러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두렵다고 하여 어려움을 당해 내지 않을 것인가?”

 이에 뭇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 곳에 가더라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하여 군사 출동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 간첩 승려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를 [고구려] 왕에게 아뢰었다. [고구려] 왕은 이미 춘추의 맹서하는 약속을 받았고, 또 간첩의 말을 들었으므로 [춘추를] 더 잡아 둘 수가 없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제에 대한 유감을 풀고자 하여 군대를 청하러 왔다가 대왕께서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니 이는 신하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엊그제 대왕에게 서신을 올린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뜻이었을 뿐이다.”

[이는 본기(本記)에서 진평왕 12년에 쓴 것과 같은 사건이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가 고기(古記)의 전하는 바이므로 두 가지를 모두 남겨 둔다.]

 

 

 

 

 










三國史記 卷44 列傳 第4 乙支文德

 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中〔開皇 當作大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則執之 仲文等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  紿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 述與仲文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羣議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陳而行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乙支文德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의 선대의 계보를 알 수 없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겸하여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 수나라 개황[大業8년; 嬰陽王23년, 612] 연간에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에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隋代에 처음 설치된 황제의 친위부대의 하나. 이에는 좌익위와 우익위가 있었다. 翊衛는 護衛라는 뜻] 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와서 아홉 개의 군부대와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을지]문덕(文德)이 왕명을 받아 그 진영에 나가 거짓 항복하니, 사실은 그 허실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에 앞서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 하였다. [우]중문 등이 억류해두려 하였는데,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였는데 굳이 말리므로, 그만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곧 바로 뉘우쳐 사람을 보내 “더 의논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을지]문덕을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돌아 왔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놓치고서는 속으로 불안해 하였다. [우문]술은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였고, [우]중문은 정예 부대로써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다. [우문]술이 말리자 [우]중문이 성을 내며 “장군이 10만 병력을 가지고 능히 이 작은 적을 무찌르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뵙겠는가?” 하였다. 이에 [우문]술 등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압록강을 건너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피로케 하고자 하여 싸움마다 문득 패하니, [우문]술 등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다 이겼다. 이미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또 중의(衆議)에 몰리어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薩水: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까지 30리 되는 지점에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신통스런 계책은 천문을 뚫었고, 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한 줄 알았거든 그만두세나.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달래었다. [을지]문덕이 또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고, [우문]술에게 “군사를 돌려 가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직접 뵙겠다.”고 하였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로하고 고달파함을 보고 더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단단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움을 알고는 마침내 그 거짓 [항복을] 받은 것을 핑계 삼아 돌아가는데 방진(方陣)으로 편성하여 행군하였다. [을지]문덕이 군사를 내어 사면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행군하였다.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이 군사를 전진시켜 그 후미를 공격하여 우둔위(右屯衛)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죽였다. 이에 모든 부대가 함께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홉 부대의 장군과 병사가 달아나 돌아감에 하루낮 하루밤에 압록수에 도달하였으니, 450리를 걸었다. 처음 요하를 건넜을 때에는 아홉 부대의 군대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遼陽]에 되돌아 간 자는 겨우 2천7백 명이었다.

논하여 말한다. 양제(煬帝)가 요동 전쟁에 보낸 군대는 이전에 유례없이 많았다. 고구려는 한 귀퉁이의 작은 나라로서 능히 이를 막아내어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다 섬멸한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능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으랴?』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黑齒常之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 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斬降 入唐爲左領軍員外將軍徉州刺史〔徉 唐書作洋〕 累從征伐 積功授爵 賞殊等 久之爲燕然道大摠管 與李多祚等擊突厥破之

 

 

 

 

 

 

左監門衛中郞將寶璧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 寶璧獨進 爲虜所覆 擧軍沒 寶璧下吏誅 常之坐無功 會 周興等誣其與鷹揚將軍趙懷節叛 捕繫詔獄 投繯死 常之御下有恩 所乘馬爲士所箠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馬鞭官兵乎 前後賞賜分麾下無留貲 及死 人皆哀其枉

黑齒常之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 키가 일곱 척이 넘었고 날쌔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 백제의 달솔[백제시대의 관등. 16관등의 하나로서 2품 관등으로 정원은 30인]이 되어 풍달군[백제의 發羅郡으로 생각되며 현재의 전남 나주로 비정] 군장[군의 행정 및 군사를 담당한 장관. 본서 권40 직관지에 方 아래 郡이 있고 그 책임자가 ‘將’이다.]을 겸하였다. 군장은 당나라의 자사[당나라 때의 州의 행정을 담당한 長官]와 같다고 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할 때에 상지(常之)가 거느린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다. 그런데 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자 상지가 두려워하여 좌우(左右)의 우두머리 10여 인과 함께 달아나, 잡혔다가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임존산(任存山;현재의 예산군 大興면 상중리의 봉수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매, 열흘이 채 안 지나 합세하는 사람이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상지가] 드디어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용삭(龍朔; 당나라 고종대의 연호) 연간에 고종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자, 이에 상지는 유인궤(劉仁軌)에게 나가 항복하였다.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左領軍) 원외장군(員外將軍) 양주자사(洋州刺史;沙洋州刺史의 잘못임이 흑치상지의 묘지명을 통하여 밝혀졌다. 洋州는 중국 陝西省 西鄕縣)가 되었으며, 여러 번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워 벼슬과 상을 특별하게 받았다. 오랜 후[《舊唐書》 권109 黑齒常之傳에는 이 시기가 垂拱 3년(687)으로 기록되어 있다.]에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燕然은 돌궐족이 살고 있던 지역. 대총관은 총지휘관.)이 되어, 이다조(李多祚) 등과 함께 돌궐(突厥)을 쳐서 격파하였다.

 좌감문위(左監門衛;都城門을 지키는 직책) 중랑장(中郞將) 보벽(寶璧)이 끝까지 돌궐을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자 조서를 내리어 상지와 함께 치게 하였다. [그러나] 보벽은 혼자 진격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전군이 함락되었다. 보벽은 옥리(獄吏)에게 넘겨져 목을 베였고, 상지도 연루되어 공이 없어지게 되었다. 마침 주흥(周興; 당나라의 酷吏로 수천 명을 마구 죽였다) 등이, 그가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고 모함하여, 그는 옥에 잡혀 갇혔다가 교수형(絞首刑)을 당하였다. 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 은혜가 있었다. 그가 타던 말이 병사들에게 매질을 당하였을 때, 어떤 사람[《舊唐書》 권109 흑치상지전에는 副使 牛師奬등이 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이 그 자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사사로운 말로 인하여 관병을 때리겠느냐.” 하였다. 여러 차례 받은 상품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긴 재물이 없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張保皐 ․鄭年

張保皐(羅紀作弓福) 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行 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皐差不及也 年以兄呼保皐 保皐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皐還國 謁大王曰 遍中國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皐萬人 此後海上無鬻鄕人者 保皐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氷縣〔氷 當作水〕 一日 言於戌將馮元規曰 我欲東歸乞食於張保皐 元規曰

 

若與保皐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保皐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皐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誅叛者立王 王召保皐爲相 以年代守淸海 (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故 兩存之)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 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睇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趍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難也 忿必見短 知其材益難也

 

此保皐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皐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皐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皐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出於千子 㰌於保皐〔㰌 文苑英華作權〕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與雜情並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廿[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祁曰 嗟乎不以怨毒相甚〔甚 當作惎〕 而先國家之憂 晉有祁奚 唐有汾陽 保皐 孰謂夷無人哉

 

 

 

張保皐 ․鄭年

 張保皐(신라 본기에는 弓福으로 썼다.; ?∼846. 전남 莞島 출신. 원래 이름은 ‘활보’로 이는 활 잘 쏘는 아이라는 뜻이며, 한자 표현으로는 ‘弓福’ 또는 ‘弓把’라고 하였다.)와 鄭年(年은 連으로 쓰기도 했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특히 바다 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武寧軍小將[武寧縣은 중국 徐州의 한 현으로 지금의 江蘇省 錦山縣. 武寧軍武은 寧縣의 軍. 小將은 하급장교]이 되어[이 무렵 張이란 姓을 취하고 이름을 保皐로 개칭하였다.]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興德王]을 뵙고 아뢰었다.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 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었다. 그 후 해상(海上)에서 우리나라 사람[鄕人]을 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가 이미 귀하게 되었을 때에 [정]년은 [당나라에서]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泗水[淮水의 一支流. 泗河라고도 함. 여기서는 郡名으로 현재 중국 江南의 徐州]의 漣水縣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고 말하니, 원규가 말하였다.

 

“그대와 [장]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정]년(年)은 말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느니만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에 비하랴?”

 마침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찾아 뵈니 술을 대접하며 극히 환대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신라 43대 僖康王(재위 836∼838)이 金明·利弘 등에 의해 시해된 것을 의미한다.]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군사를 나누어 5천 명을 [정]년(年)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金祐徵을 神武王으로 즉위시킨 것을 가리킨다.] 신무왕은 즉위하자 淸海鎭大使弓福을 感義軍使에 책봉하였다. 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傳記[고려 초에 편찬된 《舊三國史》의 전기를 지칭한 듯]와는 대단히 다르나 杜牧이 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張保皐는 신무왕을 옹립한 공로로 感義軍使에 봉해진 일은 있으나 王都에 와서 宰相이 된 일은 없다. 그러므로 鄭年이 그 대신 淸海鎭을 鎭守했다는 기사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

 

 논컨대, 杜牧이 말하기를,

“天寶[唐 玄宗대의 연호] 연간, 安祿山의 亂에 朔方節度使 安思順이 祿山의 從弟인 까닭으로 해서 賜死되고, 조서를 내려 郭汾陽[당나라 무장. 본명은 子儀. 자도 子儀이다.  史思明의 난을 진압하는 군공으로 762년 汾陽郡王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郭汾陽으로 별칭되었다. 관직은 中書令에 이르렀고 덕종 때에는 尙父라는 칭호를 받았다.]으로 대신케 하였는데, 열흘 만에 다시 李臨淮[당나라 무장. 본명은 光弼. 그의 선대는 거란인이었다. 安祿山의 난 때에 郭子儀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 史思明의 난에 공을 세워 臨淮郡王에 봉해졌으므로 李臨淮라 별칭되었다. 臨淮郡은 현재 중국 安徽省 泗縣 동남지방이다. 그는 평소에 곽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국난을 처리하기 위하여는 합심하였다.]에게 조서를 내려 符節을 가지고 朔方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으로 趙[山西省 趙城縣 일대]·魏[山西省 夏縣 일대]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안사순이 [절도사로 있었던] 때에는 [곽]분양과 임회가 모두 牙門都將[행군시의 앞에 세우는 큰 장군기를 牙旗라 하고 아기를 세운 군영을 牙門이라 한다. 都將이라 함은 총대장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문도장은 출정에 나선 군영의 대장이라는 뜻이다.]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사이가 나빠서, 함께 한 상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곽]분양이 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때] 임회에게 詔書를 내리어 [곽]분양으로부터 병력을 절반 나누어 받아 동쪽으로 나가 토벌하게 하니, 임회가 [곽]분양에게 가서 ‘내 한 죽음은 달게 받겠으니 처자나 살려 주시오.’라고 청하였다. [곽]분양이 달려 내려가 [임회의] 손을 잡고 마루 위로 올라와 마주앉아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忿恨을 품을 때이겠소.’라고 말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忠義로써 격려하였으니, 큰 도둑을 평정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또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후에야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분한을 쌓아 왔으니 그 마음 알기가 어렵고, 분노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단점만 보이는 것이니 그 재능을 인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 [장]보고와 [곽]분양의 어짊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정]년(年)이 [장]보고에게로 투탁할 때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추면 예전의 원한을 가지고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장]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람의 常情이다. 임회가 [곽]분양에게 죽임을 청한 것도 또한 사람의 상정이었다. 또 [장]보고가 [정]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신이 결정한 것이며, [정]년은 또 추위와 굶주림 속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 쉬운 일이었고, [곽]분양과 임회는 평생을 대립하였지만, 임회에 대한 명은 천자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니, 장보고에 비하면 [곽]분양이 [결단하기가] 더 용이하였다. 이런 상황은 성현도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일을 이루거나 그르치는 분기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착하고 의로운 마음[仁義]이 雜情과 함께 섞이어, 잡정이 많아 이기면 인의가 없어지고, 인의가 많아 이기면 잡정이 사그라진다. 저 두 사람은 인의가 마음을 이미 주도하였고, 여기에 다시 자질이 밝았기 때문에 마침내 공을 이룬 것이다. 세간에서는 周公[周나라 文王의 아들 , 武王의 아우, 이름은 旦.]·召公 [周公의 아우. 이름은 奭.]을 백대의 스승으로 일컫고 있지만, 주공이 어린아이[주나라 제2대 왕 成王]를 보좌할 때에는 소공도 의심하였다.

 

주공의 거룩함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 文王을 섬기고 늙어서 武王을 도와 능히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밝은 자질이 아니면 비록 소공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에 있어서랴? 속담에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저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이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할 것이다.”

 

 

 

송기(宋祁; 북송의 학자. 史館 修撰으로서 구양수 등과 함께 《新唐書》를 편찬하였다)가 썼다.

“아아! 원한으로써 서로 질투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앞세운 경우로는 晉나라에 기해[祁奚; 春秋시대 晉의 大夫.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나라에 봉사하였는데, 그가 물러갈 때 悼公이 후임자를 물으니 자기와 원수 사이이던 解狐를 천거한 것이 훌륭한 일로 전한다.]가 있었고, 당(唐)나라에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다.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史記. 권45. 列傳   제5. 溫達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𣈑���然(𣈑��� 恐作曄)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春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初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侯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其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祭天及山川神 至其日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問姓名 驚且異之 時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失所中 路而死(路 趙炳舜本作踣)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溫達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제25대 平原王) 때의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龍鍾’은 노쇠하여 행동이 완만하거나 추레한 모습이다.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을 신고 저자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로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왕은 매양 그렇게 말하였는데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上部 高氏[고구려 5部 중 上部 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여 말했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지존하신 분께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헛된 말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네가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으니 어찌 함께 있을 수가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善花公主가 薯童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과 함께 쫓겨난 여인 發福說話의 하나,]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할멈이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에서]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그에게 마음 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분명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어머니와 아들에게 상세히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되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에 금팔찌를 팔아 농토와 집, 노비, 우마와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는 온달에게 말하였다.

 “아예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 말고 꼭 국가의 말을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매우 부지런히 먹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樂浪의 언덕에 [나라 사람들이]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은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後周[北周]의 武帝가 군사를 보내 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공을 논할 때에 온달을 제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大兄[14관등 중 제7위]을 삼았다. 이로 해서 은총과 영화가 더욱 많아졌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嬰陽王[양강왕은 평강왕의 아버지인 고구려 제14대 왕인 陽原王[『或云陽崗上好王』)을 가리키므로 그 아들인 제26대 嬰陽王(또는 平陽王)의 착오로 보인다] 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鳥嶺(새재) 동북쪽의 고개인데, 현재로는 통행로로 사용되지 않는다. 일명 鷄立嶺이다)과 죽령(竹嶺) 이서(以西)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현재의 충북 단양군 영춘면. 지명상으로 阿旦城은 신라 溟州 奈城郡 子春縣(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옛 지명인 乙阿旦城(일명 온달성)이다. 죽령 북쪽 현재의 충북 丹陽郡 永春面 永春에서 서남 2km 되는 곳에 溫達城이라고 하는 성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온달이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온달성 동북쪽 절벽 아래 溫達窟이라 하는 굴도 있다(조동일, 위의 글, 960쪽). 그러나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진 북쪽 아차산(워커힐 뒷산)으로 견해도 있다. )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흐르는 화살[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였다. 드디어 들어서 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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