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잇속

70대를 맥빠지게 하는 말

거북이3 2012. 8. 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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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를 맥빠지게 하는 말

                                                                                                                                                       이 웅 재

 

홍윤숙의 ‘장식론 1’의 첫 번째 연(聯)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성남문화원 ‘문학교실’ 시간이었다.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젊은 여성은 장식품을 패용하지 않아도 풋풋하다. 30대까지도 꼭 장식품을 달아야만 할 필연성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나 40대 이후로 가면서부터는 부쩍 장식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잃어가는 젊음’을 장식품으로 채우려는 무의식적 의식의 소산이리라.

최명숙 교수는 그 시에 대한 평론의 첫 문장에서 말했다.

“중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얼마 전까지도 애써 외면했다.”

이제 여섯 살 난 내 외손자 놈은 박박 우긴다. 이번 생일을 맞으면 일곱 살이 된다고. 놈은 새해에 한 살을 먹었는데도 생일 때 또 한 살을 먹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그처럼 빨리 나이를 많이 먹었으면 한다. 40대쯤 된 사람들은 반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세월은 그 반대로 흐른다. 젊어서는 시간이 더디 간다. 일각이 여삼추요, 일 년이 10년처럼 느껴진다. 세월 좀 빨리 가서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 한 해가 지나가는 것이 하루 이틀이 지나는 것처럼 퍼뜩 지나간다. ‘세월이 쏜살같은’ 것이다.

실제로 계산을 해 보자. 10살짜리에게 1년이란 그의 전 생애의 1/10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다. 40세 되는 사람에게서의 1년이란 그의 전 생애의 1/40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다. 50세 되는 사람의 1년은 그의 전 생애의 1/50, 70세에서는 1/70,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은 점점 빨리 간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나이 먹는 것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었다. 50이면 지명(知命)이요, 육십은 이순(耳順), 70이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는 공자님 말씀만 철석같이 믿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전철에서의 경로석을 두고 농담까지 생겨났다. 경로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노인이 말했다.

“젊은이, 일어나시게.”

그 말을 들은 젊은이가 말했다.

“왜요? 저도 돈 내고 탔는데요.”

“여보게, 이 자리는 돈 안 내는 사람이 앉는 자리란 걸 모르시나?”

그런데 차츰 공자님 말씀이 먹혀들지를 않기 시작했다. 고리타분하다는 것이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는 아예 노인은 괄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어떤 정치가는 노인을 극진히(?) 대접하는 체하기도 했다. 노인은 거동하시기 힘드시니까 선거 때 투표도 하지 말라는 배려였다.

그 말을 들은 노인들이 새로운 분류법을 고안해 냈다. 2,30대는 청소년이요, 4,50대는 청년이고, 6,70대는 장년(중년)이며, 8,90대라야 노년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60대 중반을 넘긴 소설가 박범신 씨와 인터뷰하는 어떤 기자는 말했다.

“영화 ‘은교’의 원작자 ‘영원한 청년’ 소설가 박범신 선생님과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한 인터뷰를 보고 나도 ‘청년’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70쯤 되었으니 이제는 노인이라는 말을 들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2.7.31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철중의 생로병사’를 보고 놀랐다. 아니, 맥빠졌다. 나를 맥빠지게 한 기사는, ‘헌혈 정년은 70세’라는 말이었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헌혈마저 할 수 없는 나이로구나.”

그것은 분명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만드는 탄식임이 분명했다.

왜 그런 ‘탄식’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분명 헌혈을 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요즈음에는 몸무게가 예상보다 많이 나간다고 생각되어 걱정을 하는 체해 보기도 하지만, 나는 50여 세가 될 때까지도 고작 55kg의 몸무게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빈약한 몸매로 무슨 헌혈이냐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헌혈차 앞을 지나갈 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헌혈을 권하는 당사자들마저도 나에게는 헌혈을 하라고 권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왜 그렇게 ‘헌혈 정년’이란 말에 민감했을까? 그것은 바로 남에게 주어본 일이 별로 없었던 나의 과거가 너무나 허망한 느낌이 들어서는 아니었을까? 남에게서 받아만 보고 주어보지는 못했던 삶, 그 대차대조표는 역으로 적자였다.

주어야 받는 것이다. ‘주고받다’, ‘give and take’, ‘授受’, 이 모든 말들을 보면, 주는 것이 먼저고 받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내가 받고 지냈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주지를 못했는데 무엇을 받았다는 것인가? 받은 것처럼 여겼을 뿐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는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어졌다는 말인 것이다. 피 한 방울도 남에게 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는 말, 그러니까 이제는 ‘허깨비’만 남았다는 말이 아닐까?

홍윤숙 시인은 ‘장식론 1’을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짐한다. 내 부족한 능력을 다하여 한 꼭지 한 꼭지 어설픈 수필작품이나마 남겨보려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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