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24) 일기 쓰기
이 웅 재
한 세기쯤 전이라면 모를까, 요즘 한국 사람치고 일기를 써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민학교 또는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다 보니, 의무적으로 다녔어야 하고, 그 의무교육을 이행하다 보면, 일기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한 현실은 과연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줄기차게 ‘일기 쓰기’를 가르쳤나 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인들 중에는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속담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던가? 아니, 믿어서는 안 되는 말이던가?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요즘에는 초등학교 이전에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제도적 기회가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 곳이 바로 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의 교육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국어 시간에 배우는 말이 ‘놀자.’였다. 그래서 우리 세대에는 신나게 놀았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어른들은 이렇게 추임새까지 넣어주는 것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다. 놀더라도 사람과 놀아야 할 텐데, 맨 처음 나오는 말은 “바둑아, 놀자.”였다.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사람 사이에서 지내는 것이 바람직할 텐데, “영희야, 놀자.”보다 “바둑아, 놀자.”가 먼저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 보면, 강아지가 사람보다도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 일이 허다하지 않던가? 어떤 견공을 위한 식당에서는 한 끼 식대가 몇 만 원을 호가하는 곳도 있더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국어’ 과목도 ‘바른생활’로 바뀌었다. ‘놀기만 했던’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놀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바른생활’이라는 낱말 자체가 사회성을 은연중 나타내 주는 말, 그래서 여기에 맞게 그 내용도 바뀌었다. “나, 너, 우리.” 이제 우리의 아이들은 ‘바른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라는 단체 개념, 동질적 집단의 개념도 확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와 네가 모여야 우리가 된다는 것을 은연중 깨닫게 되었고, 우리가 된 사회에서의 민주 시민의 해야 할 일도 마음속에 하나둘 새겨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앞선 세대가 배웠던 국어 교과서에서처럼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역시 문제였다. ‘나, 너, 우리.’ 여기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 그것은 ‘나’였다. 서구식 사고방식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이다. 영어에서의 ‘I’는 ‘you’나 ‘we’와는 달리 대문자로 써야만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그리하여 요즘은 ‘나’만 아는 세상이 되었다. 네가 뇌물을 받은 건 인면수심의 총체적 부패이지만, 내가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돈 몇 푼 받은 것은 피치 못할 생계형 부정이니 손가락질 받을 일이 못 되는 것이다. 부부일심동체라는 부인이 부정한 돈을 받았어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어느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는가? 그래서 구멍가게 주인도 목에 힘을 준다. 깁스 정도가 아니라 철심을 박는다. ‘손님이 왕이라고? 웃기지 마라, 주인은 황제니라.’ 퇴출 0순위의 늙은 부장도 큰소리친다. ‘신입사원 아무개가 샤프하다고? 그까짓 샤프 하나 가지고는 게임이 안 된다. 내 안주머니에는 샤프는 물론 볼펜, 플러스펜, 만년필 등 없는 것이 없다는 걸 너희들이 알기나 하느냐?’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는데도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초등학생들의 일기 쓰기. 그것도 방학숙제로서의 일기 쓰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그러니까 일기란 지극히 사적(私的)인 것이다. 요즈음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일기와 같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방학숙제로서의 일기는 ‘검인’ 도장을 받는 일은 물론이요, 검사하시는 담임선생님에 따라서 극히 개인적 취향을 나타내는 칭찬의 말, ‘참 잘했어요!’를 비롯해서,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하세요!’ 등등 독후감(?)까지도 덧붙여지는 것이다.
방학이 끝나간다. 다른 숙제는 그런 대로 거의 다 했다. 문제는 ‘일기’였다. 어제도 그저께와 같았고, 오늘도 또 어제와 별 차이가 없는 하루를 보냈는데, 무얼 쓴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쓸 언턱거리가 없다. 차라리 엄마가 그 하기 싫은 심부름, ‘한길 건너 리빠똥 할아버지네 구멍가게에 가서 콩나물 한 봉지만 사 오련?’ 하는 심부름이라도 시켜주셨더라면, 그거라도 썼을 텐데…. 그래, 정말 그거라면 쓸 거리가 많았을 거야. 어른들은 왜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걸까? 아이들은 심부름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들이기 위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가지 쳐 나가다 보면, 정말로 쓸 거리가 무궁무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정말로 난감하다. 쓸 게 없다. 에라, 모르겠다. 혹시 내일엔 뭔가 두 가지쯤 얘깃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 내일 함께 쓰기로 하자.
이렇게 하여 그날그날 써야 하는 일기는 내일을 위하여 미뤄두기 시작한다. 시작이 반, 처음엔 정말로 생각생각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지만, 한 번 미루기 시작한 일은 그 다음부터는 쉽게 반복된다. 그런 걸 ‘관성의 법칙’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하던가? 그처럼 어려운 말을 생각해 낸 것만도 커다란 공부, 아, 오늘은 두 다리 쭈욱 뻗고 자도록 하자.
정말로 관성의 법칙은 무섭다. 하루, 이틀, 사흘…. 어른들이 ‘세월은 쏜살같다.’고 하시던 말씀이 틀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런 거야 어쨌든, 문제는 문제로다. 그놈의 ‘일기 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고심 끝에 없던 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시골에 계시는 외갓집엘 갔다. 서울처럼 시끄럽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 들판에 나가 참외며 수박을 내 손으로 따다가 먹는 맛은 정말로 좋았다.”
그럴까? 냉장고 속에 들어 있던 시원스런 수박만 먹어보던 놈이, 정말로 밭에서 갓 따온 그 밍밍한 수박을 그토록 맛있게 먹었을까? 맛있게 먹었다니 믿어야지. 어찌 학생을 의심할쏜가? 선생님의 너그러운 마음씨까지도 감동시키는 일기가 되었다. 잘하면 상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거짓말이 먹혀들어간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상장과 상품까지도 받게 된다면, 문제는 약간 심각해진다. 거짓말, 거짓말을 했더니 상을 준다? 그는 자란 다음에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얌마, 너 혼자 정직해 봐야 소용없다구.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라구.”
방학 숙제 일기. 여기까지만을 보아서도 몇 가지의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첫째, 쓸 것도 없다 보니, 내일 한꺼번에 쓰지, 한꺼번에 쓰지 하는 생각을 정당화시키게 된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하는 따위의 말쯤은 이제 약발이 서질 않게 된다.
둘째, 거짓말의 도사가 되게 한다. 없던 일도 지어내서 쓰다 보니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혹시 성장한 후에 작가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아,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하면 먹히는구나.’ 하는 생각을 굳히게 되고, 그래서 그 생각을 실현화시키고자 하다가는 일급 사기꾼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은팔찌를 차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셋째, 앞에서 말한 그 ‘관성의 법칙’이 문제가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케세라세라’, ‘될 대로 돼라.’ 하는 포기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될 대로 돼라.’에서는 창조적인 사고가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넷째로는 셋째하고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일이긴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자.’는 생각에 빠져 버리는 일, 셋째와 구별되는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셋째는 매사 쉽게 포기하는 습성을 지니게 된다는 데 비해, 이 넷째의 경우에는 ‘세속에 대한 타협’을 일삼게 된다는 점이다. 세속에 대한 타협이 널리 퍼져 있는 사회에서는 충과 의를 비롯하여 진, 선, 미, 성, 그 어느 하나도 제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유유상종, 아무리 올곧고 절조를 지키는 사람이라도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이 정도로만 끝나지도 않는다.
다른 것은 그럭저럭 거짓말로 메웠다고 치자. 그래도 거짓말로 얼버무릴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날씨’다. 그게 엉터리라면 여태까지 썼던 일기는 말짱 도루묵이 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요새 같으면, 인터넷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여 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컴퓨터 자체가 없었던 예전에야 어쩔 것인가?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묻고 묻는 수밖에. 아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시절, 유난히 매일매일의 날씨만을 열심히 적어 놓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그 소중한 ‘정보’를 상품화하고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의리 없는 놈’, ‘못된 놈’으로 매도했지만, 그는 계속 영웅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지금쯤 재벌의 반열에 다다르지는 않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방학 숙제로서의 일기 쓰기의 문제점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할 이유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문제점 다섯 째가 탄생한다. 정답을 모를 때에는 남의 것을 커닝해라.
“어이 친구, 몇 월 며칠 날씨 좀 불러봐. 아, 그래, 빵 값일랑 걱정하지 말구.”
정리를 좀 해 보자. 초등학교 방학숙제 일기 쓰기의 폐해. 이제까지의 문제점들을 한데 뭉뚱그려 집약시켜보면, 그건 바로 일기 쓰기 숙제의 가장 큰 폐단, 그래서 그와 같은 숙제는 내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어주는 폐단이 하나 도출된다. 그건 사실 여섯 번째라고 하기에는 감당이 되지 않는 폐해라고 할 것이다. 그게 뭔데? 쉽게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게 무어냐구? 바로 아이들에게 ‘일기 쓰기란 지긋지긋한 것’이라는 관념을 그들 어린이의 뇌리에 너무나도 뚜렷하게, 너무나도 진저리치게 각인시켜 준다는 점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건 지긋지긋한 것이 ‘일기 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글쓰기 일반에까지 다시 확대재생산이 된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커다란 재앙인가? 동양 삼국 중 우리나라에서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와 같은 글쓰기에 대한 어렸을 적의 선입관에 그 책임의 일단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든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라는 속담에서 ‘버릇’이란 말의 자리에 ‘생각’이라는 말을 대신 넣어보자. ‘세 살 생각이 여든 간다.’ 그렇다.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의 그 글쓰기에 대한 지긋지긋한 생각이 우리 한국인들의 일생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증세만 알고 있는 병은 고치기가 어렵다. 하지만, 왜 병에 걸렸는지 그 원인을 알고 있는 병은 비교적 고치기가 쉽다. 이제까지의 원인 분석에 의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쓰기에 대해서 가지는 거부감은 바로 그 어렸을 적의 강요된 ‘일기 쓰기’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과감하게 그 잘못을 바로잡자. 한마디로 글쓰기를 즐거운 일로 치부하고, 너도나도 글을 쓰도록 하자. 기쁜 일, 슬픈 일, 안타까운 일, 울화가 터지는 일, 칭찬을 받고 칭찬을 해주어야 할 일, 때로는 팔불출이라고 뒷구멍에서 이러쿵저러쿵 은밀하게 주고받던 얘기들도 모두 글로, 일기로 써 보도록 하자.
『삼국사기』와 같은 편년체 역사기록을 일기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우리나라의 일기체 문학은 여행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렇게 보면,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이야말로 여행일기의 시발이 된다. 일기라는 명칭이 사용된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도 전주지방을 두루 다니고서 기록한 글이라서 아직은 여행일기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제목이 시사하듯 월, 일의 시간적 순차성이 의식된 최초의 일기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작자 스스로는 ‘기’의 변종으로 인식하여 제목을 붙였다.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등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일기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연암의 『열하일기』(1780)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소재를 자유롭게 수용하면서 적극적인 자기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여행일기의 백미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여행일기가 아닌, 사건의 시말을 기록한 일기로서는 율곡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가 있다. 그런데 여행일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 후기 일기는 특정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인목왕후의 책립, 인목대비의 유폐의 사실을 기록한 『청백일기(淸白日記)』(1602년),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인조반정의 시말을 기록한 『연평일기 延平日記』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같은 일기에 속하는 글이면서도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작자 미상),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작자 미상),『정무록(丁戊錄)』(黃有詹) 등 녹으로 적은 것이라든가,『계갑일록(癸甲日錄)』(禹成傳), 『응천일록(凝川日錄)』(작자 미상) 등 일록으로 적은 것들도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록자의 이름 뒤에는 ‘일기’를 붙였고, 간지(干支)를 내세웠을 때는 ‘녹’ 또는 ‘일록’을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개인적 성격이 우세한 글에는 ‘일기’,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글에는 ‘녹’이나 ‘일록’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말이다.
병자호란 당시의 『산성일기(山城日記)』나『계축일기』,『한중록』등도 정치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요, 이와 같은 정치사적 주제를 다루는 일기는 어느 한 인간의 내밀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측면으로 보아서는 미진하고 아울러 문학적 감동력이 약화되게 마련인데, 다행스럽게도『계축일기』나『한중록』등은 이런 점을 극복하고 서술자의 감정이 비교적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상당히 문학적인 일기로서도 평가받을 만한 작품들이다. 최보(崔溥)의 『금남표해록 錦南漂海錄』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제주도에서 출발한 저자가 풍랑으로 중국에 들어가 몸소 체험하고, 보고 들은 일들을 날짜별로 생생히 기록하고 있어, 근대적 일기의 면모에 한층 다가선 일기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의유당 연안 김씨의 『의유당일기』중 「동명일기(東溟日記)」는 일출 광경의 생생한 묘사가 현대의 어느 작가도 뒤따를 수 없을 정도의 명문장, 명수필, 명일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일기가 정치적·사회적 사건을 기록하는 공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체험과 감상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문학의 경우 김광섭(金珖燮)의 『옥중일기』,이광수(李光洙)의『산거일기(山居日記)』, 이병기(李秉岐)의『가람일기』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광수(李光洙)의『산거일기』, 이병기(李秉岐)의『가람일기』를 보자.
『산거일기(山居日記)』9월 10일 화요
날이 맑다. 한가위래서 휴학, 아침 예불, 좌선(坐禪), 송경(誦經). 검다니라는 동네에 풍씨 집을 찾다. 양철 조각 하나도 아니 섞인 농촌이다. 마당에는 풋바심이 널리고, 대추나무에는 풋대추가 번쩍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절사(節祀) 음복(飮福)으로 낯이 붉다. 송편과 신청주(新淸酒) 대접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개울에서 목욕하면서 운허대사에게서 환옹대사(幻翁大師) 이야기를 듣고 유쾌하였다. 환옹대사는 누가 무엇을 선물로 가져오면, “그게 다냐 ? 좀더 가져오지, 그게 무에냐?” 하고 으레 투정을 하고는 시봉(侍奉)네들에게 맡기고는 다시 찾는 일이 없었다. 시봉들이 다 먹어버린다. 한번은 어떤 중이 꿀을 가지고 와서 환웅 스님께 예물로 올렸다. 환옹은 “좀더 가져오지, 그게 무에냐?” 하고 으레 투정을 하고는 시봉에게 내어 주었다. 환옹대사가 꿀을 잊어버릴 줄을 잘 아는 그 중은 시봉에게 청하여, 그 꿀을 도로 찾아다가 다른 데에 또 선물로 썼다.
대사는 선(禪)지식으로 이름이 높아서, 양주 송릉 부도암과 같은 유벽(幽僻)하고 작은 암자에 있어도, 궁중과 서울 대가에서 재가 많이 들었다. 그래서 돈도 많이 왔다. 그러나 파재(罷齋) 후에 다른 절에서 모여 왔던 중들에게 한 웅큼씩 두 웅큼씩 보시(布施)를 주어서 그 돈이 다 없어진 뒤에야, “인제는 더 없다. 이 다음에 오너라.” 하였다. 그는 평생에 돈을 세어 본 일이 없다. 어떤 중은 환옹 대사가 잘 잊어버린다는 것을 이용하여서, 보시를 받고도 한 참 있다가 또 가서, “소승 물러갑니다.” 하고 또 하직 인사를 하면 대사는, 또 “오, 너 수고했다. 옜다, 보시 받아 가지고 가거라”, 하고 또 돈을 집어 주었다. 대사가 정말 잊어버린 것인지, 알고도 모르는 체를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운허대사가 말하였다.
한번은 부도암에 강도가 들어서 환옹대사와 다른 중들을 묶었다. 대사는 “이놈들아! 너희놈들이 거꾸로 묶는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도둑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거꾸로 묶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즉, 대사는 “내가 너희놈들을 묶어야 옳지, 너희놈들이 나를 묶어 쓰겠느냐?” 하였다 이 말에 도둑들은 압기(壓氣)가 되어서 대사의 묶인 것을 끌렀다. 대사는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시봉더러, “이놈들 밥이나 지어 먹여라. 다시는 도둑질을 그만두어라.” 하여 밥을 먹여서 돌려보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십 년이나 지난, 지난해 여름에 서울 탑골공원에서 어떤 점잖은 노인이 군중을 향하여, 자기는 젊어서 여러 동무와 함께 양주 부도암에 강도질을 들어갔다가, 환옹대사의 말에 감복(感服)이 되어서, 다시 도둑질을 아니하고 바른 길을 걸어 왔다는 말과, 다른 동무들도 다 마음을 고쳐서 잘 살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시주(施主)들이 절에 전장을 붙인다고 하면 환옹대사는, “전장 쓸데없다. 절에 돈이 있으면 도둑이 오지, 중질만 잘하면 밥 안 굶는다.” 이렇게 말하고 거절하였다.
대사는 누구를 보고도 너라고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싶으면 여자들의 앞에서라도 벌거벗고 갈아입었다. 양식이 떨어지면 불기(佛器)나 무엇이나 갖다 잡히고 꾸어 왔다.
누가 법명(法名)을 지어 달라고 하면, 문풍지를 쭉 찢어서 써 주었다.
대사의 속성(俗姓)은 청주 한 씨로 사족(士族)이다.
“내가 죽거든 부도(浮屠)나 비(碑)나 영당(影堂) 같은 것 짓지 마라. 그런 것 만들면 마우권속(馬牛眷屬;) 이니라.” 하고 유촉(遺囑)하고 고종 을미년에 입적(入寂)하였다. 법명은 환진(喚眞)이니, 환옹은 당호(堂號)였다.
『가람일기』
1954년 1954년 5월 31일
원대(圓大)에 나가 백련 5,6근을 얻어 가지고 포광(包光) 김근수 군과 오다. 맥주 6통을 먹고 저녁 통근차로 왔다. 백련은 대문 옆 웅덩이에 심었다.
1954년 7월 3일
시궁창이 너무 걸어 백련 잎이 쉬 상하기에 그 곁에 조그마한 못을 파고 오늘 저녁 때 옮겼다.
밤새도록 비 왔다.
1954년 7월 12일
연근 3절 이상으로 4개를 캐어왔다.
1954년 7월 23일
또 비가 왔다. 백련은 착근하여 새 잎이 7, 8옆 나왔다. 웅란 꽃은 먼저 핀 놈은 지고 새로 7송이 벌었다. 오늘은 중복 대서다.
1954년 8월 27일
백련꽃이 두 대 나와 한 대는 피었다. 잎은 4, 5잎. 소공(素空)을 청하고 사진 박는 이를 불러 소공과 촬영하고 처와 난초, 계수(桂樹)와 촬영.
1954년 8월 28일
아침부터 백련화(白蓮花)가 만개. 인인(隣人) 최홍 양씨와 완상(玩賞) 소작(小酌).
춘원처럼 어느 한두 일을 중심으로 비교적 긴 서술을 해 나갈 수도 있고, 가람처럼 아주 간략하게 그날의 일을 요약하여 기록할 수도 있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성격은 전자가 두드러지고 생활기록으로서의 측면은 후자가 승(勝)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어떠한 성격의 일기든, 일기는 안 쓰는 쪽보다는 쓰는 쪽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어째서 그런지 일기의 의의를 한번 간략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일 먼저, 일기란 무엇보다도 생활의 기록이다. 사람들은 가끔, 어제 한 일, 또는 그저께 한 일을 궁금해 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일 년 전의 오늘에 대해서도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알고 싶은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꼭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일기는 매우 요긴한 자료가 된다. 일기를 남긴 사람이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면 그 일기는 그대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도 있어 자서전이나 회고록의 바탕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 소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다음, 지나간 일기를 보는 일은, 자신의 현실 대응방식을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줄 수가 있다. 당시에는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시기가 되어서 관찰해 보면, 과거의 현실 대응방식에서 어떤 점이 바람직했고, 어떤 점은 고쳐나가야 할지를 판단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일기를 쓸 때부터 자기반성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자기 향상의 방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일기 쓰기의 장점이라고 하겠다. 자기 향상이란 누구나 지향하고 싶어하는 목표다.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할 때에도 바로 그러한 지향점이 있는 경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그래서 베스트셀러의 작품 요인으로서도 언급되는 점이 이 자기향상이라는 지향점이다.
네 번째로는 사고력을 함양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을 없으리라.
다섯 번째로는 글쓰기 능력을 신장시켜 준다는 점이다. 설명력, 서사력은 물론이요 묘사력이나 수사력도 함께 향상시켜주는 행위가 바로 일기 쓰기인 것이다. 극히 사적인 일기에서는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유나 상징 따위도 사용하게 되어서, 그야말로 나름대로의 훌륭한 레토릭을 구사(驅使)하는 글을 쓰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기 쓰기야말로 문학적 수업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여섯 번째, 때에 따라서는 훌륭한 전문서적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동식물의 성장하는 모습의 관찰 따위를 적어 놓은 일기라면, 그야말로 최상의 전문서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같은 글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와 같은 일기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겠다.
일곱 번째, 이것은 의의라기보다는 유의점이라고나 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일기를 쓸 때에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서술을 한 후, 짤막한 표현이라도 좋으니 꼭 그 서술 대상에 대한 느낌이나 단평 따위를 붙여두는 습관을 가지도록 함이 좋다. 그러한 습관은 사물에 대한 판단력 및 감식안을 길러줄 수가 있어 소중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대상에 대한 관점이 어떠했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자료가 되어서 매우 필요한 일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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