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22) 표준어 사용의 중요성
이 웅 재
언어란 늘 변한다.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의 역사성과 사회성이다. 예컨대 ‘디새’라는 고어를 보고 그것이 현대어 어떤 말과 상응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디새>지새>지>지애>지와>기와[瓦]’로 변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공자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언어란 늘 변한다. 대체로 그것은 1세대 단위로 심한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30년쯤에서 한 번씩 표준어 규정이라든가 맞춤법 규정을 수정해줄 필요가 있다. 한글에 대한 맞춤법 통일안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33년이다. 그런데 2세대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수정이 되었다. 1988년이 되어서야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새로 개정 고시되어 1989년 3월 1일부터 새로운 규정에 의해 쓰이도록 된 것이다. 그러니까 56년이 지나서야 수정이 된 것이니,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하여 얼마나 등한시하여 왔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맞춤법’도 법이다. 다른 법들은 그것을 위반하면 감옥엘 간다든가 벌금이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든가 하는 실질적인 제약이 따른다. 그런데 맞춤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받게 되는 법적인 처분은 없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까짓 맞춤법쯤이야 조금 틀리기로서니….’ 하는 안일한 생각에 젖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은 하루빨리 고쳐야 하리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보자. 시험공부를 하는 형제에게 그 어머니가 과일 한 접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이거 나눠 먹고들 공부해라.” 그 소리를 들은 형은 동생에게는 딱 한 개만 주고 자기 혼자서 그 과일을 거의 다 먹어버렸다.
동생이 항의했다.
“엄마가 나눠 먹으라고 했잖아?”
형이 대답한다.
“그래, 나눠 먹으라고 했지, 그래서 나눠 먹었잖아?”
동생이 말한다.
“형 혼자 거의 다 먹고 나한테는 딱 하나만 줬잖아?”
“그래서?”
“엄마 말을 안 지켰잖아?”
형이 말한다.
“야 임마, 너는 나눠 먹는다는 말도 모르냐? 나눠 먹는다는 것은 노나 먹는다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다. 노나 먹는다는 것은 똑같이 등분해서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나눠 먹는다는 것은 아주 쬐끔만 떼어 줘두 된다는 말이다, 알겠냐?”
그렇다. ‘나누다’라는 말과 ‘노느다’라는 말은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까짓 과일 정도를 먹을 때에야 뭐 그리 큰 문제일 것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대재벌의 유산 상속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맞춤법이나 표준어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젊었을 적에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처음 충무에 도착해서 자장면을 사 먹은 다음의 일이다. 자장면 값을 지불하고 났더니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주인이 묻는다.
“주리 받았능교?”
“?”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했다.
주인이 다시 말한다.
“주리 받았느냔 말이오.”
주리, 주리?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어서 눈치로 때렸다.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스름돈밖에는 없는 것, 해서 대답했다.
“안 받았는데예.”
그랬더니 주인은 내게 거스름돈을 내 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주리’는 ‘우수리’란 말의 사투리였던 것이다. 표준어를 써야 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었다. 전라도 지방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 ‘질이 길다.’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힘든 말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길이 질다.’는 뜻인데, ‘길>질’은 사투리에서의 구개음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요, ‘길다>질다’는 그 구개음화하고는 정 반대의 현상인 부정회귀(不正回歸) 때문에 그처럼 이해하기 힘든 표현으로 둔갑한 예가 되는 것이다.
다시 하나의 예. 필자가 썼던 원고지 7매 정도의 짧은 수필 작품 하나를 보자.
[사투리도 모르는 국어 선생]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경상도 지방의 모 여중고의 국어 교사로 부임했다. 여학교의 총각 선생은, 생긴 것에 비해서 인기가 좋았다. 숙직 때면 학생들이 먹을 것을 산더미처럼 조달을 했고, 통금 시간 전에 그들을 내쫓는 일이 당시에는 가장 큰 문제였다.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 생각하여 여학생들의 관심도 꺼 버릴 겸, 나는 마음에 드는 여선생님에게 ‘날짜’ 신청을 했다. ‘날짜’, 영어로는 ‘데이트(date)’였다. 여선생 왈,
“언제예.”
아하, ‘언제’ 만나자는 말을 안 했구나.
“내일 저녁 6시요.”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쉽게 데이트 신청이 받아들여질 줄 알았더라면 좀더 일찍 신청을 할 것을…, 망설이느라고 얼마나 속이 탔던고?
여선생님이 다시 말했다.
“어데예.”
그렇지, 장소를 말하지 않았구나. 그 당시에는 주로 빵집을 이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 만나 빵집」에서요.”
여선생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가 버렸다. 학생 하나가 우리 있는 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나는 모처럼 이발도 하고(사실 나는 이발소 가기를 무척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니 머리가 무거웠다. 설렘 때문에 잠을 푹 자지 못해서라고 단정하고, 나는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나의 사랑 여선생님께서는 오시지를 않는다. ‘10분 정도야 늦을 수도 있지.’ 나는 스스로 변명했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60분, 1시간이 지났다. 그때 나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린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말이 있다. 미생이란 사람이 여인과 다리 아래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인은 오지 않고 마침 비가 엄청 내렸으나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다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죽었더라는 얘기로 어리석은 신의(信義)를 두고 하는 말이다. 꼭 그 미생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중 알고 보니, ‘언제예’, ‘어데예’는 모두 부정의 뜻, No라는 뜻의 그 지방 사투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상대방 여선생님에게 딱지를 맞았다는 자존심의 상처라든가 미생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느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사투리도 모르는 국어 선생, 그래서 이발비만 날린 국어 선생으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게 된 처지 때문이었다. (04. 수필문학 8월호)
사투리는 이처럼 의사소통을 방해하거나 단절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국토의 면적이 좁다 보니 사투리 때문에 겪는 불편은 그리 큰 편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남북으로 긴 지형의 필리핀이나 베트남, 또는 중국처럼 광대한 땅덩어리를 지닌 나라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들이라도 통역이 없으면 언어 소통이 전혀 안 되는 나라들도 있지 않은가?
이제 표준어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켜 나가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자. 우리는 너무나도 표준어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고도리’가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느 곳엔 가건 툭 하면 펼치는 화투판의 얘기가 아니다. 화투에서의 ‘고도리’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고(다섯)’와 ‘도리(새)’가 합쳐진 일본어이다. 일본어가 아닌 순국어로서의 ‘고도리’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고도리, 그것은 바로 ‘고등어의 새끼’를 가리키는 순국어인 것이다. ‘엘레지’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얼레지’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봄을 알려주는 보라색의 그 꽃을 모를 리가 없는 것, 그리고 외래어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한 악곡이나 가곡, 곧 애가(哀歌)’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순국어 ‘엘레지’는 모른다. 그건 바로 한자어로 ‘구신,’ 우리말로는 ‘개자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걸 모르니 ‘저 엘레지 같은 놈!’하고 욕을 해대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표준어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요새는 텔레비전에서 우리말 달인을 뽑는 퀴즈 따위도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는 편인데, 어쨌든 가장 좋은 방법은 늘 국어사전을 곁에 두고 시시때때로 펼쳐보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것이 또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본다. 필자의 경우, 가끔 가다가 ‘낱말 줄 세우기’를 해 보는데, 그런 방법도 괜찮지 않은가 싶어서 그와 관련된 글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낱말 줄 세우기 1
…신문을 뒤척거리다가 허남진 씨가 소개하는 외나무다리의 염소 싸움 우화에 이르렀다.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먼저 건너겠다고 뻗대다 개골창에 떨어져 함께 파멸하는…”, 읽어 내려가던 눈이 하나의 단어에 고정되어 버린다. ‘개골창, 개골창’, 오래간 만에 대하는 낱말이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표준어는 ‘개굴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모처럼 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결과는 ‘개굴창’은 방언, 그래서 다시 ‘개골창’을 찾았더니,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이라 설명되어 있었다. 또한 ‘도랑’은 ‘매우 좁고 작은 개울’이었다. 그렇다면, ‘개울〉도랑〉개골창’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는 셈이었다.
이번에는 ‘개울’로 방향을 틀었더니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란다. 일단 거기서 비슷한 낱말들과의 연결은 차단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 설명을 보는 순간, ‘내’나 ‘시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먼저 ‘내’를 찾으니, ‘시내보다 크고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였다. 아하, ‘내’와 ‘시내’는 다른 것이로구나. 그럼 ‘시내’는? ‘산골짜기나 평지에서 흐르는 그리 크지 아니한 내’, 그리고 ‘강(江)’은 ‘넓고 길게 흐르는 내’였다. 그래서 ‘강(江)〉내〉시내’의 서열이 정해졌다.
“개천에서 용 난다.”의 ‘개천’은? ‘개천(開川);①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판 긴 내. 굴강(掘江). ② ☞내.’ ①은 인공적인 것이니 논외로 치고, ②의 ‘☞’ 표시는 비표준어 표시로 표준말 앞에 붙이는 것이라는 기호 설명으로 보아 ‘개천’은 비표준어이고 그 표준어는 ‘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제 앞의 ‘개울〉도랑〉개골창’과 ‘강(江)〉내〉시내’를 ‘앞으로 나란히’ 줄 세우기를 시켜 보면, 그것은 ‘강’의 존재로 하여, 자연히 ‘강’이 들어있는 어휘의 무리가 ‘개울’이란 단어들의 모임보다는 큰 쪽이 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결국 ‘강(江)〉내〉시내 〉개울〉도랑〉개골창’의 순으로 그 크기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의 신세를 졌더니, ‘江’은 ‘큰내강(川之大者)’으로 ‘강〉내’의 관계가 증명되었고, ‘내’는 한자로 ‘川’임도 확인되었다. 이에 중국의 북쪽에서는 ‘하(河)’, 남쪽에서는 ‘강(江)’이라 한다는 ‘황하(黃河)․양자강(楊子江)’과 관련된 말을 확인하기 위해 ‘河’를 찾아보았더니, ‘황하수하(四江之一)’로 되어 있어 ‘江=河’임이 증명되었고, ‘내하(大川)’이라는 풀이도 있어 역시 ‘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大川’이라는 것에서 ‘江’의 ‘큰내강(川之大者)’과 동일하게 볼 수 있는 근거도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물보다도 더욱 큰 것, 그것은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바다’일 것임은 자명한 일. 그래도, 대한한사전에서 ‘海’를 확인해 보았더니, ‘바다해(百川朝宗)’라는 설명과 함께 서경(書經)에서는 ‘江漢祖宗于海’라 한다는 풀이가 나와 있었다.
‘朝宗’을 국어대사전에서는 ‘①[朝는 봄에, 宗은 여름에 천자께 알현(謁見)한다는 뜻]으로 옛날 중국에서, 제후(諸侯)가 봄과 여름에 천자(天子)께 뵘 ②강하(江河)가 바다로 흐름의 비유’라 하여 ‘百川’ 대신 ‘江河’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祖宗’은 ‘군주(君主)의 조상’이라 했으니, 이 역시 강한(江漢) 곧 양자강(楊子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흘러듦을 말한 것이라 보여지는 것이다.
어찌했든 2004년의 어버이날 다음날은 ‘바다(海)〉강(江)=하(河)〉내(川)〉시내 〉개울〉도랑〉개골창’이라는 낱말 줄 세우기를 성공적(?)으로 행하였다고나 할까? 조금은 골치 아픈 일이기는 했지만, 평소 긴가민가했던 점을 분명하게 가닥을 잡아놓았다 할 수 있으니,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던 날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수필선집 14. 바람은 고뇌하며 부는가. 교음사. 04.11.5.)
사적인 대화 등에서는 사투리가 더욱 화자와 청자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고 친근미를 느끼도록 하여 주기도 하여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최소한도 공적(公的)인 자리에서는 표준어를 쓰는 일이 바람직하다. 표준어 규정 제1항을 보자.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표준어를 써야 교양 있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면 표준어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한두 사람만 표준어를 써서 교양 있는 사람이 되면 무엇하나? 하지만, 국민 모두가 교양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느닷없이 나는 총재산 ‘달랑’ 29만 원밖에 없다고 한다거나, 마을 조성비에 근 500억 원을 쏟아 부었고 사저의 가격만도 20억 원에 육박하면서도, 아니, 그 무엇보다도 집 한 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와장창 종부세를 내도록 만든 장본인이면서도, 잣기는 종부세 ‘딸랑’ 3만 원밖에 내지 않는다거나 해서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 치부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닐까? ‘종부세’란 말 자체가 문제이다. 차라리 ‘(주택) 보유세’라고 하던가? 집 한 채밖에 없는 사람이 어째서 ‘종합’ 부동산세를 내야 한다는 말인가? 정말로 우리 언어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처사가 아닌가? 언어의 뜻을 이처럼 왜곡시키면, 세상은 사기꾼들이 판칠 수밖에는 없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내신 양반들이 ‘나는 29만 원밖에 없고,’ ‘나는 종부세 3만 원만 내면 된다.’는 것이니, 모두들 가난한 대통령 돕기 모금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선량한 국민들은 그래서 누구의 말도 믿을 수가 없게 되고, 사회는 빠른 속도로 총체적인 불신사회로 변해 버리고 말 수밖에 없다.
자아, 이제 국민 모두가 교양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 아니, ‘모두’까지는 어렵겠지만 ‘대다수’가 교양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첫째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언필칭 ‘선생’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표준어를 써야 한다는 자격 요건을 제도화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특히 어렸을 적에는 선생님의 필체까지도 따라가는 것이 학생들인데, 사투리를 마구 써대는 선생님들 밑에서 표준어를 정상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학생들이 나오기란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선생님은 화장실에도 안 간다고 믿는 학생들에게 ‘맨날’, ‘줄창’, ‘허구헌날’ 사투리로만 좔좔 가르치는 선생님들, 이거야말로 문제 중의 문제가 아닌가? 선생님이 되려면, 교사가 되려면, 교수가 되려면 표준어부터 배우고 볼 일이다.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직자들은 모조리 교직 사회에서 퇴출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일반 대중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언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표준어 사용자가 아니면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방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나운서는 물론이요, 아나운서가 아닌 사람들도 표준어 사용을 의무화해야 할 것이다. 감독, PD는 물론이요, 카메라맨, 소품 담당 스태프들도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채용하라. 실제 프로그램 제작 시에 그들은 배우나 탤런트들과 많은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마구 사투리를 사용하게 되면 늘 그들과 상대할 수밖에 없는 배우나 탤런트들도 부지불식간에 거기에 물들게 되어버리지 않겠느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상대하는 게스트, 그러니까 인터뷰 등의 대상자들까지도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제한할 것이다.
정말로 이 ‘처음’과 ‘끝’은 철칙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제2, 제3의 ‘총재산 30만 원’도 못되는 사람,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껏 종부세 3만 원’만 내는 ‘높으신 분들’이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하고, 사회는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는 문제. 언어의 사회성과 관련된 문제를 살펴보자. 컴퓨터와 휴대폰의 보급은 ‘빨리빨리’만을 1등석에 앉아있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정상적 언어는 그들에게 먹혀 버리고 말았다. 여기 인테넷 용어 몇 가지만 보도록 하자.
●부친남; ‘부인 친구의 남편’. 마누라가 남편을 비교하는 대상이 완벽하고 모자랄 것 없는 친구의 남편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능력·성격·외모가 완벽한 사람. 비슷한 용어로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 아친딸(아빠 친구의 딸) 등이 있다.
●솔까말;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듣보잡;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다한 것’.
●인개축; ‘인터넷 개통을 축하합니다’. 속뜻은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행동)를 한 것’을 비꼬는 말이다. 온라인에서 철 지난 유머를 구사하거나 뒷북을 치는 것을 빗댄 표현이기도 하다.
●아오안; ‘Out of 안중’. 관심이 전혀 없다, 안중에 없다는 뜻.
●열폭; ‘열등감 폭발’. 성공하거나 잘난 사람을 보거나, 어떤 일에 대해 열등감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것. 악플에서 많이 사용한다.
●걸조; ‘걸어 다니는 조각’. 매우 잘생긴 사람. 유사어로 ‘걸바(걸어 다니는 바비 인형)’가 있다.
이쯤 되면, ‘표준어 사용’ 운운은 이미 골동품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오나전’히 넉아웃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오나전’? 그것은 ‘완전’이란 단어를 너무 빨리 쳤을 때 생기는 오타 현상인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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