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21) 단형수필 쓰기
이 웅 재
현대는 스피드 시대라고 한다. 빨라야 좋다는 것이다. 스피드와 관련된 며칠 전 신문기사는 우리를 경악케 했다. 이제까지는 폭주족이라고 하면 오토바이를 연상했는데, 오토바이 폭주가 아닌 승용차 폭주족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의사, 기업인 등 지식층이자 부유층 인사들이 10억대 외제 스포츠카로 인천공항고속도로, 자유로, 서해대교 등에서 도로를 막고 ‘드래그 레이스(drag race)’라는 광란의 폭주를 일삼았다고 한다. 드래그 레이스, 400m 직선도로를 질주해 승패를 가리는 경주란다. 이들은 경주할 직선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차량들의 통행을 막는가 하면 교통 신호 제어기를 조작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하긴 삼성의 이회장도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심야 폭주를 즐기다가 사고가 나서 허리가 굽어졌다고 하지 않던가?
최고속도를 즐기려면 단거리 승부라야만 할 것이다. 한마디로 속도감은 짧음과 관련되는 것이다. ‘빨리빨리’는 공기(工期)를 단축시키고, 투자금액을 줄여준다. 아울러서 내구성도 단축된다. 건널목에만 서면 왜들 그렇게 조급한지? 그곳에서의‘ 빨리빨리’는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그걸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건널목에서는 항상 ‘빨리빨리’이니 문제는 문제로다.
‘빨리빨리’는 짧음을 선호한다. 길어서는 ‘빨리빨리’가 통하지를 않는 까닭이다. 여인들의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도 이 ‘빨리빨리’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모텔이 늘어나는 것도 이 ‘빨리빨리’ 때문이다. ‘빨리빨리’는 ‘기다림’을 무시한다.
“설월이 만창(滿窓)한데 바람아 부지 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 판연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온 적이면 행여 긘가 하노라”와 같은 무명씨의 시조 따위는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에 길들여진 요즘 사람들에겐 ‘기다림’은 사치를 넘어선 낭비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애시당초 ‘약속’ 따위는 무용지물이렷다? 오죽하면 약속을 할 때에는 말로서만은 안 되어서 서로 손을 잡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어야만 하게 되었으랴?
글쓰기에서도 짧은 걸 선호하는 풍조가 생겼다. 소설에서도 콩트가 있듯이 수필에서도 단형수필을 대우하기 시작했다. 일상에서의 단형 선호와는 달리 문학에서의 단형은 사실 지난한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런데 그걸 무조건 짧기만 하면 된다고들 생각하는 모양이다. 잡지사 쪽에서야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지면을 할애해 주고 싶다 보니까(그것이 어떤 이유였던 간에) 단형수필을 선호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수필작가들이 ‘단형수필’이란 분량만 짧으면 되는 것으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단수필’이라는 명칭도 사용했으나 평론가 이유식 님의 주장대로 단형수필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좋다고 여겨진다. 그냥 ‘단수필’이라고 해 버리고 말면, 그에 대한 ‘중수필’이나 ‘장수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특히 ‘중수필’의 경우 기존의 ‘중수필(重隨筆)’과 용어 면에서의 혼란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새 ‘단형수필’이라고 해서 발표하는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그저 ‘짧은 수필’이라는 생각들만으로 쓰는 것 같은 느낌이다. 길이 자체만 짧다고 해서 ‘단형수필’이라고 한다면 그건 수필문학을 퇴보시키는 일이다. ‘단형수필’은 ‘단형수필’로서의 독자성과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단형수필을 시도해 보았었다. 바로 “월간문학”에 ‘달걀 꾸러미’라는 작품을 실린 적이 있었다. 그 작품은 원고지 4매 정도의 분량이었다. 하루는 월간문학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 ‘달걀 꾸러미’, 그거 전문(全文)입니까?”
말하자면 너무 짧아서 뒷부분이 e-mail 송고 시 잘못되어 누락된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그게 전부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격식을 깨뜨려서 게재해 주지를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작품은 게재가 되었고(2003년 7월호) 몇몇 분들에게서는 좋은 글이었다고 호평도 받았다. 더구나 한국비평문학회에서 간행한 ‘2003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에 전재(轉載)되기까지 했다. 참고로 ‘달걀 꾸러미’를 보인다.
☆달걀 꾸러미
이 웅 재
1․4 후퇴 시 맨몸으로 남하한 아버지는 말하자면 돌팔이 한의사였다. 한의사라는 아무 증명서도 없으니, 의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확고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에는 그냥 모르는 체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는 간혹 첩약 몇 첩씩을 지어 주시기도 했다. 어린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러시면서도 환자나 그 보호자에게서 약값 따위를 요구하신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쩌다 어머니께서 바가지라도 긁을라치면, 난 면허가 없지 않소.하는 말씀 한 마디로 끝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무능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문 밖에 분명 사람의 인기척이 있는데, 집안으로 들어오는 기색은 없다. 한 동안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께서 뒷간에라도 가시는 기척이 있으면, 그 때에야 그 얼굴 없는 사람은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사랑방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닫는다. 안방에 있던 내가 궁금하여 삐죽이 머리를 내밀면, 아버지의 혼잣말만 내 머리통 위에 내려앉곤 했다.
쯧쯧, 이런 건 왜 가져 오누?
사랑방 문 앞에는 달걀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듬해 7월 수필문학사에서는 하계수필세미나 때 간행하는 공동제 단행본의 일환으로 ‘수필작가 114인의 단수필’이라는 부제가 붙은 “작은 잎새 하나”라는 단수필집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단형수필은 나름대로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형수필은 그 분량이 적기 때문에 구체적인 서사를 요구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도하기가 곤란하다. 그것은 최대한도로 압축된 표현을 요구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인 15매 수필보다도 어려울 수가 있다.
5매 수필을 성공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먼저 7매 정도로 작품을 완성시킬 것을 권장한다. 그리고 그 7매를 줄이고 줄여서 5매로 만드는 것이다. 버리기 아까운 구절도 전체의 맥락에 도움이 되지 않는 표현이라면 과감하게 삭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글 자체가 상당한 압축미를 지니게 되어서, 언외(言外)의 뜻이 숨어있게 되어서, 읽고 난 다음 잠시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주는 여운을 남기게 된다. 그것이 단형수필의 단형수필다운 맛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형수필을 맛깔스럽게 쓰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먼저, 단형수필에서는 가급적 서사를 삼가는 것이 좋다. 서사에는 항시 스토리가 따르게 마련인데 스토리는 어느 정도의 길이를 요구하는 서술의 방법이니만치 상당히 고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사보다는 묘사나 언어유희를 이용한 서술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언어유희란 어떠한 것인가? 필자의 글 ‘동창회와 추억의 파편들’(한자가 별거야? 독자와 함께.1999.3.25.)의 일부분을 보자.
촉고로 고기 잡는 일은 정말로 신나는 놀이였다. 냇물의 상류 하류가 따로 필요 없이 아무쪽에서고 몇 놈이 텀벙텀벙 갈지(之) 자로 촉고 쪽을 향해 한바탕 고기를 몰기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촉고로 고기 잡는 일은 순전히 어린아이들 몫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려면 젖을 만한 옷이란 건 애시당초 있어서는 안 되니까. 그냥 홀라당 벗고 마구잡이로 들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랴? 놀라 도망가다 그물코에 걸린 고기들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칠 것이다. 아니 고기에게 무슨발이 있는가? 그러니벌버둥이 아니라몸태질을 칠 것이다.
언어유희란 결국 해학으로 귀결된다. 해학, 골계, 풍자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 단형수필이다. 다시 필자의 글 하나를 보자.
‘공부해라’라는 말처럼 지겨운 말이 없다고 한다. ‘숙제’라는 말은 짜증을 더해주는 말이요, ‘시험’이라는 말은 소름이 끼치는 말이란다.
어쩌다 옛날 ‘국민학교’ 때의 ‘국어’교과서를 대하게 되면, 저절로 신명이 난다.
“바둑아, 놀자
영희야, 놀자.”
학교에 가서 처음 배우던 말이 ‘놀자’였던 것이다.
노자(老子)께서도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絶學無憂; 20장]”라고 하셨다니, 앞으로는 노자를 존경해야겠다. ‘노자’란 이름은 ‘놀자’에서 ㄹ이 떨어진 말은 아닐까 싶기조차 하다. 놀기 좋아했던 노자, 파이팅! 그의 무위(無爲) 사상, 만세다.
노자뿐이랴! 장자(莊子)께서도 “삶은 유한하고 지식은 끝이 없으니,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따르려 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로다” 하셨다니, 장자 님도 함께 브라보! 그 유명한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 박사도 공부를 지지리 못 했다고 하던데….다 함께 지화자!
그런데, 이건 뭐지? 신이 나서 노자를 읽다 보니(그건 공부 아닌감?) 어렵쇼? “학문을 하면 날로 이롭다[爲學日益]”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긴 좀 이상했다.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퇴보하고 국가가 망했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그렇다면 모든 학교부터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의 틀을 바꾸자. 성현의 말이라고 무조건 추종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 그래야 하는지 비판을 하면서 따르자. 그래야 새로운 창의성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근심이 없어진다구요? 작은 잎새 하나. 교음사. 04.)
짧은 형식의 수필, 소설에서는 이미 ‘콩트’라는 단형의 소설이 있었으니, 그것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용환의 “소설학사전”을 보면, 콩트란 “기상천외한 발상을 바탕으로 하여 재치와 기지를 주된 기법으로 한다.”고 하였다. 결국은 “예상을 뒤엎는 경이로운 결말을 공통된 특징으로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형수필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요체가 아닐까 싶다.
단형수필에서는 ‘암시’의 수법도 적극 원용해야 할 수법으로 생각된다. 소설에서의 암시적 수법이기는 하지만,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보니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인용해 본다.
“그 꽃 어디서 났니? 퍽 곱구나.”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막혔습니다. <이건 엄마 드릴라구 유치원에서 가져왔어>하고 말하기가 어째 몹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잠깐 망설이다가, “응, 이 꽃! 저, 사랑 아저씨가 엄마 갖다 주라구 줘.”하고 불쑥 말했습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서 그렇게 툭 튀어 나왔는지 나도 모르지요.
꽃을 들고 냄새를 맡고 있던 어머니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엇에 몹시 놀란 사람처럼 화다닥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금시에 어머니 얼굴이 그 꽃보다도 더 빨갛게 되었습니다.
(주요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
한용환의 “소설학사전”에서는 이를 “사랑 또는 이성에 대한 감정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음으로 해서 이야기의 논리를 ‘벗기는’ 재미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고 하였다. 이는 암시적 표현의 당위성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짧은 글에서는 때로 일반적으로 단형의 문학 형식인 ‘시(詩)’적인 방법을 원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두운’을 이용하는 방법도 시도해 볼 만하다. 우리말에서는 각운은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상섭의 “문학비평용어사전”에서는 효과적인 두운[머리운]의 예로서 김소월의 ‘산유화’를 예로 들고 있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사노라네.
에서 ‘ㅅ, ㅏ(ㅐ), ㄴ’은 우리의 주의가 그 소리에 끌리도록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산과 새와 삶의 세 낱말은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낱말들이며, 그 세 낱말의 상호연관이 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 상호연관성을 뜻으로만 아니라 소리로서도 강하게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소리’라는 항목에서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 대목을 예로 들면서 ‘ㄱ’이나 ‘ㄲ’음을 주의해 보라기도 하였다.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때로는 트릭(Tric)의 기법을 사용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나 O 헨리의 ‘마지막 잎새’와 같은 작품이 바로 그러한 트릭의 기법을 사용하여 성공한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렇다. ‘진주 목걸이’가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허영심 때문에 빌린 목걸이를 도난당한 여인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탕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품에 사용된 트릭은 주인공인 그녀에게는 일생일대의 패배가 되었지만, 작자인 모파상에게는 더할 수 없는 성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마지막 잎새’도 마찬가지다. 그 ‘마지막 잎새’가 베어먼이 그려 놓은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주인공 조안나는 회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트릭, 아니 거짓의 위대한 승리가 이들 작품을 통하여 펼쳐졌던 것이다. 진실을 뛰어넘는 거짓, 그건 진실의 위에 있는 진실이 된다. “문학적 진실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참다운 진실이다.”라는 점을 실감케 하여 주는 예들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문학에서는 거짓도 곧 진실이다. 문학은 그래서 영원하다. 그 영원함을 위해서 글쟁이들은 오늘도 끊임없는 수련, 중단 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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