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昔新羅爲京師時 有世逵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捺李郡(按地理志 溟州無捺李郡 唯有捺城郡 本捺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捺靈郡 本捺己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捺李郡 未知孰是) 本寺遺(遣)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已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 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信乃顚喜 同歸鄕里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 遂乃落魄 扶携 糊其口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亦不掩體 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 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 夫婦老且病 飢不能興 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婦乃[皺]澁拭涕 倉卒而語曰 予之始遇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鐘莫逆 恩愛稠繆 可謂厚緣 自比年來 衰病歲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 人不容乞 千門之耻 重似丘山 兒寒兒飢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恕飄風 君有我而爲累 我爲君爲足憂 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 君乎予乎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知隻鸞之有鏡 寒弃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進途而形開 殘燈翳吐 夜色將闌 及旦鬢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壓勞生 如飫百年辛苦 貪染之心 洒然氷釋 於是慚對聖容 懺滌無已 歸撥蟹峴所埋兒塚 乃石彌勒也 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 免莊任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 後莫知所終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 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快適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藏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以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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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지금의 興敎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는 날리군捺李郡이 없고 오직 날성군捺城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본래 날생군捺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 영현領縣에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이요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니 여기에 말한 날리군捺李郡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觀音菩薩)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金氏) 낭자(娘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망然)히 세상 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예 관음보살의 상(像)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莊園)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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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대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 錫杖寺 其神異莫測皆類此 旁通雜譽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 天王像 幷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 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 法林二寺額 又嘗彫磚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 以正受所對 爲揉式 故傾城士女爭運泥土 風謠云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土人舂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初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 (或云[改]金時租)
議曰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 隱於末技者也
讚曰 齋罷堂前錫杖閑 靜裝爐鴨自焚檀 殘經讀了無餘事 聊塑圓容合掌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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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셔럽다 의내여 功德 닷라 오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혹은 이 비용이 금빛을 칠할 때 든 것이라고도 한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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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曉不覇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有仍皮公廟 父談捺乃末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娑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娑羅樹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娑羅樹 其樹之實亦異於常 至今稱娑羅栗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娑羅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 本下湘州之人 按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歃良州 則下州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尙州 亦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懷 因而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丑歲也 生而穎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有一二段異事
師嘗一日風顚唱街云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爾 國有大賢 利莫大焉 時瑤石宮(今學院是也)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 俗云牟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遇之 佯墮水中濕衣袴 吏引師於宮 褫衣曬㫰 因留宿焉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十賢中一也 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命名曰無㝵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師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陁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佛日之意爾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言稱之始旦也
曾住芬皇寺 纂華嚴䟽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又嘗因訟 分軀於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經疏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旨也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旣入寂 聰碎遺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 像忽廻顧 至今猶顧矣 曉嘗所居穴寺旁 有聰家之墟云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廻顧至 |
원효불기(元曉不覇)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삽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幢은 우리말로 毛라고 한다)이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賢)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 "일체의 무애인(無애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 무애(無碍) )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어느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분유) 확후(확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서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 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 터가 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
蛇福不言
京師萬善北里有寡女 不夫而孕 旣産 年至十二歲 不語亦不起 因號蛇童 (下或作蛇卜又巴 又伏等 皆言童也) 一日其母死 時元曉住高仙寺 曉見之迎禮 福不答拜而曰 君我昔日駄經牸牛 今已亡矣 偕葬何如 曉曰諾 遂與到家 令曉布薩授戒 臨尸祝曰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福曰 詞煩 更之曰 死生苦兮 二公轝歸活里山東麓 曉曰 葬智惠虎於智惠林中 不亦宜乎
福乃作偈曰
往昔釋迦牟尼佛 裟羅樹間入涅槃 于今亦有如彼者 欲入蓮花藏界寬
言訖拔茅莖 下有世界 晃朗淸虛 七寶欄楯 樓閣莊嚴 殆非人間世 福負尸共入其地 奄然而合 曉乃還 後人爲創寺於金剛山東南 額曰道場寺 每年三月十四日 行占察會爲恒規 福之應世 唯示此爾 俚諺多以荒唐之說託焉 可笑 讚曰
淵黙龍眠豈等閑 臨行一曲沒多般 苦兮生死元非苦 華藏浮休世界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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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불언(蛇福不言)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므로 사동(蛇童; 아래에는 사복蛇卜이라도고 하고, 또 사파蛇巴·사복蛇伏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동蛇童을 말한다)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한다. "그대와 내가 엣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시켜 계(戒)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은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는 고쳐서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涅槃)하셨네. 지금 또한 그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 버린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金剛山)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여,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잠자코 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리. 세상 떠나면서 읊은 한 곡조 간단도 해라. 고통스런 생사가 본래 고통이 아니어니, 연화장 세계 넓기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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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桃聖母 隨喜佛事 <眞平王>朝, 有比丘尼名<智惠>, 多賢行, 住<安興寺>. 擬新修佛殿而力未也, 夢一女仙風儀婥約, 珠翠飾鬟, 來慰曰: 「我是<仙桃山>神母也. 喜汝欲修佛殿, 願施金十斤以助之. 宜取金於予座下, 粧點主尊三像, 壁上繪五十三佛‧六類聖衆及諸天神‧五岳神君(<羅>時五岳, 謂東<吐含山>, 南<智異山>, 西<雞龍>, 北<太伯>, 中<父岳>亦云<公山>也), 每春秋二季之十日, 叢會善男善女, 廣爲一切含靈, 設<占察法會>以爲恒規.(本朝<屈弗池>龍, 託夢於帝, 請於<靈鷲山>長開<藥師道場>, □平海途, 其事亦同.) <惠>乃驚覺, 率徒往神祠座下, 堀得黃金一百六十兩, 克就乃功, 皆依神母所諭. 其事唯存, 而法事廢矣.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 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山, 鎭祐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第五十四<景明王>好使鷹, 嘗登此放鷹而失之, 禱於神母曰: 「若得鷹, 當封爵.」 俄而鷹飛來止机上, 因封爵「大王」焉.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二聖之所自也. 故稱<雞龍>‧<雞林>‧<白馬>等, 雞屬西故也. 嘗使諸天仙織羅, 緋染作朝衣, 贈其夫, 國人因此始知神驗.
又《國史》, 史臣曰: 「<軾><政和>中, 嘗奉使入<宋>, 詣<佑神館>, 有一堂, 設女仙像. 館伴學士<王黼>曰: 此是貴國之神, 公知之乎? 遂言曰: 古有中國帝室之女, 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祖, 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 文有「娠賢肇邦」之句.」 今能施金奉佛, 爲含生開香火, 作津梁,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
讚曰: 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찬(讚)해 말한다. 서연산(西鳶山)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천제(天帝)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을 짰었네.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는데, 금선(金仙)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네. |
郁面婢 念佛西昇 <景德王>代<康州>(今<晉州>, 一作<剛州>, 則今<順安>)善士數十人, 志求西方, 於州境創<彌陀寺>, 約萬日爲契. 時有阿干<貴珍>家一婢名<郁面>, 隨其主歸寺, 立中庭, 隨僧念佛, 主憎其不職, 每給穀二碩, 一夕舂之. 婢一更舂畢, 歸寺念佛.(俚言「己事之忙, 大家之春促」, 盖出乎此.) 日夕微怠, 庭之左右, 竪立長橛, 以繩穿貫兩掌, 繫於橛上合掌, 左右遊之激勵焉. 時有天唱於空「<郁面娘>入堂念佛」, 寺衆聞之, 勸婢入堂, 隨例精進. 未幾, 天樂從西來, 婢湧透屋樑而出, 西行至郊外, 捐骸變現眞身. 坐蓮臺, 放大光明 緩緩而逝, 樂聲不撤空中. 其堂至今有透穴處云.(已上《鄕傳》.)
按《僧傳》: 「棟梁八珍者觀音應現也. 結徒有一千, 分朋爲二, 一勞力, 一精修, 彼勞力中知事者不獲戒, 墮畜生道, 爲<浮石寺>牛. 嘗駄經而行, 賴經力, 轉爲阿干<貴珍>家婢, 名<郁面>. 因事至<下柯山>, 感夢遂發道心.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陀寺>不遠, 阿干每至其寺念佛, 婢隨往, 在庭念佛云云.」 如是九年, 歲在乙未正月二十一日, 禮佛撥屋梁而去, 至小伯山, 墮一隻履, 就其地爲<菩提寺>. 至山下棄其身, 卽其地爲<二菩提寺>, 榜其殿曰「<勗面>登天之殿」. 屋脊穴成十許圍, 雖暴雨密雪不霑濕. 後有好事者範金塔一座, 直其穴, 安承塵上, 以誌其異, 今榜塔尙存. <勗面>去後, <貴珍>亦以其家異人托生之地, 捨爲寺曰<法王>, 納田民, 久後廢爲丘墟.
有大師<懷鏡>, 與承宣<劉碩>‧小卿<李元長>, 同願重營之. <鏡>躬事土木, 始輸材, 夢老父遺麻葛屨各一. 又就古神社, 諭以佛理, 斫出祠側材木, 凡五載告畢. 又加臧獲, 蔚爲東南名藍, 人以<鏡>爲<貴珍>後身.
議曰: 按鄕中古傳, <郁面>乃<景德王>代事也, 據<徵>(「徵」字疑作「珍」. 下亦同)本傳, 則<元和>三年戊子, <哀莊王>時也. <景德>後歷<惠恭>‧<宣德>‧<元聖>‧<昭聖>‧<哀莊>等五代, 共六十餘年也. <徵>先<面>後, 與鄕傳乖違, 然兩存之闕疑.
讚曰: 西隣古寺佛燈明, 舂罷歸來夜二更. 自許一聲成一佛, 掌穿繩子直忘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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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면비 염불 서승(郁面婢 念佛 西昇)
경덕왕(景德王) 때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 또는 강주康州라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뜻을 서방(西方)에 구해서 고을의 경계에 미타사(彌陀寺)를 세우고 만일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했다. 그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念佛)했다. 그 주인은 그녀가 그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 했더니,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여(속담에 말하기를, "내 일이 바빠서 주인 집 방아 바삐 찧는다" 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말인 듯싶다)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길다란 말뚝을 세워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메고는 합장(合掌) 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기를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데, "욱면랑(郁面娘)은 당(堂)에 들어가 염불하라" 하였다. 절의 중들이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처럼 정진(精進)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으로 교외(郊外)에 가더니 해골(骸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蓮化臺)에 앉으서 큰 광명을 발사하면서 서서히 가버리니, 음악소리는 한참 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堂)에는 지금도 구멍이 뚫어진 곳이 있다고 한다(이상은 향전鄕傳에 있는 말이다).
<승전(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중 팔진(八珍)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現身)으로서 무리들을 모으니 1,000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했고, 한 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는 무리들 중에 일을 맡아 보던 이가 계(戒)를 얻지 못해서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서 부석사(浮石寺)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어느날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욱면(郁面)이라고 했다. 욱면이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드디어 불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미타사(彌陀寺)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아간이 항상 그 절에 가서 염불하는데 욱면도 따라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를 9년, 을미년(乙未年)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소백산(小伯山)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려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짓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肉身)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 보리사를 짓고 그 전당(殿堂)에 방(榜)을 써붙여, '욱면(욱面) 등천지전(登天之殿)'이라 했다. 집 마루에 뚫린 구멍이 열 아름이나 되었는데 아무리 폭우(暴雨)나 세찬 눈이 내려도 집 안은 젖지 않았다. 그 뒤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金塔) 하나를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 위에 모셔 그 이상한 사적을 기록했으니, 지금도 그 방(榜)과 탑(塔)이 아직 남아 있다. 욱면(욱面)이 간 뒤에 귀진도 또한 그 집이 신이(神異)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해서,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토지를 바쳤는데 오랜 뒤에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았다.
대사(大師) 회경(懷鏡)이 승선(承宣) 유석(劉碩), 소경(小卿) 이원장(李元長)과 함께 발원(發願)하여 절을 중건(重建)했는데, 회경이 친히 토목 일을 맡았다. 재목을 처음 운반할 때, 노부(老父)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레씩 주었다. 또 옛 신사(神社)에 가서 불교의 이치를 개유(開諭)하였으므로 신사 옆 재목을 베어다가 5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또 노비들을 더 주니 매우 융성하여 동남 지방에 있어서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後身)이라 했다.
의론해 말한다. 고을 안의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욱면은 바로 경덕왕 때의 일이다. 징(徵; 필경 진珍인 듯싶다. 아래도 역시 같다)의 본전(本傳)에 의하면 이는 원화(元和) 3년 무자(戊子; 808) 애장왕(哀莊王) 때의 일이라 했다. 경덕왕 이후에 혜공왕(惠恭王)ㆍ선덕왕(宣德王)ㆍ원성왕(元聖王)ㆍ소성왕(昭聖王)ㆍ애장왕(哀莊王)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 년이나 된다. 귀징(貴徵; 珍)이 먼저이고 욱면이 뒤이기 때문에 그 선후가 향전(鄕傳)과 어긋난다. 여기에는 이 두 가지를 다 실어서 의심이 없게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서쪽 이웃 옛 절에 불등(佛燈)이 밝았는데, 방아 찧고 절에 오니 이경(二更)이네. 한 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려하여, 손바닥 뚫어 노끈 꿰니 그 몸도 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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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德嚴莊 <文武王>代, 有沙門名<廣德>‧<嚴莊>二人友善. 日夕約曰: 「先歸安養者, 須告之.」 <德>隱居<芬皇>西里(或云, <皇龍寺>有<西去房>, 未知孰是), 蒲鞋爲業, 挾妻子而居; <莊>庵栖<南岳>, 大種力耕. 一日, 日影拖紅, 松陰靜暮, 窓外有聲, 報云: 「某已四往矣, 惟君好住, 速從我來.」 <莊>排闥而出顧之, 雲外有天樂聲, 光明屬地. 明日歸訪其居, <德>果亡矣. 於是, 乃與其婦收骸, 同營蒿里. 旣事, 乃謂婦曰: 「夫子逝矣, 偕處何如?」 婦曰: 「可.」 遂留, 夜將宿欲通焉, 婦靳之曰: 「師求淨土, 可謂求魚緣木.」 <莊>驚怪問曰: 「<德>旣乃爾, 予又何妨?」 婦曰: 「夫子與我, 同居十餘載未嘗一夕同床而枕, 況觸汚乎. 但每夜端身正坐, 一聲念阿彌陁佛號, 或作十六觀, 觀旣熟, 明月入戶, 時昇其光, 加趺於上. 竭誠若此, 雖欲勿西奚往? 夫適千里者, 一步可規. 今師之觀可云東矣, 西則未可知也.」 <莊>愧赧而退, 便詣<元曉法師>處, 懇求津要, <曉>作《鍤觀法》誘之, <藏>於是潔己悔責, 一意修觀, 亦得西昇. 《鍤觀》在《曉師本傳》與《海東僧傳》中. 其婦乃<芬皇寺>之婢, 盖十九應身之一德. 嘗有歌云: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 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 혹은 황룡사皇龍寺에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삽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하 이뎨 西方장 가샤리고 無量壽佛 前에 닏곰다가 고샤셔
다딤 기프샨 尊어 울워리 두 손 모도호 願往生 願往生 그릴 사 잇다 고샤셔 아으 이 몸 기텨 두고 四十八大願 일고샬까. |
月明師兜率歌
景德王十九年庚子四月朔 二日竝現 挾旬不滅 日官奏請綠僧作散花功德 則可禳 於是潔壇於朝元殿 駕幸靑陽樓 望綠僧 時有月明師 行于阡陌時之南路 王使召之 命開壇作啓 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王曰 旣卜綠僧 雖用鄕歌可也 明乃作兜率歌賦之 其詞曰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 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解曰
龍樓此日散花歌 桃送靑雲一片花 殷重直心之所使 遠邀兜率大僊家
今俗謂此爲散花歌 誤矣 宜云兜率歌 別有散花歌 文多不載 旣而日恠卽滅 王可知 賜品茶一襲 水精念珠百八箇 忽有一童子 儀形鮮潔 궤奉茶珠 從殿西小門而出 明謂是內宮之使 王謂師之從者 及玄徵而俱非 王甚異之 使人追之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傷前 知明之至德與至誠 能昭假于至聖也如此 朝野莫不聞知 王益敬之 更贐絹一百疋 以表鴻誠 明又嘗爲亡妹營齋 作鄕歌祭之 忽有驚颷吹紙錢 飛擧向西而沒 歌曰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遺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遺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明常居四天王寺 善吹笛 嘗月夜吹過門前大路 月馭爲之停輪 因名其路曰月明里 師亦以是著名 師卽能俊大師之門人也 羅人尙鄕歌者尙矣 盖詩頌之類歟 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非一 讚曰
風送飛錢資逝妹 笛搖明月住姮娥 莫言兜率連天遠 萬德花迎一曲歌 |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9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둥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긴 밭두둑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뢴다. “저는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鄕歌)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에는 서투릅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이에 월명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가사는 이러하다.
오 이에 散花 블어 (뿌리온) 고자 너는 고 命 ㅅ 브리디 (심부름하옵기에) 彌勒座主 뫼셔라.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散花歌)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兜率大僊)을 맞으라.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은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많아서 실을 수 없다. 그런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 이때 갑자기 동자(童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곱고 깨끗했다. 그는 공손히 다(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月明)은 이것을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子)로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알고 보니 모두 틀린 추측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은 시켜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 탑속으로 숨고 다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보살을 소가(昭假) 시킴이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렸는데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었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 향가는 이러하다.
生死路 예 이샤매 저히이고 나 가다 말ㅅ도 몯 다 닏고 가닛고 어 이른 매 이 뎌 딜 닙다이 가재 나고 가논 곧 모온뎌.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道 닷가 기드리고다.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촵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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