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講 8
☆1.한국문학의 개념과 범위
‘문학’이란 ‘文’에 대한 ‘學’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때의 ‘학’은 학문 또는 연구를 의미한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이요, 교육에 대한 연구는 교육학이다. 이와 같은 명칭에는 정치학, 경제학 등등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문학’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역사학, 교육학, 정치학, 경제학…등과도 함께 쓰이지만, ‘~학’이라는 말이 붙지 않은 역사, 교육, 정치, 경제…등과도 같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학, 교육학 등 학문의 대상이 역사, 교육 등인 것처럼 ‘문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문학’이라는 말이다.
학문의 이름으로서도 ‘문학’이요, 그 학문의 대상도 ‘문학’인 것이다. 이 둘을 구별짓자면 학문으로서의 문학을 ‘문학학’이라고 하든가, 학문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을 그냥 ‘문’이라고만 해야 할 것이지만, 관습은 그렇지 못해서 그 두 가지를 모두 ‘문학’이라고 하는 데서 혼란이 야기된다. 굳이 말하자면 ‘文’이라고 해도 될 것을 ‘문학’이라고 하는 바람에 ‘문학학’의 준말로 사용할 수 있는 ‘문학’과 같아짐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학’이라는 용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하겠다.
‘文’으로도 충분한 것을 ‘문학’이라고 한 까닭은 문학에 대한 선인들의 고정된 관념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곧 ‘文’은 ‘道로 들어가는 門’1)이요, ‘道를 싣는 기물’2), ‘道를 꿰는 물건’3)이라는 관념이 ‘文’은 ‘學’이라야 한다는 경직된 개념으로 굳어지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관념은 이미 공자 시대부터 정립되어 왔던 문학관이라고 하겠다.4) 전통적 동양의 문학관이 ‘文’으로 되어 있는 역사, 전기, 철학 등을 포괄할 수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은 ‘道’를 전하는 ‘文’이면 ‘문학’으로서의 충분조건을 지닌다고 여겼던 까닭이겠다.
이러한 사정은 서양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라틴어의 literatura (literature)가 litera(letter)에서 유래한, ‘글로 쓰여진 것, 즉 문헌, 특히 어떤 학문 분야에 관련된 문헌을 뜻하는 말’5)이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道를 실은 文, 또는 학문과 관련된 글이라는 개념으로서의 문학은 너무 광범위하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우리 사람들의 삶이 점점 복잡하게 되어감에 따라 어느 한 가지 개념이 모든 것을 떠맡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의 개념도 점차 분화되기 시작한 연유이다. 道가 드러나지 않은 글 중에서도 흥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문학은 차츰 학문이나 道에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음악, 미술 등과 함께 예술로서의 문학을 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美文學, 창작문학으로서의 문학이 그것이며, 오늘날에는 문학이라고 하면 바로 이러한 협의의 문학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일상화하였다.
한편, ‘文’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文字’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文字란 음성을 기호화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서 문자 아닌 음성에 의한 문학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설화나 민요 따위가 이에 속한다. 음성과 문자는 다 같이 언어(언어의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문학은 언어에 의한 예술, 언어를 표현 매체로 하여 인생과 자연(곧 현실)을 형상화한 예술이라 하겠다.
문학이 그렇다면, ‘한국문학’6)이란 ‘한국의 문학’이라고 하면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가 못하다. ‘문학’의 경우에는 사람 일반이 그 주체이므로 주체를 따로 밝히지 않아도 되었으나, ‘한국문학’이라고 할 경우에는 ‘한국인’이 그 주체로 명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때의 ‘한국인’이란 국적을 가지고 따질 성질이 못 된다. 외국인도 한국에 귀화하면 한국인일 수 있고, 한국인도 외국으로 귀화하면 외국인일 수가 있으니,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해야 할 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의식이 대체로 고조선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잡는다면, 고조선 무렵의 중국 땅에 있었다고 주장되기도 하는 조선진(朝鮮津)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한국인으로 간주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요, 삼국 및 고려 시대에 중국 쪽에서 문학을 했다거나, 발해국의 문학도 (발견된다면) 한국문학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고, 조선조 때의 중국, 일본 등지에 정착하게 되었던 한국인들의 문학도 우리 문학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권을 상실했던 일제 강점기의 문학, 만주․ 간도․ 사할린․ 연변 지방의 문학, 최근 들어서는 미국 등지에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문학도 물론 한국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경우, 또 한 가지의 요건을 구비해야만 한다. 그것은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기에 표현 매체로서의 언어적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한국인이라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당연히 한국어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음성언어로서의 한국어는 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나 문자언어로서의 한국어, 곧 한글은 훈민정음의 창제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그대로 한국문학의 범위와 관련되므로 이제 논의를 그쪽으로 돌려 보자.
언어는 문자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문자는 2차적이요, 오히려 음성이 언어의 1차적 형식이다. 따라서 우리글 이전의 우리말로 된 문학도 우리문학임은 당연하다. 이것이 곧 말로 된 문학, 구비 전승되는 문학, 곧 구비문학(口碑文學)7)이다. 구비문학은 문학의 원초적인 형태이다.8) 그것과 상대적인 것이 글로 된 문학, 기록문학이다. 역사의 발전과 함께 구비문학을 토대로 해서 기록문학이 생겨났다.9)
그러나 기록문학이 생겨나자 구비문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록문학은 주로 지식층으로 불리는 상층계급으로 확산되고, 구비문학은 상층계급에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고 더러는 기록문학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하층계급이랄 수 있는 서민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창제 이후에는 서민층에서도 문자를 사용하는 일이 수월해져서 구비문학의 구실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왔다.
이러한 사정은 현대로 접어들수록 더욱 심화되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그렇다고 구비문학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구비문학은 기록문학보다는 겉으로 덜 드러나겠지만, 기록문학의 기층을 담당하면서 계속 그 생명력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비문학도 한국문학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정옥의 민요 연구10), 이두현의 민속극 연구11) 등에서 관심을 보이다가 장덕순 외 3인의 구비문학 개설서12), 조동일의 개설서13) 등을 거쳐 김흥규14)에 와서 그 결론이 내려졌다고 할 수가 있다.
기록문학 쪽의 사정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논란이 있어왔으나, 사정은 보다 복잡하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문자 생활이라면 한자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에 한국문학이라면 전통적으로 한문문학[漢文學]만이라는 관념이 지배해 왔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의 영향으로 한문학의 전성시대라 할 만했고, 조선조에 와서도 서거정이 당대까지의 문학을 집대성하면서 한문학만을 그 대상으로 한 것15)이 이러한 관념을 대표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국가적인 소용으로서의 악장(樂章)을 국문으로 지었다든가 하여 국문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으나 굳어진 관념을 쉽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퇴계 선생의 『도산12곡』을 거쳐 정송강의 4편의 가사와 시조 등에서 국문문학의 참다운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고, 이어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광해군 때에는 허균의 『홍길동전』이 국문으로 창작되었고16), 숙종 때에는 홍만종이 국문으로 쓰인 가곡도 볼 만하고 들을 만한 것이 있다고 했으며17), 김만중은 초동급부(樵童汲婦)의 노래가 학사대부(學士大夫)의 시보다도 더욱 참되다고 하여18) 국문문학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졌다. 갑오경장 이후 국문을 공식적인 글로 채택하기에 이르자, 신문 잡지 등이 국문으로 발행되고 이러한 발표 지면에 힘입어 국문으로 쓰인 작품들이 대량으로 산출되자 드디어 국문문학이 한문문학을 누르고 한국문학의 주인 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 안확이 국문학사를 쓸 때에는 이와 같은 관점을 미처 밝히지 못했는데19), 이광수가 “조선문학이란 조선문으로 쓴 문학”20)이라야만 한다고 단언하였고, 이것은 그대로 우리어문학회의 저술들로 이어져서21) 이제는 한문문학이 한국문학에서 배제될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병기는 “한문문학의 자료가 아무리 汗牛充棟의 것이라 하더라도…순수한 국문학적 자료들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22)이라면서 준국문학적 자료로서 國漢文學史編을 부록으로 편수한다고 했고, 김수업과 같은 이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23)
이병기보다 조금 앞서 조윤제는 “한문에 대한 조선인의 관념은 결코 이것을 이국문시할 수 없었”24)기 때문에 한문학이라 하여 ‘순조선문학(순국문학)’은 아니지만 ‘큰 조선문학(큰 국문학)’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순조선문학은 시가․ 소설 등의 문예를 위주로 하여 발달하였다는 특질을 고려하야 설화․ 소설 등은 비록 한문으로 표기되었다 하드라도 순조선문학 부문에 넣어서 고려할 것”25)이라고 하여 한문문학에 대한 처리에 매우 고심한 흔적을 보이는 애매한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큰 국문학’으로서의 한문문학의 위상 정립은 대체로 그 이후에 그대로 답습되어 온 실정이다. 따지자면 한문의 음과 훈을 이용한 향찰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한문은 분명 중국인이 사용하던 한문과는 달랐다. 한문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이 그것을 이국문시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런 관념을 가지고 쓰인 문학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때 한문의 음을 중국의 원음에 가깝게 적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동국정운』과 같은 문헌까지도 편찬하였었으나 일반화되지 못하고 곧 사용되지 않은 점만 보더라도 이 점은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는 일이다. 따라서 한국의 한문문학은 한국문학에 포함하여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조동일도 한국문학을 “말로 된 문학인 구비문학, 문어체 글로 된 문학이기만 한 한문학, 구어체 글로 된 문학인 국문문학”26)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한문문학이 한국문학에 포함되어야 하는 그 동안의 논란은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요 절차였다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국문문학을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누는 관습에도 함께 적용되어야 할 문제이다. 광복 이후 대학에서의 교수 상의 편의에서 나누어지기 시작했고, 이병기․ 백철의 『국문학전사』에서 집필 상 편의에서 구분되었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도 앞으로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굳이 그런 것을 구분하다 보면 무의식적인 전통 단절의 혐의만 짙게 만들어 줄 뿐이다. 기술 상의 편의 이외에는 한국문학을 몇 가지 갈래로 나누어 놓은 일 자체가 오히려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바를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문학은 한국인이 한국어로 표현한 문학이다. 이때의 한국인은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한국어란 국문뿐만 아니라 한자의 음, 훈을 빌려 쓴 향찰은 물론, 우리식으로 사용했던 한문까지도 포함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한국문학의 개념을 전제로 한국문학의 범위를 도형화해 보이면 아래와 같은데, 이는 어디까지나 기술 상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현대문학)
☆2.한국문학의 특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문학이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한국적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 하겠다. 말하자면, 한국문학의 특질이 무엇인가를 자각하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의 문학이 어찌 그 특질이 없을까마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조윤제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조윤제가 내세웠던 한국문학의 특질을 살펴보도록 하자.
1.은근과 끈기27)
반달의 아직 충만하지 않은 데에서는 완성의 확실성을 약속하는 ‘여백’을 찾아볼 수 있고, 장구소리의 가늘게 또 길게 끄는 것에서는 잘리어 떨어지지 않는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는 ‘여운’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이 여백은 ‘은근’이요, 여운은 ‘끈기’라는 것이다.
춘향의 미(美)를 두고서도, 그 얼굴 그 맵시 어디 하나 분명히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된 바 없고, 그저 “구름 사이에 솟아 있는 밝은 달 같고, 물 속에 피어 있는 연꽃과 같다(女雲間之明月 若水中之蓮花).”고 하여 아름다움이 뚜렷이 노출되지 않은 ‘은근’한 맛을 보여줄 뿐이다.
남구만(南九萬)의 “동창이 밝앗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를 두고서는,
“아마 봄날 농촌의 한적한 풍경을 그린 것인 듯하나, 푸른 뒷산, 넓지 못한 앞들, 실같이 흐르는 시내, 그리고 동산에 으리는 햇상이 고요히 마을 위에 비치고, 벌써 어떤 농부는 쟁기를 지고 소를 몰고 들을 향해 산모롱이길을 말없이 가고 있는 것이 역력히 보이어 온다. 여기에 그 모든 하나하나의 자연, 심지어는 공중에 높이 떠서 우지지는 노고지리조차도 분명히 그의 개별적인 미를 잊어버리고 그들은 다 한데 녹아 하나의 그림과 같은 고요한 아침 안개 가운데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28)
고 하여 한국문학의 ‘은근’을 예증하였다.
한편 「가시리」에는, 그리운 님을 보내는 애끊는 정은 측량할 수 없고, 따라 그 애원, 호소, 연연의 정이 지극하지마는, 그것이 실로 ‘은근’하게 나타나 애이불비(哀而不悲)하는 소위 ‘점잔’을 유지하면서, 문자 밖에 한없는 이별의 슬픔이 잠기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은근하고 여운이 있는 정취는 저절로 ‘끈기’가 붙어 있는 것이라서, 그 그칠 줄 모르고 면면히 길게 또 가늘게 끄는 그것은 일종의 ‘끈기’라는 것이다.
정포은의 「단심가」에 이르러서는 한국문학의 ‘끈기’가 온통 그대로 표출되어 있는 감이 있으며, 「유산가」라든가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뫼에…”라는 사설시조, 또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이 파란중첩하고 복잡기괴한 일생에서 모든 간난을 극복하고, 결국 해피엔드로 끌어가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은 우리 문학의 ‘끈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논의는 최진원(崔珍源)에 의해 좀더 심화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는 강호가도(江湖歌道)를 논하면서 ‘여백’과 ‘절로절로’를 상세히 다루었는데29), 이는 조윤제의 ‘은근’을 예증한 것이라 보인다.
면앙정(俛仰亭)의 시조 “잘새 라들고 새이 도다온다…”는 여백[淡白]이 그 시성(詩性)이며, 고산(孤山)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도 동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강호가도에서 격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여백에 그 一因이 있음을 알 수 있다.”30)고 하였다.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의 경우에는 아예 “담백함이 지나쳐 무미건조할 정도”31)이며, 무명씨의 “삿갓세 되롱이 닙고 세우 중에 호믜 메고…”는 “여백 속에 태고연한 박(樸)을 함축”32)하고 있으며, “지당에 비 리고 양류에 인제…”와 “믈 아래 그림재 디니 리우 듕이 간다…”는 조헌(趙憲)과 정철(鄭澈)의 “深意는 筆墨之外에 있다.”33)고 했다.
이와 같은 시조들은‘세련된 단순성’(과잉에서 우러나고 탐닉에 환멸을 느낀 때문에 나타나는 단순성)의 ‘여백’을 나타낸 작품들이요, 이와는 얼마큼 다른 곳에 ‘소박한 단순성’(결핍에서 오는 소박한 단순성)인 ‘절로절로’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를 ‘모시’라 한다면, 후자는 ‘삼베’와 같다고도 비유했다.
이 소박한 단순성을 보이는 시조로는 황희(黃喜)의 “대조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리며…”를 들었다. 이 시조는 “가을 농촌의 즐거운 정취가 은근히 풍긴다. 그 「은근」은, 「밤은 어이 듯드리며」, 「게는 어니 나라고」, 「술닉자 아니 먹고 어이리」의 의문형의 세 번의 연첩에서 함축되는 것 같다.”34)고 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 전술한 남구만의 시조와 정철의 “재너머 성권롱 집의 술 닉단 말 어제 듯고…” 외 2수를 더 들었다.
주로 예증적 해설의 성격이 강하고 그 의의나 가치에 대한 논의가 두드러지지 못하여 아쉬운 감이 없지 않으나 나름대로 매우 의의 있는 작업이었다고 생각되어서 소개한다.
2.가냘픔과 애처로움35)
‘가냘픔과 애처로움’은 애상적인 것이다. 민요의 가락에서, 남도의 육자배기에서, 서도의 수심가 등에서 그러한 가냘픔과 애처로움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일찍이 일인 유종열(柳宗悅)은 고려의 청자․ 이조의 건축․ 정원 예술 등을 들어 한국 예술은 선의 미, 비애의 미를 지녔다고 하였다. 한국이 반도국이라서 대륙과 섬나라의 틈바구니에서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하다 보니, 대륙의 우렁참․ 섬나라의 현란함을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하늘에 호소라도 하는 듯한 애닯은 선의 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냘픔과 애처로움의 애상․ 비애는 ‘한(恨)’의 정서와 상통한다. 전규태는 약소민족의 비애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문학 위에 반영되어 왔는데, 거기에다 불교의 무상, 도교의 현실 도피의 인생관이 비애적 색조를 더욱 짙게 하여 ‘恨의 문학’을 이루게 되었다고 했다.36) 한의 정서는「회소곡(會蘇曲)」의 전설, 유리왕(琉璃王)의「황조가(黃鳥歌)」,그리고 차사사뇌(嗟辭詞腦)니 하는 신라의 향가로부터 그 싹을 엿볼 수 있고, 고려의「청산별곡(靑山別曲)」․「동동(動動)」 따위의 속요에서도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송강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인생은 유한 시름도 그지업다.”)이나 뭇 시조 ․ 내방가사 ․ 서민들의 정이 아로새겨진 민요 등에서도 느껴지며,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김소월의 「초혼(招魂)」과 같은 작품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이규태(李圭泰)는 인간의 정념은 “그것이 억눌리면 응어리가 지고 응어리가 굳으면 매듭처럼 맺힌다. 정념이 응어리지는 과정을 恨이라 하고 그 恨이 맺히는 과정을 怨이라 한다.”37)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왜 恨이 많은가? 그는 우리 한국의 역사는 인간 정념을 억누르는 역사라 해도 대과는 없을 것 같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관권이 억누르고, 경제적으로는 가진 자가 억누르고, 사회적으로는 양반이 억눌렀으며, 도덕적으로는 삼강오륜이 억눌렀고, 가족적으로는 가부장제도가 억눌렀다. 자손은 죽고 없는 조상에게 억눌렸고, 아내는 남편에게 억눌렸으며, 아이들은 어른에게,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억눌렸다.”38)
한국어에 사회계층을 나타내는 위상어(位相語)나 존비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다채로와서 이것을 모두 습득하여 완전히 구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가 어렵다는 견해39)는 한국인들이 그만큼 ‘억눌림’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민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아리랑」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 종류가 2,000여수를 넘어선다고 하니,「아리랑」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는 없다고 할 만하다. 동남아의 웬만한 나라에 나가 보면, 그네들의 극장에서 쉽게 우리의 「아리랑」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아리랑」이 함경도 지방에서는 애원성(哀怨聲)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40) 곧, 한(恨)의 노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고 말 것도 아니다. 「아리랑」은 ‘恨의 노래’인 동시에 ‘풀이의 노래’인 때문이다. 아니, ‘恨의 노래’라기보다는 ‘풀이의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이 ‘고개’를 의미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고개 많은 정선이며 평창 고을, 「아리랑」의 본 고장인 이 산골 둘레에도 「아리랑」이 붙은 고개는 단 하나도 없다. 우리는 「아리랑」을 지도나 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삶에서 찾아야 하고 역사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삶에 고비가 있고 역사에 난관이 있다면, 그 고비며 난관들이 다름 아닌 ‘아리랑고개’ 바로 그것이다. ‘아리랑고개’란 아무데도 없고 아무데나 있는 고개다.”41)
김열규(金烈圭)의 표현대로 아리랑고개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고개다. ‘고개’란 ‘넘기 힘든 곳’이다. 그러나 ‘넘어갈 수 있는 곳’이다. 보다 ‘넘어감을 전제로 하는 곳’이다. 결국 우리의 문학은 ‘恨의 문학’이라기보다는 ‘恨풀이의 문학’이라고 해야 걸맞다. ‘가냘픔과 애처로움의 문학’이 아니라 가냘프고 애처로운 듯하지마는 그것을 넘어 극복의 의지를 담은 문학이다.
‘가냘픔과 애처로움’이 어찌 ‘끈기’가 될 수 있는가? ‘끈기’는 쉬지 않고 탐구하는 ‘선비 정신’과도 통한다. 가난하지만 품위를 지키려 애쓰는, 이희승(李熙昇)의 이른바 ‘딸깍발이의 정신’도 그것이다. 그러니까 ‘은근과 끈기’라는 우리 문학의 특질은 恨의 극복을 위한 정신적 특질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다음에 거론하는 ‘두어라와 노세’와도 관련된다.
3.두어라와 노세42)
시조 종장 제1음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두어라’와 노랫가락 등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노세’는 흔히 ‘체념적 정서’와 ‘낙천성’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낙천성’은 쉽게 인정할 수 있지만, ‘체념적 정서’라는 점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시조는 주로 조선조에 성행했던 문학 장르이다. 유교적 관념을 중시했던 시조에서 어떻게 체념적인 것을 찾을 수가 있을까?
현실에서 한 발을 빼는 은자(隱者)들마저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중국의 소부(巢父)․ 허유(許由)와 같은 대은(大隱)이 아니고, ‘가은둔인(假隱遁人)’ 소위 ‘소은(小隱)’이라는 견해43)를 보아서도 그것은 체념일 수가 없다. 언제라도 임금이 불러주면,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다.”(관동별곡)고 하면서 뛰어나갈 채비가 되어 있는 은둔이 한국적인 은둔인 것이다. 정계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으레 ‘연군’의 글을 지었던 것이 신라(「怨歌」), 고려(「鄭瓜亭」) 이래의 전통(조선조 송강의 「思美人曲」․「續美人曲」등)인데, 은둔이요 체념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격렬한 저항은 파괴를 수반하게 된다. 전설 속의 영웅들이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패배하고 마는 비극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맺힌 恨은 풀어야 하는 것인데, 대결을 피하면서 풀고자 하는 방법이 ‘두어라와 노세’가 되는 것이다. 직접 맞부딪치는 격돌을 피하고자 하는 방식이 ‘두어라’라고 한다면, ‘노세’는 흥을 수반하는 한바탕의 해원(解寃)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해학․ 골계․ 풍자가 많은 것도 바로 이 ‘노세’와 관련된다. 해학․ 골계는 물론 풍자까지도 남의 파괴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교정(矯正; Dryden의 「풍자시론」)․ 개심(改心; Defoe의 「진정한 영국인」의 서문)이 목표44)인 것이다. 그리고 해학․ 골계․ 풍자는 모두 ‘웃음’을 기본 요소로 삼는 것이요, 이 ‘웃음’은 ‘노세’로 나타나는 것이다.
조동일은 어느 좌담회에서, “구비문학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많은 경우에 원이나 한을 해학에 의해 극복”45)한다고 했다. '노세'는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해학․ 골계․ 풍자를 수단으로 하는, 상대에 대한 교정․ 개심을 목표로 하는 恨의 극복방법, 곧 자체로서 恨을 풀고자 하는 최상의 방책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노세’는 때로 ‘낙천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안확의 “항상 평화를 喜하고 낙천적 경향에 流한다.”46)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낙천성이야말로 평화적인 恨풀이의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 낙천성이 강화될 때 ‘신바람’을 동반하는 ‘노세’가 된다. 이제까지 한국문학의 주된 정서로 恨을 지적해 온 사람들이 있었으나 신바람이 추가되어야 할 것47)이라든가, “탈춤에는 흥과 신바람이 매우 중요”48)하다는 견해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신바람’은 탈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굿판에서도, 소리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삼국지(三國志)』나『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제천의식들에서도 그런 ‘신바람’은 찾아볼 수가 있다. 연일 음주 가무했다던 난장판의 축제는 일상적인 삶과는 날카롭게 대립되는 성스러운 신화적 시간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의식이요, 일상생활에서 쇠잔해 버렸던 힘과 활력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제의였다.49) 恨과 怨으로 가득 차 있던 삶에서의 해원(解寃)의식이요, 恨풀이의 성격을 지닌 것이 바로 ‘신바람을 동반하는 노세’인 것이다.
조윤제의 논의와는 달리 조지훈은 ‘멋’을 한국문학의 특질이라 하였다.50) 조선 후기에 ‘맛’이란 말에서 전성된 ‘멋’은 미의식과 관련된 중요한 낱말들의 분석으로부터 귀납시킨 것으로서 약간 장황하기에, 여기서는 김인환의 요약된 진술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조지훈은 「멋들다」「멋있다」「멋지다」「멋들어지다」등의 복합형용사를 통하여 다양성과 율동성과 곡선성과 원숙성과 데프로마시옹의 의미를 추출하고,「멋내다」「멋부리다」「멋질리다」「멋모르다」등의 복합동사를 통하여 超格性․ 玩弄性․ 和同性․ 中節性․ 無實用性 등의 의미를 추출하였다.”51)52)
이상에서 살펴본 조윤제나 조지훈의 논의에 대해 김학성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은근과 끈기」「멋」「여백」「한」「절로절로」라는 단순․ 소박한 단어를 가지고서 한국문학이 표백하고 있는 복잡다단한 미의식 현상을 밀도 있게 드러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분히 인상비평적이고 직관이 작용한 이러한 미적 성격의 판단은 자칫하면 한국문학의 참다운 미학적 실상을 그르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멋’이라는 말은 외국어로는 좀체 옮기기도 힘든 주관성이 강한 말이다. 영어 쪽으로 보면 style에 해당하는 말이겠으나 그것은 보다 외형적인 기준이 중요시되는 개념인데 비해, ‘멋’이란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것, 정신적인 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말이다. 한자어로 바꾸어 보면, ‘풍류’라는 말과 어느 정도 유사한 뜻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일찍이 한국 한문학의 비조로 불리는 최치원에게서부터 이 ‘풍류’라 한국사상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으니53), 멋이 우리 문학의 특질이라 하여도 대과는 없으리라 여겨지기도 한다. 유․ 불․ 선 3교 상을 포함했다는 풍류도는 격한 대립보다는 화합․ 조화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이는 것으로서, 조윤제의 ‘은근과 끈기․ 가냘픔과 애처로움․ 두어라와 노세’와 같은 恨의 극복도 ‘멋’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볼 수도 있지는 않을까 한다. 이것이 ‘멋의 미학’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연유이다.
한편 김동욱은 “「멋」이 문예미 측정의 범주가 될 수 있느냐가 문제”54)라고 하면서도, 백자미를 이조 문예의 특색, 한국문학의 특색으로 규정하면서 이것을 ‘멋’이라고 불렀다.
“백자는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 조금씩 비뚤어져 있거나 애브노말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멋’이라 한다.”55)
그는 같은 책에서,
“신라문학은 피안적이며, 고려의 문학은 청자의 문학이며, 이조의 문학은 백자의 문학이다. … 흰 것은 모든 것을 반사한 색이라 한다. 그만큼 반항적이며, 비타협적이며, 거부적이다. 게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백색은 고귀한 색이다. 범하기 어려운 기품이 있는 색이다.…백색은 비애의 색이다.…백색은 枯淡한 색이다.”56)
라고 하면서 백색 예찬론을 폈다. 그러면서 이를 한국문학의 특색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특질 규명은 조윤제나 조지훈의 그것과 방법론상의 차이는 별반 없다고 하겠다.
구자균은 조금 색다른 방법을 사용하였다.57) 그의 논점을 알기 쉽게 도식화해 보자.
양반문학………… ……………………점잖음․ 도덕주의․ 공명주의
-아폴로형의 문학-
평민문학………………………………우스움․ 색정주의․취락주의
-디오니소스형의 문학-
이와 같은 논의도 일리는 있는 주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나친 양분적 도식화로 인해서 양반들의 문학에서는 우스움․ 색정주의․ 취락주의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 도외시한 면이 있지 않은가 싶다. 특히 양반들이 그 저자로 되어 있는「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용재총화(慵齋叢話)」․「촌담해이(村談解頤)」․「어면순(禦眠楯)」․「속어면순(續禦眠楯)」․「어우야담(於于野談)」․「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등의 설화집․ 야담류 들이나「주장군전(朱將軍傳)」과 같은 가전체(假傳體) 작품들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미의식이란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이다. 사실판단도 상황에 따라서는 객관적이지 못할 수가 있는데 가치판단에서야 더욱 주관이 작용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닐까? 논자마다의 주장이 서로 다른 것은 바로 이러한 주관성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한국문학의 특질과는 조금 다른 문학 일반의 미적 범주에 관한 논의 두어 가지만 살펴보겠다.
조동일은 문학작품은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면서, 또한 「있어야 할 것」과「있는 것」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4가지로 구분하여 보았다.
숭고:「있어야 할 것」과「있는 것」이 서로 필요로 하는 조화의 관계를 이루면서,「있어 야 할 것」으로「있는 것」을 수정한다.
비장:「있어야 할 것」과「있는 것」이 서로 거부하는 갈등의 관계를 이루면서,「있어야 할 것」으로「있는 것」을 부정한다.
우아:「있어야 할 것」과「있는 것」이 서로 필요로 하는 조화의 관계를 이루면서, 「있 는 것」으로「있어야 할 것」을 수정한다.
골계:「있어야 할 것」과「있는 것」이 서로 거부하는 갈등의 관계를 이루면서,「있는 것」으로「있어야 할 것」을 부정한다.58)
「있어야 할 것」은 당위요,「있는 것」은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73년에 제시했던 것을 재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73년의 논의에서는 미의식에 따른 역사적 전개까지도 서술되어 있다.59)
대립되는 지향(志向)의 상관관계에 의한 기본미의 표출 양상을 밝힌 글에는 김학성의 것을 빼놓을 수가 없겠다.
|
상황 |
지향 |
결합방식 |
결과 |
미의 유형 |
① |
I 〉R |
I추구 |
조화 |
I가 R을 극복 |
숭고미 |
② |
I〈 R |
R추구 |
조화 |
R가 I와 혼연일체 |
우아미 |
③ |
I〈 R |
I추구 |
갈등 |
I가 R에 대항하다 오히려 손상․ 파멸됨 |
비극미 |
④ |
I 〉R |
R추구 |
갈등 |
R이 I에 항거, 또는 공격하여 I를 파괴 |
희극미 |
*I: 이상적인 것(the ideal) R: 현실적인 것(the real)60)
이와 같은 미의식 분류는 논리적, 체계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문학작품이 이 4가지 유형의 어느 하나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구체적인 작품을 가지고 이 틀에 맞추어 미적 유형을 재단하려는 일은 매우 위험한 측면을 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다. 구체적 작품의 경우에는 같은 작품 내부에서도 이 4가지 유형의 미가 서로 혼재되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1.인용된 시조 전문
남구만(南九萬)
東窓이 밝앗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칠 아는 엿 아니 닐엇느냐/ 재넘어 래 긴 밧틀 언제 갈려 니.
정포은의 「단심가」
이몸이 주거주거 一百番 고텨 주거/白骨이 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업고/님向 一片丹心이야 가 줄이 이시랴.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뫼에 매게 친 가토리 안과/
大川바다 한가온대 一千石 시른 예 櫓도 일코 닷도 일코 뇽총도 근코 것고 치도 지고 부러 믈결치고 안 개뒤섯겨 자진 날에 갈길흔 千里萬里 나믄듸 四面이 거머어득 져믓 天地寂寞 가치노을 듸 水賊 만난 都 沙工의 안과/
엊그제 님 여흰 내 안히야 엇다가 을리오.
면앙정(俛仰亭)
잘새 라들고 새이 도다온다/외나모 리로 홀노가는 져 禪師야/네졀이 엇매나 관 遠鐘聲이 들리니.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중 序曲
高山九曲潭을 사이 모르드니/ 誅茅卜居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武夷를 想像고 學朱子를 리라.
무명씨
삿갓세 되롱이 닙고 細雨中에 호믜메고/山田을 흣다가 綠陰에 누어시니/牧童이 牛羊을 모라 든나 와다.
조헌(趙憲)
池塘에 비 리고 楊柳에 인제/沙工은 어듸가고 뷘배만 엿고/夕陽에 일흔 며기 오락가락노매.
정철(鄭澈)
믈 아래 그림재 디니 리우 듕이 간다/져 즁아 게잇거라 너가 부러보쟈/막대로 흰구름 치고 도라 아 니 보고 가노매라.
재너머 成勸農 집의 술 닉단 말 어제 듯고/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고/아야 네 勸農 겨시냐 鄭座首 왓다 여라.
황희(黃喜)
大棗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리며/벼 뷘 그루헤 게는 어이 나리는고/술 닉쟈 쳬장사 도라가니 아니먹고 어 이리.
※참고2.會蘇曲
♠신라시대에 지어진 작자 미상, 가사 부전의 노래. 일명 ‘회악(會樂)’이라고도 함. 관련설화가 『삼국사기』 유리왕 9년조에 전한다.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嘆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
9년(서기 32)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왕이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部) 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큰 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밤 10시경에 그치는데,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모두 행하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였다.
|
♠후렴구를 빼놓고는 노랫말을 잃어버려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노래를, 조선 시대에 김종직은 되살리고 했던 적이 있어 눈길을 끈다.
會蘇曲 會蘇曲 西風吹廣庭 月明滿華屋 王姬壓坐理繅絲車 六部兒女多如簇 爾筐旣盈我筐空 釃酒揶揄歌相逐 一婦歎千室勸 坐令四海勸杼柚 嘉俳縱失閨中儀 猶勝跋河爭嗃嗃 - <會蘇曲>, 「東都樂府」
|
회소곡, 회소곡. 하늬바람 너른 들에 불어오고 달빛 밝아 화려한 집에 가득하네. 왕녀들은 자리 앉아 물레질 바라보고 여섯 고을의 아낙네들 많이도 모였구나. 네 광주리는 가득 찼고 내 광주리는 비었구나. 술 빚으며 놀려대고 노래하며 서로 쫓네. 한 아낙네 노래하니 천 아낙네 힘 받아 앉은 자리에서 명을 내리니 온 나라가 길쌈하기 힘쓰네. 비록 한가윗날 규중 법도 읽었지만, 영차, 영차. 다투는 줄다리기보다 낫구나.
|
♠‘會蘇’의 뜻을 놓고는 ‘아소(知)’, ‘모이소(集)’, ‘왔소(來)’ 등으로 해석하는 견해들이 있다.
※참고3.대체적으로 보았을 때,
①숭고미; 신화, 향가, 유교적 성격(충, 효, 열, 도학 등)이 강한 작품들
②비장미; 고전문학에서는 별로 많지 않다. 전설, ‘雲英傳’(일명 壽聖宮夢遊錄)
③우아미; 강호가도를 읊은 많은 시조나 가사. ‘賞春曲’, ‘俛仰亭歌’, ‘遊山歌’
④골계미; 판소리, 가면극, 많은 해학소설, ‘太平閑話滑稽傳’, ‘禦眠楯’, ‘續禦眠楯’
※참고4. 해학, 골계, 풍자의 구분.
①해학(諧謔); 웃음[익살]
②골계(滑稽); 웃음+ 비판성(弱) ex.김유정의 ‘봄봄’, ‘동백꽃’
③풍자(諷刺); 웃음+ 비판성(强) ex.채만식의 ‘태평천하’
☆耽羅國開國神話; 三姓神話 (李元鎭의 『耽羅志』 古跡條)
"三姓穴在州南三里 卽古毛興穴 高麗史古記云 厥初無人物 三神人從地湧出 今鎭山北麓有穴曰毛興是其地也 長曰良乙那次曰高乙那三曰夫乙那 三人遊獵荒僻 皮衣肉食 一日見紫泥封木函 浮至東海濱就而開之 內有石函 有一紅帶紫衣使者隨來 開函有靑衣處女三人及諸駒犢五穀種 乃曰 我是日本國使也 吾王生此三女云西海中嶽 降神子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命臣侍三女而來宜作配以成大業 使者忽乘雲而去 三人而歲次分娶之 就泉甘土肥處 射矢卜地 良乙那所居曰第一徒 高乙
那所居曰第二徒 夫乙那所居曰第三徒 始播五穀且牧駒犢就富庶"
|
"삼성혈은 제주에서 남쪽 3리쯤 되는 곳에 있으니, 옛이름은 모흥혈이다. 고려사 고기에 이르되, 애초에 사람이 없더니 땅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지금의 한라산 북녘 기슭에 모흥굴이라 부르는 혈이 있는데 이것이 그곳이다. 맏이가 양을나요, 버금이 고을나며, 셋째가 부을나다. 세 사람은 거친 두메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더니 하루는 자주빛 흙으로 봉해진 목함이 동해변에 떠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안에는 석함이 있는데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함을 여니 속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의 씨앗이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말씀하시되 서해중의 산기슭에 신자 세 사람이 강탄하시어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 하여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을 삼으셔서 대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나누어 장가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점치었다. 양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일도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이도라 하고, 부을나가 거처하는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비로소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게 되니 날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 갔다."(현용준,『제주도 신화』, 22-24쪽. 제주도,『제주의 문화재』,146쪽. 조선 문종원년(1451)에 완성된 『고려사 지리지』) |
※삼성혈(三姓穴) ;地神族說 신화가 깃든 곳
地穴은 品자형으로 나열되어 있고, 그 중 하나는 둘레가 여섯자,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하며, 나머지 두 혈은 둘레가 석자로서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흔적만 남았다. 윗혈은 고씨, 왼쪽 혈은 양씨, 오른쪽 혈은 부씨의 혈로 전해지고 있다.
제례일은 4월10일(춘제), 10월10일(추제), 12월10일(혈제)이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6쪽)
☆樂浪公主와 好童王子(삼국사기 14 고구려본기2 大武神王條)
大武神王 立 或云大解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大(→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 十五年…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嫡爲大(→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瞽瞍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大(→太)子 遣使入漢朝貢 光虎帝復其王號 是立武八年也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
대무신왕(大武神王)<혹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 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서기 14)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이 때에 이르러 [태자가]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15년(서기 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가죽]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낙랑을 멸하려고 혼인을 청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자 호동은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첫째 왕비는 [그가]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요.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호동은]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사론(史論): 이제 왕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없이 죽였으니, 그가 어질지 못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동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때에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하듯이 하여, 회초리는 맞고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이 이렇게 할 줄 모르고 마땅하지 않은 데서 죽었으니, 작은 일을 삼가는 데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자(公子) 신생(申生)에게 비유할 만하다. 12월에 왕자 해우(解憂)를 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한(漢)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虎자는高麗 惠宗의 이름 「武」의 代字避諱)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때가 건무(建武;立 자는 高麗 太祖의 이름 「建」의 代字避諱) 8년이었다. 20년(서기 37) 왕은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
※참고1.공자 신생
춘추시대 최강국인 齊나라가 桓公[-685~643]의 딸 제강(齊姜)은 진(晉)나라 왕 무공(武公)에게 시집을 간다. 그런데 무공이 죽자 그 아들 진 헌공(晉 獻公)이 왕권을 이어 받으면서 아버지의 애첩이었던 제강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申生'이다.
헌공은 또한 적족(狄族) 자매를 얻어 그 언니에게서 중이(重耳;후에 文公이 됨)를 낳고, 동생에게서 이오(夷吾;후에 惠公이 됨)를 낳는다.
그리고 여융(驪戎)을 정벌한 후 그 추장의 두 딸을 취하여 언니인 여희(驪姬)와의 사이에서는 해제(奚齊)를, 동생 소희(少姬)에게는 도자(悼子)를 얻는다. 여희는 자신의 부족을 멸망시킨 데에 앙심을 품고, 진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갖 책략을 꾀한다.
여희는 태자인 신생이 자신을 탐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신생이 보낸 음식에다가는 독을 넣어 헌공으로 하여금 신생을 내치게 만든다. 이에 신생은 자결을 하고 만다. 한편 중이와 이오는 도망을 간다. 이후 진나라는 끊임없는 반란 등으로 세력이 점차 약해져 가고, 헌공이 죽고 태자 자리를 차지했던 해제도 죽게 되자 여희도 자결을 하고 만다.
한편 진(秦)나라로 도망갔던 동생 이오는 자기 나라로 돌아와 왕이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왕권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형 중이를 없애려고 자객을 파견한다. 형 중이는 여기저기 도망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한다. 그러다가 제나라로 흘러들었는데 제나라 환공은 그를 환대하여 아름다운 아내까지 짝지어 준다.
그러다가 자신을 따르는 충신들에게서 깨우침을 받아 아우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 그러면서
19년 동안이나 자신을 보좌했던 개자추(介子推)를 논공행상에서 그만 깜빡 빼먹고 만다. 이에 개자추는 노모가 계시는 면상산(綿上山 → 후에 介山으로 불려짐)으로 잠적한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중이는 면상산에까지 직접 개자추를 찾아 나섰으나 개자추는 산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문공은 산에 불을 지른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포목소사(抱木燒死)하고 말았다. 문공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해마다 이날에는 전국적으로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찬밥을 먹게 되는 한식(寒食)날이 생기게 되었다.
※참고2.999명을 죽인 앙굴리말라(손가락 목걸이)
멈추는 게 두려운가요 낙오·실패할까 두렵지만 멈추는 순간 지혜 샘솟아
[중앙일보]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7>
#풍경 : 석가모니 당시에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앙굴리말라’. 그는 무려 999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엄지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죠. ‘앙굴리말라’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목걸이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정작 그의 본명은 ‘아힘사’였습니다. ‘해치지 않는 자(不害)’라는 뜻이죠. 착하고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부인이 그를 유혹했죠. 거절하자 부인은 “나를 겁탈하려 했다”며 오히려 그를 모함했습니다. 화가 난 스승은 그에게 엉뚱한 가르침을 내렸죠. “1000명의 사람을 죽여 목걸이를 만들면 해탈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고 ‘아힘사’는 ‘앙굴리말라’가 되고 말았죠.
앙굴리말라는 마지막 희생자를 찾고 있었죠. 한 사람만 채우면 1000명이 되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부처님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석가모니는 길을 가고 있었죠. 뒤에서 칼을 든 앙굴리말라가 외쳤습니다. “멈추어라!” 그러자 석가모니가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멈춘 지 오래됐다. 멈추지 않고 있는 이는 바로 너다.” 그 말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석가모니의 제자가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석가모니는 왜 ‘멈춤’을 말했을까요. 또 앙굴리말라는 왜 ‘충격’을 받았을까요. 사람들은 ‘멈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멈추는 순간, 뒤처지고, 낙오하고, 실패할 거라 여깁니다. 더욱 본질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온전히 멈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멈춤’은 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죠.
그런데 석가모니는 “멈추라”고 했습니다. 뭘 멈추라는 걸까요. 바로 ‘에고의 멈춤’이죠. 사람들은 따지겠죠. “거 봐, 맞잖아. 무한경쟁 시대에 에고가 멈추면 어찌 살라고.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일하고, 치열하게 싸워도 역부족인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겠죠.
그런데 ‘멈춤’을 말한 이는 또 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60)는 “당신이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지혜가 바로 거기 있다. 그러니 고요함이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이끌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또 지두 크리슈타무르티(1895~1986)는 “명상하는 마음은 침묵한다(A meditative mind is silent)”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이 상상할 수 있는 침묵이 아니며, 고요한 저녁의 침묵도 아니다. 그것은 일체의 생각을 ‘멈추었을 때’ 이루어지는 침묵”이라고 덧붙였죠.
대체 뭘까요. ‘멈춤’의 자리에 뭐가 있을까요. 톨레는 “거기에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그걸 ‘반야의 지혜’라고 불렀죠. 그래도 사람들은 반박하겠죠.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살면서 나도 지혜를 터득하잖아”라고 말이죠. 그런데 ‘나의 지혜’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그건 ‘나의 세상, 나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나가 멈춘 자리의 지혜’는 다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왜냐고요? ‘나’라는 테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나’라는 테두리가 없을 때,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무한한 우주에 꽉 차겠죠. 거기서 나오는 지혜, 거기서 나오는 사랑, 거기서 나오는 온유함의 크기를 과연 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멈추라”고 한 거죠. 또 앙굴리말라는 그 말에 무릎을 꿇은 거죠.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죠. ‘내 이웃이 내 몸이 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나가 멈추는 순간’이죠. 오직 그 순간, 이웃이 내가 되죠. 그러니 예수의 사랑도, 부처의 자비도, 톨레의 지혜도, 크리슈나무르티의 침묵도 마찬가지죠. 모두 ‘나가 멈춘 자리’에서 샘솟는 거죠.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2008.05.29 01:08 입력 / 2008.05.29 02:21 수정)
※참고3.침어낙안 (沈魚落雁) ; 여희(驪姬)[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서시는 자신을 발탁한 범려와 함께 도피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 부차가 패망한 후 월왕 구천의 왕후는 서시의 미모 때문에 구천 역시 나라를 망칠까 두려워 서시의 몸에 돌을 매달아 바닷속으로 던져 죽였다는 것이다.
그 후 어느 날 해변에 사람의 혀 모양을 닮은 조개(가리비)가 잡혔는데 사람들이 죽은 서시의 혀와 닮았다 하여 이를 ‘서시의 혀(西施舌)’라고 부르고, 이를 요리로 하여 먹는 것이 복건(福建)요리 중의 명물인 ‘서시 혓바닥 볶음(炒西施舌) ’이라고 한다.
‘서시의 젖(西施乳)’이라는 것도 있다. 복어를 먹을 때, 단골에게만 특별히 생색을 내며 주는 ‘이리’ 또는 ‘곤(鲲)’ 이라는 복어의 정소(精巢;고환)가 바로 그것으로, 복어의 정액 덩어리인 것이다.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폐월(閉月);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리다.]
☆公無渡河歌
★배경설화: 古今注,卷中, 音樂 第三 箜篌引
朝鮮津卒 里子高妻麗玉所作也。子高晨起刺船而擢,有一白首狂夫,被髮提壺,亂流而渡, 其妻隧呼止之,不及,遂墮河而死。於是援箜篌而鼓之作 公無渡河之歌:聲甚悽愴,曲終自投河而死。
里子高還,以其聲語妻麗玉。麗玉傷之,乃引箜篌而寫其聲,聞者莫不墮淚飮泣焉。麗玉以其曲傳鄰女麗容,
★'공무도하가'의 한역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 해동역사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 - 대동시선
公無渡河 公而渡河 公墮而死 將奈公何 - 청구시초
公無渡河 公終渡河 公淹而死 當奈公何 - 연암집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가사명,백수광부(白首狂夫:주신 Dionysos)의 처(악신Nymph)
[정병욱]
공후인(箜篌引)…곡조명,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里子高)의 처
여옥(麗玉)→ 여용(麗容)
★출전
①후한 말(133~192) 편찬된 채옹(蔡邕)의 “금조(琴操)”(설화와 시가)
②서진(西晉) 혜제(惠帝)시(290~306) 최표(崔豹)가 지은 “고금주(古今注)”에 배경설화가 나와 있고,
③가사는 송나라 곽무천(郭茂倩)이 엮은 “樂府詩集” 권제26 相和歌辭에 실려 전함.
[조선 정조 ·순조 때의 사학자(史學者)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임명덕(林明德) 때문]
★물(이별, 죽음)의 이미지가 최초로 사용된 시가
★‘어찌할꼬(當奈公何)’식 별한이 드러난 최초의 시가
→정읍사(井邑詞)→시조→진달래꽃
★백수광부는?
①미숙련된 무부(巫夫)(김학성)
②무당의 권능이 떨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된 사람(조동일)
③술에 취한 주신(정병욱)
★朝鮮津은?
①按朝鮮卽漢時樂浪郡朝鮮縣也(현재의 대동강 남쪽 土城里로 비정)
②장덕순; 우리 노래?
③최신호; 중국 시가로 돌려주어야
(조선진은 중국 直隸省 永平府 盧龍縣 근처)
★李白 (AD. 701-762) 의 공무도하가 :
김종윤 선생 소장 세계시문학 ’99 제17집 (을지출판공사)
☆黃鳥歌
★배경설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명왕(琉璃明王)조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
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황조가(黃鳥歌)'의 한역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성격;
①외로움을 노래한 서정시
②정치적인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노래한 시
③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는 노래
④수렵생활의 사회로부터 농경생활의 사회로 옮겨가는 과정을 말해 주는 노래
⑤우의적(寓意的)
⑥선경후정(先景後情)
★유리왕(類利王):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東明王篇)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으니 / 俶儻有奇節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 元子曰類利
칼을 얻어 부왕의 위를 이었고 / 得劍繼父位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 塞盆止人詈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다.”
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
“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
하였다. 유리가 울며,
“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
“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가 갈 때 말을 남기기를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였다.”
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堂)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
하고 일어나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
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고전 강독(성남문화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古講 14. [李奎報의 麴先生傳 등] (0) | 2009.02.12 |
---|---|
古講 9. 내원성(來遠城) 등 (0) | 2008.12.21 |
古講 7 薛聰 等(史記 列傳) (0) | 2008.12.21 |
古講 6 金現感虎 등 (0) | 2008.12.20 |
고강 5. 조신(調信) 등 (0) | 2008.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