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잇속

함께할 수 없었던 부안 세미나

거북이3 2009. 7. 12. 15:24

   함께할 수 없었던 부안 세미나

                                               이   웅   재


 졸리다. 그래, 밤 12시가 지난 시간이니 졸릴 수밖에 없다. 컴퓨터와 함께 지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모양이다. “이제는 자야지.” 생각하는 중에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냄새를 따라 코를 벌름거려 보지만, 그 냄새가 풍겨 오는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에 냄새는 어느덧 온 방안을 점령하고, 차츰 나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솔솔 피어나는 향기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던 나는, 드디어 한 장소에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곳은 책장 앞, 내 낡은 책장 앞이었다. 책장에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나란히 공존하고 있었다. 아주 나란히, 그런데 그 중의 책 하나가 약간 도드라져 있었다. 마치 ‘저를 빼어 보세요!’ 하는 듯이.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책등에 씌어 있는 제목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조선 시대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 제목은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여인들? 나는 그 책을 뽑아 들었다. 목차를 일별했다.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의유당, 홍랑, 진옥, 솔이, 어우동, 사방지…등등의 이름이 서로서로 으스대며 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내 가슴으로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제 이름자를 앞세우고 있었다. 마치 올림픽 개막식 때, 각국의 이름을 적은 팻말을 맨 앞에 선 사람이 번쩍 치켜세우고 입장하듯이…. 나는 그 팻말을 읽으려고 주의를 집중했다. 그러나, 움직이는 팻말은 쉽게 읽혀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팻말은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팻말에 쓰인 글씨가 차츰 선명해졌다. 드디어 식별하기에 적당한 위치, 나는 놀랐다.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3명이었는데, 선조 때의 유명 문사인 유희경(劉希慶:1545~1636)과 이귀(李貴: 1557~1633)가 팻말의 양쪽 끝을 들고 있었고, 허균(許筠: 1569~1618)이 다시 그 뒤에 매창의 간단한 인물 소개를 하는 작은 팻말을 들고 따르고 있었다.


“조선 중기의 기생, 여류 시인.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 계유년 생이라서 계생(癸生), 계랑(癸娘, 桂娘)이라고도 한다. 신사임당의 맏딸이라기도 하고 부안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라고도 한다.”


 그 팻말을 보는 순간, 나는 시조 하나가 저절로 읊조려지고 있었다. “이화우 흣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촌은(村隱) 유희경을 그리워하는 시조였다. 유희경은 기실 서얼(庶孼) 출신이었다. 어쩌면 매창은 그 점에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탐닉하게 되었고, 30여 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희경은 50세, 매창은 19세였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녀 관계는 아니지만, 이규보와 오세재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만남이었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좌장격인 52세의 덕전(德全) 오세재(吳世才)는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17세의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를 망년우(忘年友)로 대했던 것이다.

 아아, 그러고 보니, 현대문학사에서도 이들의 사귐과 비슷한 예가 문득 떠오른다. 시인이자 한학자인 우현(又玄 또는 玄玄子) 김관식(金冠植)의 18세 때의 일이던가? 그는 당시 전주대학교의 교수로 지내던 20여 년 연상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를 찾아가 밤새도록 시와 학문을 논했던 것이고,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미당의 동서까지 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김관식”이라는 일곱 글자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던 그는 술을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난 술병[위궤양]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마실 수 없는 술, 쳐다보기만이라도 하려고 입원실 천장에다가 쇠주병을 매달아 놓았었단다. 그런데 병세가 약간 차도가 있자 참지 못하고 그 매달아 놓은 쇠주병을 떼어다가 신나게 마셔 버리는 바람에 병이 도져서 죽었다던가? 그때의 나이가 37세, 매창이 죽은 나이도 한 살 차이인 38세였으니, 세월의 고금과 성별의 남녀 차이는 있을망정, 너무나도 유사점이 많아 저절로 생각나는 사람들이라서, 조금 샛길로 빠져들었다.

 이제 다시 매창에게로 되돌아가 보자. 허균도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고 하였지만, 친구인 유희경과의 우정을 버릴 수 없어 그녀와의 단란한 밤 시간은 가져보지를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매창의 단심(丹心)은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 ~1628)도 극구 찬양한 바가 있지 않았던가?

 매창의 유희경과의 애절한 사랑은 경성과 부안(扶安)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때문에 늘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었고, 그러한 매창의 허허로운 마음에 뛰어든 사람은 이웃고을 김제(金堤)에 군수로 부임한 이귀였다. 그들의 사랑도 상당한 열기를 지녔던 것 같기는 하지만, 유희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허균은 정치적인 면에서만 파격적인 인물이 아니고, 여성 편력에서도 만만찮은 인물이다. 그러한 그마저도 사랑의 참된 길을 걷고 있는 매창에게는 나름대로 존경의 염을 가지고 있었던 듯싶었다.

 그런 그녀가 왔다. 수필문학사에서 하계세미나를 부안에서 열었는데, 거기에 참석할 수 없었던 나를 위하여 그녀가 한밤중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비록 꿈 속에서였지만, 그날 밤은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될, 잊지 못할 밤이었다.

 유희경과 함께 걸었을 채석강(彩石江), 너무나 잔잔하여 강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바닷가에서의 낭만은, 이후 영영 만날 수 없었던 이별을 가져왔고, 그래서 애인과는 채석강엘 가면 안 된다는 속신(俗信)마저도 가져다준 그곳, 만날 수조차 없으니 이별이야 있을까보냐 했었는데, 유희경, 이귀, 허균 등 당대의 쟁쟁한 문사들과 함께 나를 찾아주었으니, 그런 밤을, 그런 매창을, 내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