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수필 쓰기 20) 기행문 쓰기

거북이3 2009. 4. 12. 12:22

(수필 쓰기 20)  기행문 쓰기


                                                                      이   웅   재

                                                                        

 우리는 ‘인생행로’라는 말을 자주 쓴다. 우리는 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걸었고 오늘도 걷는다. 내일도 또 걸을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언제나 길 위가 된다. 이렇게 ‘삶’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다 보니,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여행객이다. 이태백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로다).’고 하여, 사람뿐만 아니라 세월을 비롯하여 온 만물이 나그네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세상사 어느 하나 여행길에서 겪게 되는 일 아닌 것이 없겠지마는, 좀더 범위를 좁혀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여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좁은 의미의 여행을 한번 생각해 보자. 가다 보면 산도 있고 물도 있고, 바위도 있고 초목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우리를 외롭고 쓸쓸함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발광하게 만들어주는가 하면, 더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분 속으로 침잠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여행을 좋아한다. 여건만 허락한다면 언제라도 떠나고 싶어한다. 왜 떠나려고 하는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적 충족감이나 정서적 만족감, 그런 것에서부터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와 같은 탐험의 의미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행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늘 되풀이되는 익숙함을 벗어나서 낯설고 어설프기는 하지만 드물게 마주치게 되는 새로움 또는 신선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와 같은 여행에서의 기록이 곧 기행문이다. 기행문의 한자는 ‘紀行文’이다. ‘記行文’이라고도 쓰지만, ‘紀行文’이 옳은 표기다. ‘記’는 ‘기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紀’는 ‘벼리’, 곧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 놓은 줄, 잡아당겨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기록하는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물을 마음대로 오므렸다 폈다 하듯이 사람의 마음을 그처럼 조종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다 보는 것, 남들이 다 듣는 것 따위만을 써서는 안 된다. ‘紀’는 다시 ‘奇’와 통해야 하는 것이다. 꼭 ‘기이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뛰어난 것’, ‘특별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 비록 자질구레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만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써야 하는 것이다. ‘특이한 체험’, ‘새로운 체험’을 중심으로 그것을 재구성하여 주제 의식을 살리고 흥미롭게 서술해 나가는 것이 기행문 쓰기의 요체라고 하겠다.


 옛날 ‘소금장수의 백상루 구경’이라는 글을 한번 보자.


안주(安州) 백상루(百祥樓)는 빼어난 풍경을 지닌 관서 지방의 누각이다. 중국 사신이 오거나 우리나라 사람이 공무로 지나가게 되면, 누구든지 이 누각에 올라 풍경을 감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덕수(德水) 이자민(李子敏, 이안눌)이 “수많은 산들이 바다에 이르러 대지의 형세는 끝이 나고, 꽃다운 풀밭이 하늘까지 이어져 봄기운은 떠오른다.”라고 시로 읊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어떤 상인이 소금을 싣고 가다가 이 누각을 지나게 되었다. 때는 겨울철로 아침 해가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다. 상인은 누각 아래 말을 세워 놓고 백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긴 강에 깔린 얼음장과 넓은 들을 뒤덮은 눈뿐이었다. 구슬픈 바람은 휙휙 몰아오고, 찬 기운은 뼈를 에일 듯 오싹해서 잠시도 머물 수 없었다. 그러자 상인은 “도대체 백상루가 아름답다고 한 게 누구야?”라고 탄식하며 서둘러 짐을 꾸려서 자리를 떴다.


 저 백상루는 참으로 아름다운 누각이다. 하지만 이 상인은 알맞은 철에 놀러 오지 않았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듯이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알맞은 때가 있으며, 만약에 알맞은 때를 만나지 않는다면, 저 백상루의 경우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가죽옷은 천하의 귀한 물건이지만 무더운 5월에 그것을 펼쳐 입는다면 가난한 자의 행색이 되며, 팔진미(八珍味)가 제 아무리 맛이 좋은 음식일지라도 한여름에 더위 먹은 사람을 구하지는 못한다. 황금과 구슬, 진주와 비취는 세상 사람들이 보석이라고 일컫는 물건이지만, 돌보지 않아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 그런 황금과 옥으로 치장을 하고 앉아 있다면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농사짓는 집의 여인이 짧은 적삼에 베치마를 입었으면서 그 위에 구슬과 비취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면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

 무릇 이러한 것들이 다 겨울에 백상루를 구경한 소금장수와 다르지 않다.

   -선조 광해군 연간의 선비 권득기(權得己)의『만회집(晩悔集)』중「염상유백상루설(鹽商遊百祥樓說)」에서


소금장수의 백상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른 봄 새싹이 움터 오르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온통 허공을 파아란 색으로 물들이는 가을바람의 신선함도 볼 줄 알아야 한다. 한여름 쑥쑥 자라나는 나뭇가지들의 싱그러움도 냄새 맡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한겨울 사오락사오락 내리는 함박눈의 정겨운 사연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없으면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았던가?


 기행문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꼭 들어가야 한다.

 첫째는 여정(旅程)이다. 여행의 동기나 목적을 명시할 수도 있을 것이요, 누구와 어디어디를 다녔다는 일정, 날씨 등이 언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떠나는 즐거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 따위가 서술되어야 한다. 이는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띠는 부분이다. 대체로 기행문의 첫 대목이 되는데, 지나치게 딱딱한 내용으로 일관되어서는 읽을 맛이 나지 않으니 이런 점에 주의할 일이다.

필자의 “월출산 탐방기”의 일부 ‘승용차 바퀴에 깔린 '인재(人才)가 국부(國富)다'를 보인다.

                                                                                

 이틀째 계속되는 황사(黃砂) 현상으로 서울을 비롯한 몇몇 지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휴업 조치까지 내려졌다. 며칠 전 공주(公州)의 상가(喪家)에서 밤을 꼬박 새우는 바람에 슬금슬금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하던 것이 사상 초유의 황사 현상과 결탁하여 내 몸을 여기저기서 공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계획했던 영암(靈岩)의 월출산행(月出山行)을 포기할 순 없었다. 억지로 몸을 추스려 고속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으나 머릿속은 계속 멍한 상태였다. 창 밖을 바라보니 신문지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리면서 달리는 차량들에게 치이고 있었다.

 ‘인재(人才)가 국부(國富)다’라는 조선일보의 기획 기사도 승용차 바퀴에 깔렸고, ‘가계 빚 2,300만 원’도, ‘물가․무역 수지 빨간 불’도 찢기며 흩어지며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바람은 긍정적인 기사나 부정적인 기사를 가리지 않고 휘날리게 했고, 달리는 자동차들은 ‘중도 좌파 정당 새판’도 찢어 버렸고, ‘현 민주당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모 민주당 대선 후보의 정견도 묵사발을 만들고 있었다. 황사 바람 앞에서는 그 모두가 무용지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자연 현상 앞에서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그 어떤 인위적인 계획이나 의도들도 무력화(無力化)되고 있었다.



 둘째는 견문(見聞)이다.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는 것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나의 체험을 읽는 사람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객관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묘사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글의 문학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하겠다. 사진이나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인용 따위도 끼어들 수 있을 것이다. 옛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기 위해서는 서거정(徐巨正) 등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를 이용할 수도 있고, 꽃이나 나무 따위에 대한 언급은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지방 특유의 풍토색,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토산물, 명승고적 따위에 얽힌 역사적 사실이나 일화 들을 소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딱딱한 고증만을 일삼으면 수필로서의 자격은 상실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재미있었던 에피소드 따위가 소개된다면 훌륭한 기행문이 될 것이다.

 한용운(韓龍雲)의 ‘명사십리행(明沙十里行)’을 보자.


원래로 산은 물을 임(臨)하여 더욱 기이하고, 물은 산을 만나서 다시 아름다운 것인데, 삼방 유협은 물을 지음쳐서 나누지 아니한 산빛이 없고, 산을 안고 돌면서 흐르지 않는 물소리가 없다.

 그러므로 한 손으로 방울지어 떨어질 듯한 푸른 산빛을 움키려다가 미처 움키지 못하고 다시 가늘다가 높아지면서도 곡조를 이루지 못하는 맑은 시내 소리를 들으며 시내 고기의 뛰노는 것을 보다가 산새의 울음을 듣게 된다.

 시내로는 언덕이요, 산으로는 끊어진 곳이다. 풀과 나무 우거진 사이에 이름 없는 산꽃들이 많이 피었는데, 이름 아는 꽃이라고는 도라지꽃뿐이다. 이름 아는 꽃이 종류로는 하나이나 수효로는 많다.

 도라지꽃은 모든 꽃 중에 7,8분을 점령하였는데, 많을수록 아름답고 볼수록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이유든 무슨 주관적은 아니었다. 만일 그것이 무심(無心)이라면 도라지꽃의 나를 보는 것도 나의 도라지꽃을 보는 것과 같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삼방 유협은 시(詩)의 재료가 아니라 시요, 그림의 모델이 아니라 그림이다.


 셋째는 감상(感想)이다. 나그네로서 느끼게 되는 객창감(客窓感)이 서정적으로 드러난다면 금상첨화, 오래도록 감명을 줄 수 있는 명문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비석(鄭飛石)의 ‘산정무한(山情無限)’을 보자. 다 읽고 난 후에도 마음속에 여운을 남기는 이 결말 부분은 바로 기행문도 훌륭한 문학작품이라는 점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왕오천축국전은 중국의 남쪽 광주(廣州)에서 해로로 남지나해를 돌아 동부 인도로 들어가서, 먼저 나체국(裸體國)을 구경하는 데에서부터 기행이 시작되어 오천축국을 둘러보고,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페르시아 지역을 지나 소련의 영토인 중앙아시아 지방, 곧 파미르 고원 지방에까지 발길이 이어지는 방대한 기행문이다.

 여행 기간은 723년부터-727년까지이며, 40여 개 지역의 견문과 전문을 개괄하였으므로, 그 내용은 소략하다. 정수일 교수는 ‘왕오천축국전’이 원래 상․중․하 세 권으로 돼 있었다는 당나라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의 기록이나 이 책에 주석된 85개의 어휘를 비교해볼 때, 나진옥(羅振玉)의 견해대로 그 세 권의 원본을 축약한 절략본(節略本)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동안 이 책이 언어표현이나 문법구조상 평가 절하됐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왕오천축국전은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효시라는 점 말고도 한국문학사에서 지대한 의의를 지닌다. 노정기 속에 서정시를 넣어두는 방식을 사용하여 후세 기행문의 전범을 보인 글이기도 하다. 모두 다섯 수의 한시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읽으면 젊은 구도자의 마음의 변화를 생생하게 읽을 수가 있다. 최치원(857∼?)이 당나라에서 활동한 시기보다도 무려 110년 이전에 지어진 글로서 세계 4대 여행기로도 손꼽히며 또한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 4대 여행기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13세기 후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초반의 오도록의 “동유기” 그리고 14 세기 중반의 “이븐바투타 여행기'”를 손꼽는데, 그  중에서도 혜초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고,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니,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기행문의 종주국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다.

 그 서두 부분의 한 대목만 보기로 하자.


… 맨발에 나체며 외도(外道; 異敎徒)라 옷을 입지 않는다. 한 달 뒤에 구시나국(拘尸那國; 지금의 카시아[Kasia])에 도착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그 성은 황폐되어 사람이라곤 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선사 한 사람이 그곳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 탑의 서쪽에 한 강이 있는데 이라바티수(伊羅鉢底水-Airavati)라 한다. 남쪽으로 2천리 밖을 흘러 항하(恒河;갠지스[Ganges] 강의 한자어)로 들어간다.

 그 탑 사방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매우 거친 숲만이 우거져 있다. 그곳으로 예배를 보러 가는 사람은 (간혹) 물소와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 …

 이 나라(파라나시국)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같이 시행되고 있다. 마하보리사를 예방하는 것은 나의 평소부터의 숙원이라 할 수 있기에 매우 기쁘므로 그 어리석은 뜻을 대략 서술하여 오언시를 짓는다.…


 이와 같은 기행문은 그 문학성보다도 정보성에 더 큰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성과 관련되어서는 오랜 동안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을 다녀왔던 기록들이 그 대종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외관계를 보면, 대중국은 사대, 대일본은 교린이었다. 사대가 주종관계임에 비하여 교린은 대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물론 중국과의 사대관계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일본과의 대등은 반대로 조선이 스스로 우위를 자처했고 일본에서도 그것을 인정해 왔었다.

 중국과의 사행록 명칭도 대명 관계의 사행록은 천조(天朝)인 중국에 조견(朝覲)한 기록이란 뜻으로 『조천록(朝天錄)』이라 하였으나 대청 관계의 사행록은 연경[북경]에 사행한 기록이란 뜻의 『연행록(燕行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연경에 한 번 다녀오려면 통상 6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黃元九 “국역 연행록선집 Ⅰ” 해제에서 발췌)

 먼저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를 보자.


강을 건너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이다. 요동 들판에 들어서면서부터 오가는 거마가 더욱 많아지는데 모래 또한 더욱 가늘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문득 안개처럼 휘날려 뒷사람이 앞사람을 보지 못한다. 관내(關內)가 더욱 심하여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바퀴 사이에 부딪쳐서 재처럼 휘날리니, 옷과 모자에 붙으면 금방 얼굴 모습이 변하여 동행하는 이도 거의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이 머리나 수염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에 들어가면 바작바작 소리가 나며, 겹겹이 싼 농이나 거듭 봉해놓은 병 속까지도 모두 뚫고 들어가니 지극히 괴이쩍다 할 일이다. 시장이나 인가에선 물건들을 닭 꼬리로 만든 비로 쉴 새 없이 털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한 치나 쌓이게 된다. 북경성의 큰 거리는 물을 뿌려서 적시고 있다. …

 인가에는 변소가 없다. 소변과 대변을 모두 그릇에 받아서 버린다. 북경의 성안 후미진 거리에는 가끔 깊은 구덩이가 있다. 이곳은 곧 인가의 똥을 버리는 곳이며, 가득 차면 밭으로 실어 낸다. 소변 그릇은 모양이 오리 같으며, 그 주둥이는 주전자같이 생겼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보면 간혹 술그릇인 줄 알고 마시기도 하는데, 호인(胡人) 역시 우리나라 요강을 얻으면 밥그릇으로 쓴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대조이다.

                -김창업의 『연행일기』 중 「산천풍속 총록(山川風俗總錄)」에서


다음은 박대양(朴戴陽)의 『동사만록(東槎漫錄)』을 보자. 『동사만록(東槎漫錄)』은 갑신정변 직후에, 봉명사신으로 일본에 갔던 정사 서상우(徐相雨)의 종사관이었던 박대양(朴戴陽)의 문견 및 소감을 적은 여행기이다.


길원(吉園)ㆍ유교(柳橋)는 기녀(妓女)를 기르는 곳이다. 기녀에는 색기(色妓)와 예기(藝妓)의 구별이 있다. 색기는 문에서 외인을 받아들여 창부(娼婦) 노릇하게 맡겨 두고, 날짜를 계산하여 세금을 받아 공용(公用)에 보충한다. 예기가 남과 사통하다가, 만약 순사에게 붙잡히면 벌금 40~50원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세 번 거듭 현장에서 붙잡히면 징역을 살린다.

 무릇, 떼 지어 술 마시고 밤에 이야기 하는 일은, 오후 10시를 지나지 못한다. 만약 혹시 시간을 넘게 되어 또한 순사에게 붙잡히면, 벌금을 바치고야 풀려난다.

 무릇, 제택(第宅)을 다듬는 일은 정묘의 극치를 다하여, 나무 하나 돌 하나에도 다 눈의 슬기와 손의 기교를 거친다. 다만 방안에는 반드시 기둥 하나가, 깎지도 않고 다듬지도 않은 채 굴곡이 있고 예스럽고 기이하여 (다른 구조와) 격식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여러 집을 두루 보아도 집집마다 이런 것이 있었다. 그곳 사람에게 물으니, 운치(韻致)가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행을 설치한 뒤부터는, 비록 공경재상(公卿宰相)같이 호귀(豪貴)한 사람이나 부상대고(富商大賈)라도 집에 재산을 쌓아 두는 일이 없고, 다 은행에 맡겨두고 소용에 따라 계산해 찾아 쓴다. 그러므로 집에 갖고 있는 집물(什物)은 복식(服飾)과 그릇과 일용품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그 나머지는 텅 비어 있다. 그런 까닭에 비록 화재가 있을지라도 다만 집만 태울 뿐 가산(家産)에는 미치지 않는다.

 신호ㆍ동경 두 곳의 음료수는 다 수백 리 밖의 달고 시원한  샘물을 홈통으로 물을 끌어서 물이 땅속으로 지나가게 하고는, 골골샅샅이 기계를 설치하고 집집마다 우물을 두고서 마르는 일 없이 쏟아지게 한다. 그러므로 다른 곳 사람들이 동경ㆍ신호의 사람들을 지목하여 ‘수돗물 마시는 사람’이라고 한다.

                                         -박대양의 『동사만록』중 「동사기속(東槎記俗)」에서


 기행문을 쓸 때에는 먼저 문학작품인 수필로서의 기행문을 쓸 것인가, 아니면 지식이나 정보 전달 위주의 실용문으로서의 기행문을 쓸 것인가부터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여러 소제목을 두고 그 소제목 밑의 글들을 각각 독립적인 주제로 서술하면서 전체적으로도 유기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장편의 기행문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여행 기일이 비교적 긴 외국 여행인 경우, 이러한 방식의 기행문을 쓰면 좋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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