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강독 19. 퇴별가(抄) -완판본(출전:http://www.jikji.org)
…용왕이 말하기를,
"짐의 병이 위중하여 선의(仙醫)의 하는 말이 토끼 간을 못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하니 어떤 신하가 토끼를 잡아 짐의 병을 구하리오?"
공부상서(工部尙書)1) 민어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을 얼굴은 모르오나, 『사기』로 볼진대 중산의 소산이라. 몽염(蒙恬)2)의 옛 일 같이 에워싸고 잡는 수니 정병 삼천 내어 주어 대장 고래 보내소서."
고래가 분을 내어 출반하여 여쭈오되,
"수륙이 다르니 수중에 있던 군사 육지싸움을 어찌할지 저런 소견 가지고도 문관임을 뽐내 좋은 벼슬 해먹고, 조금 위태한 일이면 호반에게 밀려 하니, 배속에 있는 것이 부레풀3)뿐이기에 하는 변통 없이 하는 말이 고지식한 것과 같습니다."
공부상서 무색하여 아무 대답 없었구나,
"토끼라 하는 것이 조그마한 짐승이라, 병환에 좋다면 대왕의 위엄과 덕망으로 그까짓 것 구하기가 무슨 염려 있으맀가? 토끼 몇 수 바치라고 산군에게 조서를 당장 올리리다."
용왕이 또 물어,
"조서는 한다 하고 누가 갔다 산군을 줄꼬?"
간의대부(諫議大夫)6) 물치 여쭈오되,
"표기장군7) 벌덕게가 의갑이 굳세옵고 열 발을 갖추어서 진퇴를 다하옵고, 제 고향이 육지오니 조서 주어 보내소서."
게가 분이 잔뜩 나서 미처 말을 못 하여 입에 거품을 흘리면서 열 발을 엉금엉금 기어나와 변명한다.
"수궁의 벼슬들이 인간과 같지 않아서 세도로도 못 하옵고, 청으로도 못 하옵고 풍신과 물망으로 별도로 선택하여 하옵기로, 농어[鱸魚]는 '큰 입과 작은 비늘' 잘 생겼을 뿐 아니오라 장한이 생각하고8) 소동파가 귀히 여겨9) 친구가 점잖키로 벼슬 차지 이부상서(吏部尙書), 방어(魴魚)는 '황하의 방어와 낙수의 잉어'가 유명할 뿐 아니오라 이름 자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방(方)자 한 편 붙었기에 땅 차지 호부상서(戶部尙書), 문어(文魚)는 다리가 여덟이니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팔조목(八條目)'10)을 응(應)하였고 이름이 글 문(文) 자니 예문(禮文) 차지 예부상서(禮部尙書), 숭어[秀魚]는 용맹 있어 뛰기를 잘 하옵고 이름이 '재기준수(才氣俊秀)'라는 빼어날 수(秀) 자인 고로 군사(軍士) 차지 병부상서(兵部尙書), 준어(峻魚)11)는 가시가 많아 사람마다 어려워하고 이름이 '용법엄준(用法嚴峻)'이란 높을 준(峻) 자인 고로 형법(刑法) 차지 형부상서(刑部尙書), 민어(民魚)는 뱃속에 갖풀12) 들어 장인에게 요긴하옵고 이름이 '이용만민(利用萬民)'이라는 백성 민(民) 자인 고로 장인(匠人) 차지 공부상서(工部尙書), 도미는 맛이 있고 풍신(風神)13)이 점잖으되 이름의 윗 자에 쓸 한자가 없고 아래에 고기 어자 안 들었다고 상서등용 못하는데, 한림학사 깔따구는 이부상서 농어의 자식이요, 간의대부(諫議大夫) 물치는 병부상서 숭어의 자식이라. 저의 집 세력으로 입에서 아직 젖내 나는 것들이 요직의 벼슬을 하여 아무 이치도 모르고서 방안 장담 저리 하나, 수륙이 다르니 용왕이 한 조서를 산군이 들을 테요, 저희들이 조서하고 저희들이 가라시오."
용왕이 들어 보니, 불쌍한 호반들이 문관에게 평생 눌려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이다가, 이런 때를 당하여서 큰 싸움이 나겠거든, 용안(龍顔)을 비쓱 들어 백의재상(白衣宰相) 돌아보며,
"토간(兎肝)을 구하기에 시각이 급한데 문무가 불화하여 골라 쓸 수 없으니, 문무(文武) 간(間)에 보낼 신하 선생이 천거하오."
궐어(鱖魚)14)가 어찌하여 백의재상 되었는고. 수궁 벼슬하기 매우 어렵고 무섭다고 한가히 물러가서, 무릉도원에서 흰 갈매기와 백로로 벗을 삼아, '정승의 자리라도 자연과 바꾸지는 않겠다'는 장지화(張志和)15)와 노는 고로, 수궁 군신들이 '강호선생(江湖先生)'이라 존칭하여 수궁에 일 있으면 예관 보내 청해다가 의논을 하는 고로 벼슬 없이 국사(國事)하니 당나라 이필(李泌)16) 같이 백의재상 되었구나.
용왕이 병중하야 국사가 위태롭기에 의논 차로 모셔 와서 입시동참(入侍同參)17) 되었더니, 궐어(鱖魚)가 여쭈오되,
"'임금만큼 신하를 잘 아는 이가 없다'했으니 대왕이 정하옵소서. 자기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신하면 불가하다 하오리다."
남의 재기(才氣) 짐작하기 좀 어려운 노릇이냐. 요(堯)임금이 곤(鯀)18) 시켜 홍수를 다스리고, 공명(孔明)이 마속(馬謖) 보내 가정(街亭)을 지켰으니19), 하물며 병든 용왕이 신하 재주 알 수 있나 묻는 족족 당챦구나.
"합장군(蛤將軍) 조개는 온 몸에 갑주(甲冑)가 단단하니 보내면 어떠한고?"
"합장군은 진짜 장부라 보내면 좋을 테나, 도요새와 원수 있어 둘이 서로 다투다가 어부지리(漁父之利) 되기 쉽사오니 보내지 마옵소서."
"원참군 메기가 주옥으로 꾸며 만든 좋은 관과 긴 수염이 점잖으니 보내면 어떠한고?"
"요사이 물고기 죽이는 가루를 돌 밑마다 풀어 놓으니 민물 근방에는 못 가지요."
"'녹봉을 후하게 주는 나라에는 반드시 충신이 있다.'하니, 도미가 벌써부터 상서가 소원이라니 다녀오면 시키기로 하고 도미를 보내 볼까?"
"사월 팔일 가까우니 서울은 쑥갓이요, 시골은 풋고사리 송기20)탕 찜감 보냈다가는 곧 죽지요."
"올챙이 배 불러 경륜을 많이 품었으니 보내어 어떠할꼬?"
"한두 달에 못 올 테니 개구리 되면 올챙이 적 일 알 수 있소?"
문답이 장황하여 오정 때가 되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구나. 서반(西班) 중의 한 조관(朝官)이 출반하여 여쭈오되,
"효도는 백행의 근원이요 충성은 삼강의 으뜸이라. 천성으로 할 것이지 가르쳐 하오리까? 신의 선대 할아비가 멱라수(汨羅水)21)에 사옵더니, 절강(浙江)으로 장가가서 굴삼여(屈三閭)22)의 고기는 할아비가 얻어먹고, 오자서(伍子胥)23)의 고기는 할미가 얻어먹어, 부부지간 두 뱃속에 충혼(忠魂)이 잔뜩 들어 자손이 나는 대로 아주 뱃속 충신이요 대대 충신이라. 수중은 고사하고 세상의 사람들도 충심의리 아는 이는 잡아먹는 법이 없고, 어부들이 잡았으면 사다 물에 넣는 고로 종족이 번성하되 여러 벼슬 아니 하고 좋은 벼슬 구치 않고, 가문 중에서 상자(上者)를 뽑아 주부(主簿)24) 벼슬 세전하니, 황하수가 오래도록 국가를 모시옵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할 테니 신의 간을 잡수어서 대왕 환후 나을 터이면 곧 빼어 올리겠으나, 토간이 좋다하니 신의 정성대로 기어이 구하리다."
만조(滿朝)가 다 놀래어 에워서서 살펴보니, 평생 모두 멸시하던 주부 자라거든, 용왕이 의혹(疑惑)하여 자세히 묻는구나.
"토끼를 잡자하면 수국(水國)에서 인간세계 가기에 몇 만 리 될 터이요, 허다한 천봉만학(千峰萬壑) 어느 산을 찾아 가며, 삼백 모족(三百毛族)25) 많은 중에 토끼를 어찌 알며, 설령 토끼를 만난다 해도 어찌하여 데려올지, 신포서(申包胥)26)의 충성과 공명(孔明)의 지략이며, 걸음은 과보(夸父)27) 같고 눈 밝기는 이루(離婁)28) 같고, 소진(蘇秦)29)의 구변(口辯)이며, 맹분(孟賁)30)같은 장사라야 그 노릇을 할 터인데, 너의 생긴 모양 보니 어디 그러하겠느냐? 백소주(白燒酒)31) 안주하기 탕(湯)감이 십상이다."
주부가 여쭈오되,
"충성지략 말 잘하기 흉중에 들었으니 외모 보아 알 수 없고, 외모로 본다 해도 과보(夸父)가 잘 걸어서 해를 쫓아 갔사오되 그 발이 둘 뿐인데 신의 발은 넷이옵고, 맹분(孟賁)이 힘이 세어 九鼎32)을 들었으되 목을 감추지 못하는데 신은 목을 출입하고, 대가리가 뾰족하니 백기(白起)33)의 지혜옵고, 허리가 넓었으니 오자서(伍子胥)의 열 아름 둘레의 크기옵고, 콧구멍이 좁사오나 의사는 넉넉하고, 볼이 아니 퍼졌으되 구변은 있사오니, 참혹하게 죽더라도 토끼를 잡아 올 터이오니, 토끼의 생긴 형용을 자세히 그려 주옵소서."
용왕이 추어,
"충성스럽구나! 주부의 충성이여. 신하로구나! 주부의 신하됨이여."
화공 인어(人魚)를 불러 들여 백옥으로 새긴 벼루에 먹을 갈고 각색 채색 고이 갈아, 비단을 펴놓고 좋은 붓을 빼어 들고 토끼를 그리려고 할 때 인어가 수궁의 화공이어서 토끼의 화본(畵本)이 없었구나, 만조가 걱정하더니 전복(全鰒)이 썩 나오며,
"내 전신(前身)이 화충(華蟲)34)이라. 산중에 있을 때에 사냥꾼의 날이든지 독수리 급한 변(變)이 무디무디35) 일어날 제, 산중에 만만한 것이 나와 토끼뿐이로다. 양자택일로 저 아니면 나 죽기로 어려움에 처해 서로 도와 구해주며 지냈으니, 금수(禽獸)가 달랐으되 불쌍한 처지가 각별하였기에 토끼의 생긴 형용, 속에 그저 눈앞에 아른거리니 내 말 대로 그려내라."
전복은 가르치고 화사(畵師)는 그리는데, '촛불 같은 흰 달' 바라보는 눈 그리고, '여기저기 새 우짖는 소리' 듣는 귀 그리고, '봄바람에 만발한 꽃' 향기 맡는 코 그리고, '여기저기 뒹구는 밤과 도토리' 주워 먹는 입 그리고, '준견(俊犬)이 쫓는 발 저는 토끼' 달아나는 발 그리고, 진나라 중서령(中書令)36)이 붓 매었던 털 그리고, 두 귀는 쫑끗, 두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짤록, 꼬리는 짤막, 설설 그려내니 자라가 화상 받아 목에 넣고 움뜨리니 아무 염려 없었구나.
용왕 전에 하직하니 용왕이 부탁하되,
"옛날에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서불(徐巿)37) 보냈더니, 큰못이 가로막아 오지 않아서 한 줌의 흙이 되었으니 그 아니 불쌍한가? 경 같은 장한 충성은 만고에 쌍이 없으니, 인간세계에 있는 토끼를 빨리 잡아 돌아와서, 짐의 병을 낫게 하면 땅을 자손에게 나누어 주어 그 공로를 갚을 테니 부디 가 조심하라."
주부가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부가 인간세계에 간다는 말을 집안에서 벌써 듣고 온갖 내외 친인척들이 전송 차 다 모였다.
주부의 대부인이 주부를 경계한다.
"너의 부친 식욕 많아 낚시 밥을 물었다가 청년 나이에 죽었기에, 독수공방 내 설움이 너 하나를 길러 내어,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아침에 나가 늦게 오면 문에 기대어 기다리고, 저문 때 나가 아니 돌아오면 이문(里門)에 기대어 바라보았더니, 네가 지금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다가 임금이 병환 계서 약 구하러 간다 하니, 임금과 신하가 간난과 사생을 함께 하는 것은 당당한 직분이니, 지성으로 구하다가 만일 약을 못 얻거든 모래밭에 뼈를 드러내 거기서 죽을 것이지 돌아오지 말지어다. 대대로 충신 집에 선조들의 덕을 더럽히게 될 것이니 두어서 무엇하리?"
주부가 여쭈오되,
"정성을 다해서 위로 임금의 병환 아래로 모친의 마음 둘 다 편케 하오리다." …
이종사촌(姨從四寸) 고둥, 내종사촌(內從四寸) 소라, 진외척(陳外戚)38)숙 우렁, 육지사돈 달팽이 연이어 하직하는데, 천만 뜻밖 해구(海狗)라는 놈 옆에 와 앉았거든, 주부(主簿)가 물어,
"너는 어찌 예 왔느냐?"
"조카가 먼 데 가니 하직 차로 찾아 왔지."
주부가 화를 내어,
"우리집 내외척이 다 내력 있느니라. 고동, 소라, 우렁 들이 내 목과 같아서 들락날락하는 고로 촌수가 있거니와 너는 어찌 친척관계가 있노?"
해구가 웃어,
"내 좆도 네 목 같아 서면 들고 앉으면 나오기에 주부에게 아저씨 되지." …
"여보 토생원,"
토끼의 근본 성정이 무겁지 못한 것이 겸하여 몸이 작으니 온 산중이 멸시하여 누가 대접하겠느냐? 쥐와 여우 다람쥐도,
"토끼야, 토끼야."
아이들을 부르는 듯 이름 불러 버르장머리 없이 함부로 하는 것을 평생을 겪고 지내다가, 천만 뜻밖에 누가 와서 생원이라 존칭하니 좋아 아주 못 견디어 깡총깡총 뛰어오며,
"게 누구요, 게 누구요, 날 찾는 게 누구요. 상산(商山)의 사호(四皓)39)들이 바둑 두자 나를 찾나, 죽림(竹林)의 칠현(七賢)40)들이 술을 먹자 나를 찾나. 청풍명월 채석(采石)41) 가자고 이태백(李太白)42)이 나를 찾나, 노와 삿대 잡고 적벽 가자 소동파(蘇東坡)43)가 나를 찾나. 인생부귀 물으려나 인생무상 가르치지, 역대흥망 물으려나 상전벽해 가르치지."
요리 팔짝 저리 팔짝 깡총깡총 뛰어오니, 주부(主簿)가 의뭉하여 토끼의 동정 보자고 긴 목을 오므리고 가만히 엎뎠으니, 토끼가 주부 보고 의심을 매우 하여,
"이것이 무엇인고?"
제가 의심 내고 제가 도로 그 의심을 버려,
"쇠똥이 말랐는가, 이 산중에 무슨 솥 깨어진 것 같은 큰 재목감이 어찌 저리 묘하게 깨어져 있는가, 애고 이것 큰일 났다. 사냥 왔던 총쟁이가 화약 심지 끌러 놓고 똥 누러 갔나보다. 바삐바삐 도망하자"
깡총깡총 뛰어가니, 주부가 생각한즉 그대로 두어서는 저리 방정맞은 것이, 이리저리 못가는 곳 없이 다니는 짓을 한없이 하겠거든 또 한 번 크게 불러,
"여보, 토생원."
토끼가 듣고 의심하여,
"누가 나를 또 부르노? 고이하다 고이하다."
아장아장 도로 오며 주부를 바라보니, 아까 없던 목줄기가 흙담 틈에 뱀같이 슬금히 나오거든, 의심나고 겁이 나서 가까이 못 오고서, 멀찍이 서서 보며 문자로 수작하여,
"내가 이 산중에서 나서 놀고 늙어 몇 해가 되었으되 이제 처음 보는 터에 나를 어찌 알고 무엇하러 불렀느뇨?"
주부가 대답하되,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44)가 공부자의 말씀인데, 어이 그리 무식하여 가까이 아니 오고 처음 본다 괄세하니 인사가 틀렸구만."
토끼가 들어본즉 생긴 것과 말하는 게 옆에서 볼 수가 없거든, 옆에 와 썩 앉으며,
"뉘라 하시오?"
"예, 나는 수궁에서 주부 벼슬하여 먹는 자라요."
"산수가 서로 달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관계가 없는데 수궁의 조관으로 산중은 어찌 왔소?"
"'아침에는 북해에서 놀고 저녁에는 창오산45)에서 잔다'고 어디는 못 가겠소? 우리 용왕 장한 덕화 임금의 자리에 있으시고, 팔천 리를 진무하니 하루도 쉼 없이 일들이 일어나는데, 신하가 재주 없어 찬양하기 어렵기에 용왕의 분부 뫼셔 임금을 보좌하는 인물을 구하기 위해 천하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오늘날 모족(毛族) 모임 천행으로 만났기에 만좌를 다 보아도 왕을 보좌할 만한 신하는 곰도 아니요 표범도 아니고 선생 하나뿐이기로, 선생을 모셔 가자고 뒤를 따라 왔사오니 바라건대 토선생은 범수(范睡)46)가 왕계(王稽) 따르듯, 한신(韓信)47)이가 소하(蕭何) 따르듯 나를 따라 가사이다."
토끼가 제 인물에 너무나 감사한 말이거든 제 소견도 의심하여,
"어떻기에 내 형용이 곰보다도 나으리요, 표범보다 나으리요?"
주부가 대 답하되,
"곰의 몸이 비록 크나 눈이 적고 털이 덮여 태양 정기 부족하니 미련하여 못쓸 터이요, 범이 비록 용맹하나 코 짧고 줄기 없어 중악이 낮고 우묵하니 단명하여 못쓸 테요, 선생의 기상 보니 잘 다스려진 세상의 정치 수완이 좋은 신하요, 어지러운 세상의 간사한 영웅이라. 눈이 밝고 속이 밝아 천문지리 다 알 테요, 몸이 작고 발이 빨라 산도 넘고 물도 뛰어 따라갈 이 없을 테니, 능란한 저 말솜씨가 소진(蘇秦)48)의 합종(合從)인지, 가끔가끔 조는 것 공명(孔明)의 춘수(春睡)49)런가, 생긴 것이 모두 나라에 이로운 신하, 볼수록 모두 모든 성중 모족(毛族) 중의 제일이니, 우리 수궁(水宮) 가시오면 입상출장(入相出將) 저 공명(功名)을 따를 이 뉘 있을까?"
토끼가 들어본즉 주부의 하는 말이 저 생긴 형용하고 낱낱이 똑 같거든, 가만히 생각한즉 형용은 무던하나 속에 글이 없었으니, 수궁의 글 유무를 알아야 할 테거든 또 물어,
"수궁 조관 중에 문장이 몇이 되오?"
"문장조관 있으면 영덕전(靈德殿) 지을 때에 상량문(上樑文)을 못 지어서 인간세계까지 멀리 나와 글 잘하는 여선문(余善文)50)을 청하겠소?"
또 물어,
"수궁에 훨썩 키 큰 조관 있소?"
"영덕전(靈德殿) 상량할 제 키 큰 조관 가리는데 내가 상량하였지요. 그리 큰 수궁에서 나만한 키도 없소. 선생이 들어가면 키 큰 거인 방풍씨(防風氏)51) 들어왔다 모두 깜짝 놀라지요."
토끼가 생각한즉 너른 의장(意匠)52) 좋은 구변 내 속에 흠뻑 들었고, 글 잘하고 키 큰 조관 수궁에 없다 하니, 내 지닌 네 조건53) 눌릴 데가 얼건마는 '고향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하니 이 사세가 썩 떠나기 어렵구나. 한번 사양하여 보아,
"주부를 따라가면 좋기는 좋을 테나, 산속의 즐거움과 풍월의 흥겨움을 잊을 수가 없사오니, 어찌 따라갈 수 있소?"
주부가 물어,
"산속의 즐거움과 풍월의 흥겨움이 만일 그리 좋으면 나도 여기 함께 있어 수궁으로 안갈 테니, 이야기 조금 하오."
실없는 토끼 소견 제가 주부 속이기로 산림풍월 자랑할 때, 턱없는 거짓말을 냉수 먹듯 하는구나.
"청산에 봄이 오면 온갖 꽃이 만발하여 병풍을 두른 듯, 꾀꼬리는 노래하고 나비는 춤을 추어 좋은 풍류 놀기도 좋거니와, 공자 제자 육칠 관동(冠童)54)이 기수(沂水)55)에 목욕하고 무우(舞雩)56)에 바람 쐴 때 따라가서 구경하고, 녹음과 방초가 꽃보다 나은 첫여름에 공자(公子)57) 왕손(王孫) 답청(踏靑)58) 구경,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에서 다투어 나타나는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그네 구경, 기이한 봉우리 돌비탈 사이에서 여름 구름 피어오르고, 수풀 사이 샘에 피서하여 즐기는 목욕 구경, 여름 철 석 달 다 보내고 가을바람이 일어나고, 옥 같은 이슬이 서리되어 서리 맞은 나뭇잎이 봄꽃보다 더 붉으니59) 세상사 아랑곳 않고 한가로이 지내는 누각과, 국화 피는 구월 구일 용산(龍山)에서 술 마시고 흥겹게 춤추는 좋은 구경, 모든 산에 새의 자취가 없어진 겨울을 나 혼자 맛에 겨워 용문(龍門)에서 설경을 구경할 적에 구양수(歐陽修)60)도 따라가고, 저는 당나귀를 타고 매화를 구경할 적에 맹호연(孟浩然)61)도 따라서, 산간 사시 좋은 경치를 오는 대로 구경하여 임자 없는 청산녹수 모두 우리 집을 삼고, 값 없는 청풍명월 나 혼자 주인 되어 암혈 간에 살아가니 반고씨(班固氏)62) 적 시절인가? 나무 열매를 먹었으니 유소씨(有巢氏)63) 적 백성인가? 이러한 편한 신세 시비할 이 뉘 있으며, 이러한 좋은 흥미 앗아갈 이 뉘 있으리? 수궁이 좋다 해도 '고향을 떠나면 곧 천해진다'하니 갈 수 없제 갈 수 없제. 회수(淮水)를 건너면 유자(柚子)도 탱자 되니64) 안 갈라네 안 갈라네."
주부가 들으면서 가만이 생각한즉 저를 훨썩 부추겼더니 좁은 소견 교만함이 나서 저렇게 덤벙대니, 되게 한번 탁 질러서 저놈 기를 꺾어 보자 천연스럽게 물어 보아,
"여보, 토생원, 말씀 다 하였소."
"예, 다 하였소."
"몹시 불어 제끼시오. 산에서 부는 바람 바닷바람보다 훨씬 세니 귀가 시려 못 듣겠소. 수중에 있는 이는 산중 일을 모르리라 저렇게 과장하되 당신의 가련한 신세 낱낱이 다 이를 테니 당신이 들으시려오?" …(중략)…
하직하고 썩썩 가니 토끼가 따라오며,
"여보시오 별주부, 성정 그리 급하시오."
주부가 대답하되,
"내 할 말은 다 하였으니 불러도 쓸 데 없소. 평안히 계시옵소. 산속의 즐거움을 누리시오." …(중략)…
토끼 하는 말이,
"우리 산중 친구들에게 하직이나 하고 가제."
"큰일을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꾀할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 각기 소견 다 다르니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마라'고 말릴 이도 있을 테요, '그 일이 장히 좋으니 함께 가자'고 할 터이니, 길가에 집짓기라 삼년이 지나도 짓지 못할 테지요."
"우리 처에게 나 간다고 하고 가제,"
"꾀하고자 하는 바가 여자에게 미치면 망하는 법인 것을, 수궁에 가서 공명한 후 쌍교 보내 모셔 가면 오죽 좋겠는가?"
이리저리 살살 돌려 수작하며 가노라니, 방정맞은 여우 새끼 산모롱이 썩 나서며,
"이야, 토끼야 너 어디 가느냐?"
"벼슬하러 수궁간다. "
"이아야, 가지 마라."
"왜 가지 말래냐?"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나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으니 물이라는 것이 위태하고, 아침에 임금의 은혜를 받다가도 저녁에 죽임을 당하니 벼슬이 위태하니, 두 가지 위태한 일 타국으로 벼슬 얻으러 갔다 못되면 굶어 죽고 잘되면 비명횡사한다."
"어찌하여 비명횡사냐?"
"이사(李斯)65)라 하는 사람 초나라 명필로서 진나라에 들어가서 승상까지 하였더니, 진나라 수도인 함양(咸陽)에서 허리를 잘려 죽임을 당했으며, 오기(吳起)66)라 하는 사람 위나라 명장으로 초나라에 들어가서 정승이 되었더니, 귀척대신(貴戚大臣)을 공격하여 죽이니, 너도 지금 수궁가서 만일 좋은 벼슬하면 반드시 죽을 테니,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는 우리 정다운 처지에 내 설움이 어떻겠나,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토끼가 옳게 듣고 주부에게 하직하여,
"당신 혼자 잘 가시요, 나는 가지 못하겠소. 천봉백운 내 버리고 만경창파 가자기는 벼슬하잔 뜻일러니, 벼슬하면 죽는다니 객사하러 갈 수 있소? 어진 벗 우리 여우 충고하여 좋은 데로 이끌어 하는 말을 내 어이 안 듣겠소."
주부가 생각한즉, 다되어 가는 일을 몹쓸 여우놈이 방정을 부렸구나. 여우하고 토끼 사이에 이간을 부쳐,
"좋은 친구 두었으니 둘이 가서 잘사시오. 제 복이 아닌 짓을 권하여 쓸데없소,"
돌아도 아니 보고 앙금앙금 내려가니, 토끼가 도로 오며 자세히 묻는 말이,
"복 없다니 웬 말이오?
주부가 대답하되,
"남의 둘이 좋은 정다운 처지 나진 말이 부당하나, 당신이 물으시니 할밖에 수가 없소, 내가 육지 나온 지가 여러 달이 되옵기로 여우가 찾아 와서 자기를 데려가라 하되, 방정스런 그 모양과 간교한 그 심술이 떨어질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을 터기에 못 하겠다 떼었더니, 당신 데려간다는 말을 이놈이 어찌 알고 쫓아와서 방해하니 당신은 떼어 보내고 제가 이제 따라오제."
토끼가 곧이들어,
"참 그러하단 말씀이오?"
"얼마 안 가서 알 일일진대 거짓말 할 수 있소?"
경망한 저 토끼가 단참에 곧이듣고 여우에게 욕을 하며,
"그놈의 평생 행세 사사건건 저러하제. 열 놈이 백 말 하더라고 나는 따라갈 테오."
그렁저렁 내려가니 해변 당도하였구나. 만경창파 끝이 없어 바다 멀리 수면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한가지로 푸르게 되었으니 토끼가 깜짝 놀라,
"저게 모두 물이오?"
"그렇지요."
"저 속에서 살았소?"
"그러하오."
"코 구멍에 물 들어가 숨을 쉴 수 있소?"
"그러기에 내 코구멍은 조그만하게 뚫렸지오."
"내 코는 구멍이 크니 어찌 하자는 말씀이오?"
"쑥잎 뜯어 막으시오."
"깊기는 얼마나 하오?"
"우리 발목 물이지요."
"저런 거짓말이 있소. 만일 거기 빠졌으면 한 달을 내려가도 땅에 발이 안 닿겠소."
"나 먼저 들어갈께 당신은 서서 보오."
주부가 팔짝 뛰어 바다 위에 둥실 떠서 허위허위 헤엄하며,
"어디 깊어?"
토끼가 하하 웃어,
"당신 헤엄하오?"
"들어와 보면 알제."
토끼가 시험 차로 언덕에 앞 발 딛고 물 속에 두 발 넣어 시험하여 보려 하니, 주부가 달려들어 토끼의 뒷다리를 뎅겅 물어 잡아채니 토끼가 풍 빠져 서쪽 바다물을 많이 마셨다. 주부가 등에 엎고 해상에 등등 떠서 정처 없이 가는구나.…
용왕이 병중하여 거동을 못 하더니 토끼를 보옵시고 새 정신이 왈칵 나서, 창문을 열어 큰 소리로 분부한다.
"옥황의 명을 받아 남해를 지켰기에, 인간에게 비 주고 수족을 진무하여 덕이 정중하고 시혜를 널리 베풀었더니, 우연히 병중하여 토간이 아니면 다른 약이 없는 고로 별주부의 충성으로 너를 잡아 바쳤으니, 네 간을 내어 먹고 짐의 병이 나은 후에 토끼 너의 공을 짐이 어찌 잊을소냐. 한나라 기신(紀信)67)같이 풀을 묶어 앉힐런지, 기린각(麒麟閣)68) 능운대(凌雲臺)69)에 네 이름을 새길런지 목숨을 바쳐 명분을 이룸이 그 아니냐. 조금도 서러워말고 배 내밀어 칼 받아라,"
토끼가 분부 듣고 아무 대답 아니하고, 고개를 번듯 들어 임금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만 뚝 떨어뜨리니, 용왕이 생각하되 저것이 나 때문에 죄없이 죽을 곳에 나아가니 오죽 블쌍하랴, 좋은 말로 타일러 웃음을 머금고 죽게 하자, 다시 분부하시거늘,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느냐?"
토끼가 여쭈오되,
"죽기 서러워 아니옵고 못 죽어서 우나이다."
용왕이 의심하여,
"그것이 웬말인가?"
"아뢸 터이니 들으시오. 소토(小兎) 같은 작은 목숨 인간 세상에 지천이라, 독수리 밥이 될지 사냥개 반찬 될지, 그물에 싸일런지 총불에 타질런지 죽고만 말 터이니, 그런 데 죽사오면 세상에 났던 자취를 누가 다시 아오리까? 배속의 간을 내어 대왕 환후 구하오면, 아무 공로가 없사와도 아름다운 이름을 오랫동안 전함이 절로 될 것인데, 하물며 대왕 덕택에 제가 출세한 저 형용과 인각·운대에 새긴 저 성명이 그 영화 무궁하여 만세에 유전할 텐데, 이 방정맞은 것이 간 없이 왔사오니 절통하기 측량 없소."
용왕이 대소하여,
"미련한 것이로다.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럴 듯하게 할 것이지 천만 부당한 말 뉘 곧이들을 테냐? 네 배속에 있는 간이 네 몸이 여기 왔는데, 간이 어찌 못 왔는고?"
토끼가 하늘을 보고 한참 크게 웃으니 용왕이 물으시되,
"간사한 모양이 드러나니 할 말 없어 웃는구나?"
토끼가 여쭈오되,
"할 말씀은 많사오나 대왕 같은 저 지위에 무식함을 웃나이다. 대왕의 무궁한 변화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가옵시고,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기에 천지간 무궁한 이치 다 아시나 하였더니, 소토의 간 출입은 나무하는 아이와 목동들이 다 아는데 대왕 혼자 모르시니 그리 무식하십니까? 천상의 차고 이지러지는 이치를 달이 맡아 있삽기에 보름 이전이면 차옵다가 보름 이후면 줄어지니 달의 별호가 옥토(玉兎)이옵고, 지상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이치를 조수가 맡았기에 사리엔 물이 많고 조금에는 적사오니 조수의 별호 삼토(三兎)70)이오니, 소토의 배속 간이 달빛 같고 조수 같아 보름 전에는 배에 두고 보름 후에는 밖에 두어 나아가고 물러나며 차고 이지러지는 고로 약이 되어 좋다 하지, 만일 다른 짐승같이 배속에만 줄곧 있으면 허다한 짐승 중에 소토의 간이 좋다하리까? 금월 십오일 낭야산(瑯瑘山) 취옹정(醉翁亭)71)에 모족(毛族) 모임 하옵기에 소토(小兎)의 간을 내어 파초잎에 고이 싸서 방장산(方丈山) 최고봉에 우뚝 선 노송 가지에 높이높이 매다옵고 모임에 갔삽다가 별주부(鼈主簿)를 상봉하여 함께 따라왔사오니, 다음달 초하루날 복중에 넣을 간을 어찌 가져올 수 있소?"
용왕이 들어 본즉 이치가 그렇거늘, 저런 줄을 알았다면 약 가르친 선관에게 물어나 보았을 텐데 후회막급 되었구나. 또 물어,
"네가 손도 없는 것이 배속에 있는 간을 어디로 집어내고 어디로 집어넣고 임의로 출입한단 말인가?"
"소토의 밑구멍에 간 나오는 구멍 있어 배에다 힘만 주면 그 구멍으로 나오옵고, 입으로 삼키오면 도로 들어가옵지오."
"간 나오는 그 구멍이 분명히 있다는 말인가?"
"소토의 볼기짝에 구멍이 셋이오니, 똥 누고 오줌 누고 간누고 하옵지오."
용왕이 나졸 시켜 밑구멍을 살피니 세 구멍이 완연하구나.72) 용왕이 물어,
"네 간이 아니며는 짐이 병을 못 고칠 텐데, 네 배에 간 없으니 어찌 하면 좋겠느냐?"
"소토가 나가오면 소토의 간 뿐 아니오라, 함께 걸린 다른 간을 많이 가져오련마는, 소토의 먹은 마음 대왕 짐작 못하시니 소토는 가두시고 별주부 내보내어 소토의 지어미에게 소토 편지 보내오면 간 찾아 보낼 테니 그리하게 하옵소서."
별주부가 옆에 엎드려 시종을 들어보니, 저 놈 데려올 적에도 허다한 고생하였는데, 하물며 제 계집은 얼굴도 모르는 터에 어디가 만나 보며, 설령 만나 본다 해도 그 사이 개가하여 다른 서방 맞았으면 전서방 죽고 살기 생각할 리 있나? 배속에 간이 없다는 말 암만해도 헛말이니 배 가르고 보는 수다.
용왕 전에 여쭈오되,
"토끼간이 출입한다는 말이 『사기』에도 없사옵고 이치에도 부당하니, 배를 갈라 간 없으면 제가 인간세계 또 나가서 보름 전 토끼 잡아 올 테니, 배 가르고 보옵소서."
토끼가 들어본 즉 할 수 없이 죽겠구나. 주부가 말 못하게 막아야 쓰겠거든 주부를 돌아보며,
"내 아까 네 말씀을 용왕 전에 하자 하되 만리에 함께 고생하며 맺은 정이 있어 말하지 말자 했더니, 네놈이 하는 거동 갈수록 방정이다. 처음 나를 만났을 제 저 사정을 털어놓았으면 그 날이 보름날 우리 식구 수백 명이 함께 간을 빼어내니, 그 중에 나이 늙어 약 많이 든 좋은 간을 여러 보73)를 주었을 것을, 속이 그리 음험하여 벼슬하러 수궁 가자 속일 꾀만 하니 그것이 첫 번 허물, 대왕의 환후 시급하니 너고 나고 또 나가서 간을 어서 가져와야 치료를 하실 텐데, 나만 어서 죽이라니 네놈의 생긴 형용 눈은 가늘고 다리는 짧고 긴 목과 뾰족한 입, 환란은 함께 누릴 수는 있어도 안락을 함께 누릴 수는 없음이라, 나를 죽여 간 없으면 어떤 토끼 다시 보리? 내가 수궁 벼슬 하자고 너를 따라 간다는 말이 산중에 낭자하였으니, 나는 다시 안 나가고 너 혼자 또 나가면 산중 우리 동물들이 날 다려다 어디 두고, 뉘 속이러 또 왔는가, 토끼잡기 고사하고 네 목숨 어찌 되며, 너 죽기는 네 죄로되 대왕 환후 어찌되리? 의사는 전혀 없고 어거지 말을(억담) 저리 하니, 아나 옛다. 충신 좋제, 나라 망할 망신이제. 내 목숨 죽는 것은 조금도 한이 없다. 독수리 사냥개에게 구차히 죽지 말고, 수정궁 용왕 앞에 백관 버려 서고 칠 척이나 되고 용무늬가 새겨져 있는 잘드는 칼로 이 배를 갈랐으면 그런 영화 있겠느냐? 아나 옛다. 배 갈라라. 배 갈라라."
왈칵왈칵 배 내미니 주부는 할 말 없어 두 눈만 까막까막, 용왕이 본즉 그리 될 일이거든 만조를 돌아보며,
"저 일을 어찌할꼬?"
형부상서(刑部尙書) 준어(峻魚) 여쭈오되,
"두 가지 이상의 죄가 한번에 드러났을 때는 그 가운데 가벼운 죄를 따라 처벌하고 오직 형벌은 될 수 있도록 긍휼히 임해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저 토끼는 짐승으로 배속에 간 있고 없음이 암만해도 의심이니, 경솔하게 배를 갈라 간이 만일 없사오면 죄인을 신중히 심의하는 것이 못 되오니 가르지 마옵소서."
병부상서(兵部尙書) 숭어[秀魚] 여쭈오되,
"이왕 아니 죽이시면 '향기로운 미끼에는 반드시 죽은 고기가 있다.' 하니 토끼 제 마음을 감동하게 하옵소서."
용왕이 좋다 하고 성을 내었다가 짐짓 웃음을 지어, 별주부를 꾸짖는데, 토끼를 항상 존칭하여,
"토선생의 하는 말씀 똑 그리 될 일이다. 첫 번 사정 이야기 안한 것이 네가 매우 미련하다. 이 내력 하였다면 두 편 다 좋을 것을, 지난 일은 논하지 말고 토선생님 부축하여 전상(殿上)으로 모셔 오라."
용왕 좌우 모신 시녀 일시에 내려와서 부축하여 올리는데, 토끼가 품격을 높이려고 원숭이 모양으로 앞발을 추켜들고 뒷발은 잘 디디고 시녀에게 붙들리어, 눈 길게 발을 떼어 전상(殿上)에 올라가니, 별도로 자리 하나를 만들었거늘 네 발을 모으고 썩 쪼그려 앉아 놓으니, 용왕이 수인사를 새로 붙여,
"저승과 이승의 길이 서로 다르되 오랜 동안 세상에 두루 알려진 명성을 우러러 보았더니, 스스로 찾아보지 않고 와서 찾게 하였으니 오히려 미안하오."
토끼 대답하되,
"성화(聲華)74)란 것 왜 있겠소. 천만 뜻밖에 어떤 선관(仙官)이 내 이름을 일렀지요?"
"아까 우리 한 노릇은 모르고 한 일이니 괘념치 마시오."
"순간에 죽을 목숨 대왕 덕택으로 살았으니 무슨 괘념하오리까?"
"선생 간이 그리 좋아 죽는 사람 살리오면, 인간세계에 사람들도 선생네 간을 먹고 효험 본 이 더러 있소?"
"끔찍이 많지요. 제일에 신선 공부 토끼 간의 물을 못 먹으면 성공을 못하기에 안기생(安期生)75) 적송자(赤松子)76)가 다 우리 문인(門人)으로 우리 선조 간 씻은 물을 얻어먹고 신선 되어 장생불사하는 고로, 지금까지 세시(歲時) 되면 선과(仙果) 좋은 과실 설음식을 봉(封)하지요."
"만일 그렇다면 선생은 어찌하여 신선 노릇 아니하고 산중에 묻히어서 독수리와 사냥군의 밥 노릇을 하나이까?"
"그 내력이 또 있지요. 간경(肝經)77)은 나무 차지, 목실(木實)을 안 먹으면 간에 약이 아니 드니 인간세계에 있는 목실(木實) 백년 먹은 후에 천상으로 올라가오."
"선생은 인간세계 목실(木實) 몇 해나 잡수었소?"
"백년 넘게 먹었으되, 신선 남은 자리 없어 아직 하늘에 오르지 못 하였소."
"그러하면 선생 간은 약이 흠뻑 들었겠소."
"두 말씀 하시겠소? 간 빼어 내는 날은 온 산중이 향내지오."
"선생이 나가셔서 간 가지고 오시자면 몇 날이나 되오리까?"
"수로 팔천 리는 주부가 나를 업고 밤낮으로 하였으면 나흘이나 될 것이요, 육로로 이만 리는 내가 주부 업고 밤낮으로 달아나면 사흘 쯤 될 것이니, 갈 제 이레 올 제 이레, 많이 잡아 보름이면 내왕하기 넉넉하지오."
용왕이 좋아라고 대연(大宴)을 배설(排設)할 때, 운무(雲霧) 병풍 둘러치고 수정렴(水晶簾) 높이 걸고, 예부상서(禮部尙書) 문어(文魚) 시켜 풍악을 들이라니 경각에 들어오는데 미녀 이십 인은 쇠북을 흔들면서 능파대(凌波隊)78) 춤을 추고, 가동(歌童) 사십 무리는 향내 나는 소매를 나풀거려 채련곡79) 노래하고, 영타(靈鼉)80)의 북을 치고, 소라는 저를 불고, 상수(湘水)의 신은 비파 타고, 물의 신은 기를 잡고, 바다의 신은 옥쟁반 들어 옥으로 만든 잔과 호박으로 만든 술잔에 삼위로(三危露) 구전단(九轉丹)81)이 풍류가 낭자하고 연회가 매우 성대하여 불시에 하는 잔치 영덕전(靈德殿)82) 낙성연(落成宴)과 별로 진 것이 없었구나. 경망한 토끼놈이 신선주(神仙酒)를 많이 먹고 취흥이 도도하여 선녀들과 크게 춤추며 의뭉한 말을 하여,
"수궁 식구들이 모르니까 그렇지 내 간은 고사하고 입만 맞추어도 삼사백 년 예사로 살제."
선녀들이 곧이듣고 다투어 달려들어 토끼하고 입맞춘다.
온갖 장난 다한 후에, 토끼가 고개 들어 영덕전(靈德殿) 바람벽의 상량문(上樑文) 현판(懸板) 보고 경개를 의논한다.
"동쪽을 바라보니 방장산(方丈山) 봉래산(蓬萊山)이 가깝고, 서쪽을 바라보니 사막에서 길 잃지 않으며, 남쪽을 바라보니 큰물이 끝없이 흘러 온갖 고기들을 받아들이고, 북쪽을 바라보니 많은 별들이 현란하게 천자의 자리를 에워싸며, 보는 경치와 지은 글이 신통히 같소마는, 아마도 여선문(余善文)은 나이 어린 서생(書生)이라 망발(妄發)이 있는 것이, 새로 지은 영덕전(靈德殿)이 용왕(龍王)의 대궐인데, '용의 뼈를 걸어 대들보를 삼는다[掛龍骨以爲梁]'는 '용골(龍骨)' 두 자 망발이오."
용왕이 크게 놀라,
"그 말씀이 과연 옳소. 그 두 자 고치시오."
"용 자(龍字)를 파 내고, 고래 경 자(鯨字) 좋을 터이나 내 길이 바쁘오니 다녀와서 하옵시다."
용왕 전에 하직하매, 용왕이 의뭉하여 토끼를 달래려고 좌우를 돌아보며, "토선생 저 공로를 측량할 수 없었으니, 간 가지고 오신 후에 무슨 벼슬 무슨 상급 만분의 일이나 갚아 볼까?"
이부상서(吏部尙書) 농어[鱸魚] 여쭈오되,
"주(周)나라 다섯 작위(爵位)83) 중에 공(公)의 벼슬이 머리 되고, 진(秦)나라 중서령(中書令)84)이 토씨의 선대(先代) 직함, 토선생 지닌 재주 천문지리 다 보오니, 낙양공(洛陽公) 중서령(中書令)에 태사관(太史官)85)을 겸하소서."
호부상서(戶部尙書) 방어[魴魚] 여쭈오되,
"토선생 장한 공로 작위(爵位)로만 못 할지라, 땅을 나눌 터이나 동정호 칠백 리를 모두 베어 봉한 후에, 푸른 띠 누런 유자(柚子) 차지하여 공(貢)을 받고, 비단 천 필 진주 받고 매년 보내옵소서."
토끼가 여쭈오되,
"소토의 간을 잡숫고 대왕 환후 회복되면 작은 상급 없사와도 오랫동안 꽃다운 이름을 남길 테니 과히 근심 마옵소서."
별주부와 함께 수정문(水晶門) 밖 썩 나서니 이번은 살았구나. 이왕에 왔던 터에 착실히 구경하며 산중 여러 동무들에게 이야기나 하자 하고, 주부를 달래어,
"올 때에는 바빠서 만경창파(萬頃蒼波) 꿈속이라 아무데인 줄 몰랐으니, 오늘은 그리 말고 내가 묻는 대로 자세히 가르치면, 너도 먹고 오래 살게 좋은 간(肝)을 한 보 주제."
주부가 생각한즉 이번에 가는 길은 토끼에게 매인 목숨 토끼의 하는 말을 들어야 할 터이거든, 그리하자 허락하니 …
“저 까만 것 무엇?"
"'대들보 위를 날아오고 날아가는 제비'라는 강남에서 오는 제비다."
"저기 가는 것 무엇?"
"‘강과 하늘은 아주 넓어 끝이 없는데 새는 쌍쌍이 날아간다'는 거 참새다."
그럭저럭 문답하며 창해를 다 지나고, 유교변(柳橋邊)에 도착하여 토끼는 앞에 서고 주부는 뒤따를 때, 토끼의 분한 마음 주부의 지른 죄를 곧 호령(號令)할 터이나, 저 단단한 주둥이로 팔다리 꽉 물고서 물로 도로 들어가면 어쩔 수가 없겠구가. 바다빛이 안 보이도록 한참을 훨썩 가서 바위 위에 높이 앉아 주부를 호령한다. 원
"히놈 자라야! 네 죄목을 의논하면 죽여도 아깝지 않도록 괘씸하다. 용왕이 의사 있어 나같이 총명하고, 나의 구변 없기 용왕같이 미련터면, 아까운 이 내 목숨 수중원혼(水中冤魂) 되겠구나. 『동래박의(東萊博議)』86)라는 책을 보니 '짐승이 미련하기가 물고기나 짐승이나 같다'더니 어족(魚族) 미련하기 모족(毛族)보다 더 하도다. 오장에 붙은 간을 어찌 출입하겠느냐? 네 소위 생각하면 산중으로 잡아다가 우리 동무 다 모아서 잔치를 배설하고 푹 삶아 백소주 안주감 초장 찍어 먹을 테나, 본사(本事)를 생각하면 요임금을 보고 짖는 도척(盜蹠)의 개87)나 계포(季布)88)가 무슨 죄리오? 저마다 자기의 임금을 위하였으므로 십분 짐작하였으며 만경창파(萬頃蒼波) 네 등으로 왕래하니, 죽고 사는 고생을 함께 하였기에 목숨 살려 보내주니, 그리 알고 돌아가되 좋은 약 보내기로 네 왕에게 허락하니, 점잖은 내 도리에 어찌 식언(食言)하겠느냐? 내 똥이 매우 좋아 열을 내리게 한다 하고 사람들이 주워다가 앓는 아이를 먹인다. 네 왕 두 눈망울에 열기가 과하더라. 갖다가 먹이면 병이 곧 나으리라."
작은 총알 같은 똥을 많이 누어 칡잎에 단단히 싸 자라 등에 올려놓고 칡으로 감아 주니, 주부(主簿)가 짊어지고 수궁(水宮)으로 간 연후에 구덩이 안에서 달리는 짐승이라니, 토끼 오직 좋겠느냐, 깡장깡장 뛰어가며 방자(放恣)하게 뽐내 자랑하는 기색이 무섭구나.
"항적(項籍)은 천하장사 팔천병 거느리고 한태조(漢太祖)89)와 다투더니 오강(烏江)을 도로 못 건너고90), 형가(荊軻)91)는 만고 협객 삼척검(三尺劍) 빼어 들고 진시황(秦始皇) 찌르려다 역수(易水)를 도로 못 건넜다. 신통한 이 내 재주 잠깐 동안의 말솜씨로 용왕을 속여 놓고, 이 물 도로 건넜구나. 반갑도다 반갑도다. 우리 고향 반갑도다. 의구한 청산녹수(靑山綠水) 모두 전에 보던 대로다. 푸른 봉 흰 구름은 나 앉아 졸던데, 덩굴 과실 나무 열매는 나 주워 먹던 대로다. 너구리 아재 평안하오? 오소리 형님 잘 있던가? 벼슬 생각 부디 말고 이사(移徙) 생각 부디 마소. 벼슬하면 몸 위태롭고 타관 가면 천대받네. 몸 익은 청산풍월(靑山風月) 낯익은 우리 동무 주야상봉(晝夜相逢) 즐겨 노세."
이때에 주부는 수궁에 들어가서 용왕(龍王)이 토끼똥 먹고 병이 나아 충신(忠臣)되고, 토끼는 신선(神仙) 따라 월궁(月宮)으로 올라가서 이때까지 약을 찧으니, 자라와 토끼란 것이 동시(同是) 미물(微物)로서 장한 충성(忠誠) 많은 의사(意思) 사람하고 같은 고로 타령(打令)92)을 만들어서 세상에 유전(遺傳)하니, 사람이라 이름 달고 토끼 자라만 못 하오면 그 아니 무색한가? 부디부디 조심하오. 토별가(兎鼈歌) 종(終)93)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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