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講 9. 내원성(來遠城) 등
<고려사악지>는 <고려사> (1451년. 문종 1) 권70(志24)과 권71(志25)에 수록된 음악에 관한 기록이다.
志24에는 아악(雅樂)이, 志25에는 당악(唐樂)·속악(俗樂)·삼국속악(三國俗樂)·용속악절도(用俗樂節度) 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고, 삼국 속악 중 백제 조에는 禪雲山, 無等山, 方等山, 井邑, 智異山의 5편, 고구려 조에는 來遠城, 延陽, 溟州의 세 편의 노래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아악(雅樂);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공식적 행사, 그 중에서도 특히 천지신명이나 왕가의 조상에 대한 제사에서 연주되던 노래.
♣당악(唐樂)․ 속악(俗樂 = 향악[鄕樂]); 공식적이지 않은 행사, 특히 잔치를 벌일 때 연주되 던 노래로 그 유래에 따라 당악(중국에서 들어온 것)과 속악(국내에서 생긴 것)으로 구별한다.
☆고구려의 노래 3편
[來遠城]
來遠城在靜州, 卽水中之地. 狄人來投 置之於此, 名其城曰來遠 歌以紀之 |
내원성은 정주(靜州, 지금의 平安北道 義州 부근)에 있는데, 곧 물 가운데 있는 땅이다. 북쪽 오랑캐들이 투항해오면 여기에 두었는데, 그 성을 이름하여 내원이라 하였고, 노래를 불러 이를 기념하였다. |
[참고](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p.114 참조)
1.원래는 군사들이 부르던 민요였을 듯하며,
2.나라의 위엄을 자랑하는 데 소용되었던 노래였을 것이다.
[延陽 延山府(평안북도 寧邊)]
延陽有爲人所收用者 以死自效 比之於木曰 木之資火 必有戕賊之禍 然深以收用爲幸 雖至於灰燼 所不辭也 |
연양에 어떤 남을 위해 일하게 된 자가 있었는데, 죽기를 무릅쓰고 열심히 일했다. 자기를 나무에 비유해서 말하기를 '나무가 불을 도우려면 반드시 죽게 되는 화를 초래하지만, 그래도 쓰여지는 것을 심히 다행으로 생각하고 , 비록 재가 되어 다 타버리기에 이르게 되어도 사양하지 않는다'고 했다. |
[참고](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p.114 참조)
1.남에게 쓰이게 됐다는 것은 노비가 됐다는 뜻일 것이다.
2.원래는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노동요였을 가능성이 크다.
[溟州]
世傳 書生遊學, 至溟州 見一良家女. 美姿色 頗知書, 生每以詩挑之. 女曰 “婦人不妄從人. 待生擢第 父母有命 則事可諧矣.” 生卽歸京師 習擧業. 女家將納壻. 女平日臨池養魚, 魚聞警咳聲 必來就食. 女食魚謂曰 : “吾養汝久 宜知我意!”將帛書投之, 有一大魚 跳躍含書 悠然而逝. 生在京師 一日爲父母具饌 市魚而歸. 剝之得帛書驚異, 卽持帛書及父書 徑詣女家. 壻已及門矣. 生以書示女家, 遂歌此曲. 父母異之曰 : “此精誠所感, 非人力所能爲也.” 遣其壻而納生焉. |
세상에 전하기를, 서생이 외지에서 공부하다가, 명주(溟州; 江陵)에 이르러 한 양가의 딸을 만났다. 자색이 아름다웠고 사뭇 글을 아는 터라, 서생은 매번 시로써 그녀를 유혹하였다. 여인이 말하였다. “여자는 함부로 남자를 따르지 아니합니다. 당신께서 과거에 급제하시고 부모님의 명령이 계시면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서생은 곧 서울로 돌아가 과거시험 공부를 했다. 그녀의 집에서는 바야흐로 사위를 들이려고 하였다. 여인은 평소 연못에서 물고기를 길렀는데, 물고기는 그녀의 기침소리를 들으면 알아듣고 반드시 다가와 먹이를 먹곤 하였다. 그녀는 물고기에 먹이를 주며 말하였다. “내가 너를 키운 지 오래이니, 마땅히 내 뜻을 알겠지!” 하면서 비단에 쓴 서신을 던지니, 한 마리 큰 물고기가 펄쩍 뛰어올라 그 서신을 물고는 유유히 가버렸다. 서생은 서울에서 지냈는데 하루는 부모의 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물고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자르다 비단 서신을 얻고는 놀라서, 즉시 그 비단 서신과 아버지의 서찰을 가지고 곧장 그녀의 집으로 갔다. 사위도 이미 문에 도착해 있었다. 서생은 그 편지들을 그녀의 집 사람들에게 보여주고는, 드디어 이 곡을 노래하였다. 부모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는 정성이 감응한 바이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는) 그 사위를 돌려보내고 서생을 맞아 들였다. |
[참고]
1.2003년 강릉 남대천변에 복원된 '월화정(月花亭)'과 관련된 사랑 얘기가 강릉지역 중요 사료로 강릉읍지에 해당하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전하는데, 주인공은 강릉김씨 시조인 김주원(金周元) 공의 부모인 김 무월랑(無月郞)과 연화(蓮花)부인 박씨다. 사랑을 약속한 화랑 무월랑이 경주로 떠난 뒤 연락이 끊기자 연화부인 박씨가 잉어를 매개로 경주의 무월랑에게 편지를 전하는 내용으로 고려사 악지의 명주(溟州)와 그 내용이 유사하다.
(출전;gangneung.grandculture.net)
2.고구려 때에는 과거 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통일신라 때 생겨 궁중악으로 채택되었다가 고려로 전해졌다고 보는 편이 옳다는 견해가 있다. 고구려악으로 기재되어 있는 까닭은 명주가 옛 고구려 지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p.114 참조)
3.사전 각본에 의한 행동?
☆백제의 노래 5편
[禪雲山]
長沙人征役 過期不至. 其妻思之 登禪雲山 望而歌之 |
장사사람이 부역에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 아내가 남편을 생각하고 선운산에 올라 바라보면서 그 심정을 노래했다. |
[참고]
1.선운산은 지금의 高敞에 있는 산이다.
2.선운사에서 도솔암 쪽으로 산길을 30분쯤 걸어 올라가면 진흥굴이 나오고 그 앞 도로변에는 멋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이곳의 옛 지명인 장사현을 따서 장사송(長沙松)이라 이름붙인 이 소나무는 수령이 600년, 높이가 23미터이다. 한 줄기에서 여덟 가지가 곱게 위로 뻗어 기품 있게 서 있다. 천연기념물 354호로도 지정된 나무이기도 하다.
(엄 동 인. http://bgs.hs.kr ‘도솔암’.2005.10.13)
[無等山]
無等山 光州之鎭 州在 全羅爲巨邑城 此山 民賴以安 樂而歌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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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은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데 큰 읍이다. 이 산은 백성들은 믿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 즐거워서 이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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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일종의 태평가라 하겠다.
2.광주의 옛 이름을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라 해서 이 고을의 진산인 무등산도 일찍이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불러왔다. 입으로 불리기는 무돌뫼,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3.한편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백 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했다 (山西陽崖 數十櫛立 高可百尺山名瑞石 以此)'라며 서석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4.송강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천변(天邊)에 뜨는 구름 서석을 집을 삼아'라 하였고 제봉 고경명도 『遊瑞石錄』을 남겨 무등산을 예찬하고 있어 서석산은 조선시대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즐겨 쓰였던 이름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까지도 무등산의 별칭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등산에는 현재 우리가 서석이라 부르는 서석대 말고도 입석대, 규봉, 그리고 정상 3봉을 비롯한 의상봉, 새인봉, 중봉 등 직립형 돌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돌무더기를 우리 조상들은 '선돌' 또는 '신돌'이라 불렀던 것이니 뜻을 취하면 '立'이 되고 음을 취하면 '瑞'가 되었던 것이다.
5.무등산의 어원에 대해서 몇가지 설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등산의 '무등'은 … '무돌'의 이두음인데, 이 '무돌'에는 옛 농경사회의 보편적 지명인 '물둑(水堤)'이라는 뜻과 순수 우리 옛말의 조어인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고,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도 있겠으나 이미 '무당산' 대목에서 말한 대로 '당산'과 비슷한 음을 따서 한자로 나타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 : http://honey.kwangju.ac.kr/~lovemt/)( http://cafe.daum.net/0mue1에서)
[方等山]
方登山 在羅州屬縣 長城之境 新羅末 盜賊大起 據此山 良家子女多被擄掠 長日縣之女 亦在其中 作此歌 以諷其夫不卽來救也 |
방등산은 나주의 속현인 장성(長城)의 경내에 있다. 신라 말년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이 산에 근거를 두니, 양가의 자녀들이 많이 잡혀갔다. 장일현(長日縣)의 여인 역시 그 가운데 있었는데, 이 노래를 지어 자기 남편이 곧 와서 구출해주지 않은 것을 풍자했다. |
[참고]
1.신라 말기라 한 것으로 보아…이 노래는 후백제 시대의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도적이라고 일컫는 무리는 후백제의 군사일 수 있다. 고려의 입장에서 후백제의 정권이야말로 도적 같은 짓이나 해서 이런 노래가 생겼다고 하면 명분이 선다.
2.도적떼가 성한 판에 남편인들 어쩔 도리가 없다. 오히려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면 더 어울린다. 백성의 민요를 채택하면서 사연이나 사설을 바꾸어 놓을 때 다소 무리가 생겼을 수 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p.117)
[井邑]
(前 腔)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 葉) 아으 다롱디리
(後腔全)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랄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過 編) 어느이다 노코시라
(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 졈그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 葉) 아으 다롱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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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이시여 높이높이 돋으셔서 멀리멀리 비취고계십시오.
시장에 가계신가요 진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다가라도 놓고계십시오.
내가 가는 곳에 저물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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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의의
① 현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② 국문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
③ 시조 형식의 원형을 지닌 노래 (←전연시, 여음구를 제외하면 내용상 3연 6구)
♣망부상
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여 그 아내가 올랐던 고개 등점산(登岾山)에 망부석(望夫石)이 있었다고 한다. 신증(新增) 동국여지승람에는 在縣北十里라 하였으나 지금까지 그 위치는 자세히 알 수가 없고, 현재에는 내장산 월령봉 밑 푸른 잔디 위와 정읍사공원(井邑詞公園) 2군데에 망부상이 세워져 있다.
♣기타
1. '全져재'의 '全'자를 전주(全州)의 지명으로 보고, 백제 시대의 완산주(完山州)를 신라 경덕왕 때 전주로 개명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동국여지승람 권 32 전주부), 경덕왕 때 이후 내지는 고려 시대 구백제지방의 민요로 보기도 한다.
2.조선 시대에 와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인 나례(儺禮) 후에 거행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악학궤범 권 5).
3.이와 같이 <악학궤범>에 채록되어 악장(樂章)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 하여 궁중에서는 폐지되고 새로 만든 악장인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용하였다(중종실록 13년 4월조).
4.제 2연의 어절 풀이에서 첫음절을 '져재' 또는 '全져재'로 보는 두 갈래의 학설이 양립되어 있으나, '후강전(後腔全)'까지를 악조명으로 보고 가사 본문을 '져재'로만 보기에는 음악적인 또는 시가 형태적인 면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고, 또한 '全져재'로 보는 쪽에서도 종전에는 그 뜻을 '전주저자에'로만 해석하였으나 '온 저자에'라고 보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
5.즌'는 '진 데', '진 곳' 즉 '수렁물(진창물)이 고인 곳'으로 해석되어 이 말의 상징적인 뜻은 주색(酒色) 또는 화류항(花柳巷)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렁과 같은) 주색에 빠지면 어쩌나(빠질까 두렵소이다그려)' 하는 속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6.'어느이다'를 '어늬다'로 보고 '어느 곳에다가' 또는 '어디에나(어느 곳에나)'로 해석하는가 하면, '어이다' 또는 '어쩌다(자칫하면)'로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누구에다' 혹은 '어느 것에다'로 해석하기도 하나 '어느 것이나 다(무엇이나 다)'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7.산 이름을 딴 것이 넷이나 된다. 산으로 들어가 살아야만 했거나 산에 올라가서 원통한 사연을 하소연했다는 데서 백제로부터 유래한 정서의 독특한 기풍이 드러난다. 또한 「무등無等山」을 제외한 나머지 네 편은 모두 여인이 지어 불렀다고 하면서 여인이기에 가중되는 고난을 애절하게 나타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p.116)
☆신라의 노래
[兜率歌]
1.儒理王 兜率歌
“是年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삼국사기 나기1. 유리이사금 5년[A.D.28]조)
1)歌樂의 처음(趙芝薰, 「신라가요연구논고」,『민족문화연구』1집,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64, pp.154-165 참조)
2)‘이 노래(此歌)는 악의 처음(樂之始也)’이라고 풀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향가 중에서도 사뇌가는 특히 樂으로서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처음 작품이 「兜率 歌」라는 말이겠다. 『三國史記』에는 ‘歌, 樂, 曲, 舞’ 등으로 불리는 작품명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三國史記』35, 雜志1, 「樂」條 참조.), 사설을 갖추고 있는 노래는 歌, 기악곡은 曲, 춤으로 된 것은 舞, 그리고 樂은 이 셋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라 한다.(趙東一 『韓國文學通史1』, 知識産業社, 1982, p.122 참조.)…
‘此歌樂之始也’를 ‘此歌는 樂之始也’라고 띄어 읽은 견해에는 洪在烋의 것도 있으나(洪在烋, 「兜率歌攷」, 『韓國傳統文化』創刊號, 曉星女大, 1985 참조.) ‘樂’을 ‘樂章’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歌, 曲, 舞가 함께 들어있는 樂이 後代에 가서 樂章으로 사용되기는 했겠지만, 1세기에 벌써 樂章이 생겼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尹用植은 “신라 1000년, 고려조 500年間의 국문학 중에서는 樂章이라는 문학 형태가 없었고 지금껏 논의된 일도 없는 것으로 안다.”(尹用植, 「兜率歌(儒理王代)의 解釋」,『韓國文學史의 爭點』,集文堂, 1986, p.114.)고까지 강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나, 신라 그것도 1세기에 樂章이 있었을까 하는 데에는 疑心이 가지마는 高麗朝에는 分明 樂章이 있었다. 자세한 考證까지는 그만두고라도 『高麗史』「樂志」의 「太廟樂章條」만 보아도 이는 증명되는 일이다.
2.月明師 兜率歌(附 祭亡妹歌)
月明師兜率歌 景德王十九年庚子四月朔. 二日並現. 挾旬不滅. 日官奏請. 緣僧作散花功德則可禳. 於是潔壇於朝元殿. 駕幸靑陽樓. 望緣僧. 時有月明師. 行于阡陌. 時之南路. 王使召之. 命開壇作啓. 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王曰. 旣卜緣僧. 雖用鄕歌可也. 明乃作兜率歌賦之. 其詞曰.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解曰.
龍樓此日散花歌. 挑送靑雲一片花. 殷重直心之所使. 遠邀兜率大僊家.
今俗謂此爲散花歌. 誤矣. 宜云兜率歌. 別有散花歌. 文多不載. 旣而日 恠卽滅. 王嘉之. 賜品茶一襲, 水精念珠百八箇. 忽有一童子. 儀形鮮潔. 跪奉茶珠. 從殿西小門而出. 明謂是內宮之使. 王謂師之從者. 及玄徵而俱非. 王甚異之. 使人追之.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慈氏像前. 知明之至德至誠, 能昭假于至聖也如此. 朝野莫不聞知. 王益敬之. 更絹一百疋. 以表鴻誠.
明又嘗爲亡妹營齊. 作鄕歌祭之. 忽有驚颷 吹紙錢, 飛擧向西而沒. 歌曰.
生死路隱 此矣有阿八次 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 彌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明常居四天王寺. 善吹笛. 嘗月夜吹過門前大路. 月馭爲之停輪. 因名其路曰月明里. 師亦以是著名. 師卽能俊大師之門人也. 羅人尙鄕歌者尙矣. 蓋詩頌之類歟. 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非一.
讚曰.
風送飛錢資逝妹. 笛搖明月住姮娥. 莫言兜率連天遠. 萬德花迎一曲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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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76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깨끗이 하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거둥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밭두둑 남쪽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계(啓)를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뢰었다. "신승(臣僧)은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단지 향가(鄕歌)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은 익히질 못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비록 향가라도 좋소." 월명이 이에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는데 가사는 이러하다.
오 이 散花 블어, 고자 너는, 고 命ㅅ 브리디, 彌勒座主 뫼셔롸.
풀이하면 이렇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散花)를 불러, 청운(靑雲)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가(兜率大僊家)을 맞으라.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을 산화가(散花歌)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산화가(散花歌)는 따로 있는데 그 글이 번다해서 싣지 않는다. 이미 일괴(日恠)가 사라지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 이때 갑자기 동자(童子) 하나가 나타났는데 모습이 곱고 깨끗했다. 그는 공손히 차[茶]와 염주(念珠)를 받들고 대궐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月明)은 이를 내궁(內宮)의 사자(使者)로 알고, 왕은 스님의 종자(從者)로 알았다. 그러나 서로가 징험한 것이 모두 틀린 것이었다. 왕은 몹시 이상히 여겨 사람은 시켜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 탑 속으로 들어가 숨었고 차와 염주는 남쪽의 벽화(壁畵) 미륵상(彌勒像) 앞에 있었다.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능히 미륵보살을 소가(昭假)시킴이 이와 같아서 조정이나 민간에서 그 소문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왕은 더욱 공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 큰 정성을 표시했다.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갑자기 놀랄 만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불어서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 향가는 이러하다.
生死路 예 이샤매 저리이고, 나 가다 말ㅅ도
몯다 닏고 가닛고. 어 이른 매 이 저 딜 닙다이, 가재 나고 가논 곧 모온뎌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道 닷가 기드리고다.
월명은 늘 사천왕사(四天王寺)에 거하였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이 때문에 그 길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이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대개 시(詩)ㆍ송(頌)의 부류와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보내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를 멈추게 하였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에 잇닿아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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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月明師의 성격
1.二日並現
2.時之南路
3.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童子, 能昭假于至聖也如此 朝野莫不聞知.)
♣향가의 의의
1.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문학이다.
2.향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가이다.
3.향가는 국민문학이다.
1)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三國遺事5, 感通7, 月明師 兜率歌 條)
2)羅人尙鄕歌者尙矣.(上揭書)
3)夫詞腦者 世人戱樂之具(均如傳, 第七歌行化世分)
4)依二五大願之文 課十一荒歌之句 慙極於衆人之眼(上揭書)
5)右歌播在人口 往往書諸墻壁(上揭書)
♣향가의 형식
1.4구, 8구(小倉進平)
2.4구, 10구(土田杏村)
3.4구, 8구, 10구…(2)→4→(6)→8→10(趙潤濟)
4.4구, 8구, 10구(梁柱東)
5.詩搆唐辭 琢磨於五言七字
歌排鄕語 切磋於三句六名(均如傳 第八譯歌現德分. 崔行歸 序文)
1)3장 6구?
2)句=名=音步
3)3名句體(4행), 6名句體1(4행), 6名句體2(5행)(李雄宰. 鄕歌에 나타난 庶民意識. 白文社, 1990.)
4)音步의 발전과정와 장르史
鄕歌 → 高麗俗謠 → 景幾體歌 → 時調․ 歌辭
(3명구 (3명구) (3명구+ (4명구)
6명구) 4명구 1행)
(李雄宰. 鄕歌에 나타난 庶民意識. 白文社, 1990.)
[安民歌(附 讚耆婆郞歌)] (三國遺事2 紀異제2 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條)
德經等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徜徉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負櫻筒.(一作荷簣.)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茲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甌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甌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 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遺只於冬是去於丁爲尸知 國惡支持以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諡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祜.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有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鄰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冲故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故. 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修爲宣德與金良相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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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에서) 덕경(德經) 등을 보내 오자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神)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 나가 위의(威儀) 있는 중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고승(高僧) 한 사람이 길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바라보다가 데리고 와 보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중이 아니다" 해서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납의(衲衣;중이 입는 검은색의 옷 )를 입고 앵통(櫻筒; 혹은 荷簣라 함)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小僧)은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나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내게도 또한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소?" 중이 곧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범상하지 아니하고 찻잔 속에서도 이상한 향기가 물씬 풍긴다.
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讚美)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무척 고상(高尙)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은가요." (충담사가 대답하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곧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은 아름답게 여기고 왕사(王師)로 봉했는데, 충담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이러하다.
君은 어비여, 臣 샬 어여. 民 얼 아고 샬디
民이 알고다. 구믈ㅅ다히 살손 物生
이흘 머기 다라 이 리곡 어듸 갈뎌 디
나라악 디니디 알고다 後句 君다이 臣다이 民다이 ,
나라악 太平니다.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
열치매 토얀 리 구룸 조초 가 안디하
새파 나리여 耆郞 즈 이슈라 일로 나릿 郎 디니다샤온 좃누아져 아으 자시 가지 노파 서리 몯누올 花判이여. 왕(王)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王妃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에 봉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의 시호(諡號)는 경수태후(景垂太后)이니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었다. 왕은 어느 날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서 후사(後嗣)를 얻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 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 왕께 아뢰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부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왕은 말한다. "원컨대 딸을 바꾸어 아들로 만들어 주시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제께 청하자 천제는 말한다.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아들이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고 하자 천제는 또 불러 말한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지금 대사(大師)가 이웃처럼 왕래하듯이 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의당히 다시는 다니지 말도록 하라." 표훈은 돌아와서 천제의 말대로 깨우쳤으나 왕은 말한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대를 잇게 하면 만족하겠소." 이리하여 만월왕후(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8살이 되자 왕이 죽어서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나이가 어린 까닭에 태후(太后)가 섭정(攝政)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루 갖추어 막을 수가 없었으니 표훈 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어린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시해(弑害)를 당하였고, 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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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신라의 오악은 동쪽 토함산, 서쪽 계룡산, 남쪽 지리산, 북쪽 태백산, 그리고 중앙의 공산을 지칭한다. 삼산신의 삼산은 내력(奈歷; 지금의 경주), 골화(骨火; 지금의 영천), 혈례(穴禮; 지금의 청도)이다.
♣忠談師의 성격
1.從南而來
2.南山三花嶺에는 生義寺(今訛傳性義寺)가 있었다.(三國遺事3, 塔像4, 生義寺石彌勒 條)
南山 東麓에는 避里村이 있었고, 그 避里村에는 避里寺와 讓避寺가 있었다.
(三國遺事5, 避隱8, 念佛寺 條)
3.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4.君다이 臣다이 民다이 , 나라악 太平니다.
[致唐太平頌]
四年 夏四月 下敎 以眞骨在位者 執牙笏 六月 遣使大唐 告破百濟之衆 王織錦作五言大乎頌 遣春秋子法敏 以獻唐皇帝 其辝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用 撫運邁時康 幡旗何赫赫 鉦鼓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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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650) 여름 4월에 왕이 명을 내려 진골(眞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牙笏)을 갖게 하였다.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무리를 깨뜨린 사실을 알렸다. 왕이 비단을 짜서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보내 당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높디높은 황제의 모책(謀策)이 창성(昌盛)하도다. 전쟁을 그치니 군사들은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며 백왕(百王)이 뒤 잇는다. 하늘을 본받으니 귀한 비 내려오고 만물을 다스리니 저마다 빛나도다. 깊은 인덕(仁德)은 일월과 조화롭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時康]으로 매진(邁進)하네. 나부끼는 깃발은 어찌 저리 번쩍대고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 그리 우렁찬가! 외이(外夷)로서 명령을 어기는 자는 자르고 뒤엎어 천벌을 받게 하시네. 순후한 풍속은 곳곳에 드러나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사철이 밝은 해(玉燭)처럼 조화롭고 칠요의 광명(해와 달)은 만방에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는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정사를 충신들께 맡기었다. 삼황오제(五帝三皇)의 덕을 한가지로 이루어서 우리를 불러 주시네 황제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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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笏 ;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
玉燭; 사철의 기후가 고르고 날씨가 화창하여 해와 같이 훤히 비치는 모양.
七政;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참고]
1.650년 김춘추(金春秋)의 아들 법민(法敏)으로 하여금 당나라에 바치게 한 것으로 여왕이 직접 비단에 이 시를 수놓았다고 한다. 태종[太宗]에게 지어 보낸 것이지만, 태종이 그사이 죽어, 다음 황제인 고종[高宗]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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