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수필 순례 31)
산천 풍속 총록(山川風俗 總錄)[상]
김창업 지음
이웅재 해설
…강을 건너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이다. 요동 들판에 들어서면서부터 오가는 거마가 더욱 많아지는데 모래 또한 더욱 가늘어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문득 안개처럼 휘날려 뒷사람이 앞사람을 보지 못한다. 관내(關內)가 더욱 심하여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바퀴 사이에 부딪쳐서 재처럼 휘날리니, 옷과 모자에 붙으면 금방 얼굴 모습이 변하여 동행하는 이도 거의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이 머리나 수염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에 들어가면 바작바작 소리가 나며, 겹겹이 싼 농이나 거듭 봉해놓은 병 속까지도 모두 뚫고 들어가니 지극히 괴이쩍다 할 일이다. 시장이나 인가에선 물건들을 닭꼬리로 만든 비로 쉴 새 없이 털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한 치나 쌓이게 된다. 북경성의 큰 거리는 물을 뿌려서 적시고 있다.
… 집은 칸수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일자(一字) 집이며 꺾여서 연결되는 법(‘ㄱ’ 자 또는 ‘ㄷ’ 자로)은 없다. … 방 안엔 창문을 달고 ‘캉[炕]’을 놓았는데 ‘캉’은 바로 온돌이다. 그 높이는 걸터앉을 만하고, 길이는 1칸 정도가 되며 넓이는 누울 수 있으나 발을 뻗을 수는 없다. 캉의 바깥은 다 벽돌을 깔았는데 가난한 집은 깔지 못했다. 부엌은 방 안에 있고 모두 솥을 걸어 놓았는데 객실은 그렇지 않다. 대문과 방문은 다 안에서 여닫게 되었다. 문지도리는 모두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고, 문고리 외엔 쇠로 장식된 것이 없다. …
북경성 안의 큰 네거리이나 골목의 좌우에는 모두 하수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온 성안의 처마물이나 길에 괸 물이 모두 이곳으로 들어가서 옥하(玉河; 日下舊聞考에는 청룡은 白河, 백호는 玉河, 주작은 永定河, 현무는 高梁과 楡河로서 북경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이 점을 북경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지리환경으로 언급하고 있다.)에 모여 성 밖으로 나간다. 또 성안에선 거위, 오리, 양, 돼지 등을 기를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안엔 도랑이나 더러운 것이 없다.
인가에는 변소가 없다. 소변과 대변을 모두 그릇에 받아서 버린다. 북경의 성안 후미진 거리에는 가끔 깊은 구덩이가 있다. 이곳은 곧 인가의 똥을 버리는 곳이며, 가득 차면 밭으로 실어 낸다. 소변 그릇은 모양이 오리 같으며, 그 주둥이는 주전자같이 생겼다.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보면 간혹 술그릇인 줄 알고 마시기도 하는데, 호인(胡人) 역시 우리나라 요강을 얻으면 밥그릇으로 쓴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대조이다.
마을마다 절과 사당이 있는데, 요양(遼陽), 심양, 산해관 등과 같은 곳에 가장 많다. 북경에 이르면 성 안팎에 있는 사관(寺觀: 불교의 절과 도교의 절)이 인가(人家)에 비해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런데 한 절에 사는 승려의 수는 비록 큰 절이라도 수십 인을 넘지 않으며 도사(道士: 도교 사원의 승려)는 더욱 적다.
집집마다 관제(關帝; 關羽를 武神으로 받들 때의 이름.)의 화상을 봉안하고 아침저녁으로 분향하며, 상점도 마찬가지이다. 관제묘(關帝廟)엔 반드시 부처를 모시며 절에도 반드시 관제를 모신다. 승려들은 부처와 관제를 똑같이 존숭하여 받들고 구별하지 않는다. …
청인들은 한어(漢語)를 잘하는데 한인은 청어를 잘하지 못한다. (청어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청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벼슬길에 방해가 된다. 대궐 안에서나 아문에서 모두 청어를 쓰며 주어문서(奏御文書)도 청어로 변역되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만주인이나 한인이 모두 한어를 쓴다. 때문에 청인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도 청어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다. 황제는 이를 근심하여 총명한 어린이를 뽑아 영고탑(寧古塔)으로 보내어 청어를 배우게 한다고 하였다.…
한족 여인은 분을 바르지만, 호녀(胡女)는 바르지 않는다. 전에 듣기로는 한족 여인은 남편이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모두 화장을 하고 꽃을 꽂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니 다 그렇지는 않았다. 관외(關外)의 여인 중에는 미인이 많았다.…
♣해설: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 또는 노가재(老稼齋). 큰형 창집(昌集), 둘째 형 창협(昌協), 셋째 형 창흡(昌翕)과 함께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에 『노가재집』이 있다.
이 글은 1712년(숙종 38) 형 창집이 사은사로 청나라에 갈 때 함께 다녀온 뒤 쓴『연행일기』 중 「산천풍속 총록」이다.
조선시대의 대외관계는 대중국은 주종관계인 사대, 대일본은 대등한 관계인 교린이었다. 물론 사대관계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대등관계는 조선이 스스로 우위를 자처했고 일본에서도 그것을 인정한 실정이었다.
그리고 대명(對明) 관계의 사행록은 “조천록(朝天錄)”, 대청(對淸) 관계는 “연행록(燕行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연행록만 100여 종이 전해진다.
사행의 규모는 정기적인 경우, 대체로 인원이 250명 내외, 마필(馬匹)이 200필 내에 이르렀고 한 번 다녀오려면 통상 6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으며 고생이 자심하였다. 당시의 중국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글이라서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황원구[黃元九] “국역 연행록선집 Ⅰ” 해제에서 발췌)
(09.7.25.원고지 1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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