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30)
관부인전(灌夫人傳)[하]
성여학 지음
이웅재 해설
“장군의 성질이 불같이 급해서 날쌔게 들어갔다가 재빨리 물러나곤 하니 에워싸고서 물을 대느니만 같지 못하오.”
부인이 그 계책과 같이 세찬 물로 (주장군을) 잠기게 했다. 장군은 머리와 몸이 흠뻑 젖었으나 수염을 치켜세운 채 자득(自得;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 뽐내며 우쭐거림)한 모습으로 죽을힘을 다하여 내지(內地)를 유린하였다. 그러나 피로가 심하여 피거품이 일 정도가 되어 창을 거꾸로 들고 돌아가게 되었다. 부인이 입 언저리에 거품을 흘리면서 크게 꾸짖어 말하였다.
“지난번에 여러 공들과 함께 천군의 명을 받들어 주장군의 머리를 취하여 천군께 보답하기를 기약했는데 장군으로 하여금 도망가게 했으니 잘못이 제공(諸公)들에게 있도다.”
곧장 천군에게 갖추어 장계를 올리니 천군이 즉시 제중서(臍中書) 등을 불러들였다. 네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알현했는데 제중서가 먼저 천군을 대하여 아뢰었다.
“신은 산꼭대기에 잠복하여 밤낮으로 살펴보다가 장군의 군사가 움직이기에 봉화를 올리고자 했으나 문득 이불자락이 뒤치는 바람에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봉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황문랑(黃門郞)이 이어서 진언하여 말하였다.
“신은 항상 환난을 걱정해서 때때로 포를 쏘면서 엄중한 수비를 하면서 장군이 관문에 들어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먼저 생가죽 주머니에 두 개의 돌덩어리[불알을 가리킴]를 담아다가 신의 귀와 뺨에다가 어지러이 들어다놓아 손발을 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징을 울리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
모참군(毛參軍)이 앞으로 나와 답해 말하였다.
“신은 우림(羽林)을 가지런히 정비하고서 끈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용맹하고 날래기가 아주 뛰어나서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고 하는 형세가 심히 귀신처럼 재빨랐던 까닭에 신의 비단결 같이 약한 힘으로는 실로 묶어 잡아오기가 어려웠던 것이지 신이 진심으로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현방어(弦防禦)가 또 앞으로 나와 대답하여 아뢰었다.
“신등은 북문을 잠그는 일을 맡으면서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좌우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장군이 벽문으로 치달려 들어오더니 곧장 갑(閘)문의 안쪽을 침범하는데 신출귀몰하듯이 좌충우돌하느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는 까닭에 미끄러워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의 보잘것없는 자질로서는 살아있는 채로 잡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명령을 받들지 않았음이 아니옵니다.”
이번에는 갑어사(閘御史)가 머리에 붉은 빛깔의 관[陰核]을 쓰고 우뚝 홀로 서 있다가 자못 긍지를 느끼는 얼굴빛을 하고서 말했다.
“장군이 깊이까지 들어와 전력을 다하여 싸우고 있을 때 신은 주해(朱亥; 朱亥를 合字하면 核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원래 朱亥는 전국시대 魏의 도살업자로 勇力이 뛰어났던 자이다. 秦이 趙의 수도를 공략할 때 趙나라가 魏의 도움을 청하자 魏의 公子 無忌(信陵君)가 나섰다. 이때 侯生이란 문지기가 朱亥를 천거했는데, 그는 秦을 포위하는 척만 하고 있던 晋鄙를 40근 철퇴로 죽여서 信陵君이 그 군사를 장악, 趙를 구원할 수가 있었다.)의 고사를 써서 그 뒤통수를 저격(狙擊)하였더니 곧 장군은 골수(骨髓)를 흘리면서[射精을 하면서] 관문 밖으로 뛰쳐나가 죽어버렸습니다. 오늘의 공로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 크게 양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천군(天君)이 말했다.
“그대의 공이 크도다.”
즉시 알자복야(謁者僕射; 謁者는 궁중에서 빈객의 접대를 맡은 벼슬인데, 그 우두머리를 謁者僕射 또는 大謁者라고 한다. 여기서는 陰核의 우리말 ‘공알’을 의미한다.)의 벼슬을 내리고 항상 관부인의 장막 가운데에서 지내게 하였다.
부인 역시 그의 우뚝 솟아 꼿꼿함을 사랑하여 내무 행정 일체를 맡기었다. 그러나 그도 나이가 들어 늙고 말았다. 일찍이 알자(謁者)를 한번 청하여 불러들였을 적에 부인이 손으로 그이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탄식하여 말했다.
“애석하도다! 알자(謁者)도 그만 쇠약해졌구려. 예전의 그 윤기 있고 불그레했던 모습은 혹 창졸간에 누렇게 변해버리기도 하고, 지난날 날카롭던 서슬은 오히려 늘어져 처지게 되었으니, 그대와 더불어 육고기를 먹던 부귀의 그 즐거움을 함께 간직하고 싶었는데 어찌 오래갈 수 있으리오?”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이 여기서 지내고 있던 중에는 일도 많았고 세월도 오래되었는데 공을 이룬 다음에는 오래 머무르는 것이 옳지 못한 일이지요.”
드디어 퇴거하여 두 골짜기 사이의 붉은 언덕[赤岸; 赤岸坡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陝西省 褒水 연안에 위치해 있었던 곳이라 하기도 하고, 전설상의 지명, 또는 南極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여기서는 大陰脣을 지칭한 듯하다.]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치었다.
(부인의) 먼 후손들은 중국에 흩어져 살았으니 이적(夷狄)과 같은 야만인들은 그 빛남을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여인국(女人國; 전설상의 扶桑國)에 살았던 사람들로서 과부는 시집가지 아니한 채 늘 딸이나 손녀로 하여금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고 한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부인의 덕은 지극하도다. 따사하고 촉촉한 성품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 있었고, 죽이고 살리는 엄정한 권도(權道;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가 춘추(春秋)와 훌륭한 짝이 될 수 있었다. 열었다 닫았다 함에 있어서는 음양의 도리를 따랐고 받아들여서 견딤에 있어서는 대상을 용납하는 도량을 지녔으며 그 나머지 뽀송뽀송함을 이어가다가도 성덕(成德; 품성이 넓어서 세상에 조화롭게 적응해 나가는 덕)을 지켜나가는 일 따위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뒷날 어떤 사람이 ‘부인의 작은 연못’이란 시 한 구절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양각산(兩脚山) 가운데 작은 연못 있으니
연못의 위아래론 풀숲이 무성한데
바람 한 점 없어도 하늘마저 뒤집을 듯 흰 물결 일어남은
외눈박이 붉은 용이 들락날락하는 때라.’
이 또한 여실한 기록이라 이를 만한 것이다. (大尾)
*'우리의 고전 수필'은 일차적으로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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