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쓰기 38) [법고이창신(法古而刱新)하자]
이 웅 재
조동일은 말했다. “국문학을 바로 이해하려면 이른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단절시킨 지난날의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고.(『한국문학통사 1』,지식산업사, 1982. ‘머리말’) 대학교의 ‘국문학과’(이것도 ‘한국문학과’라야 한다고 했다.)에서는 3가지의 전공계열이 있다. ‘고전문학 전공, 현대문학 전공, (국)어학 전공’. ‘어학’쪽에서는 ‘고어 전공’, ‘현대어 전공’이 따로 없는데, 문학에서만 ‘고전’과 ‘현대’를 나누어 놓았다. 이것은 순전히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다. 특히 문학 쪽에서 그 둘을 나누어 놓은 것은 그만큼 문학이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을 지배하는 힘이 크다는 것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한마디로 과거와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내선일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역사를 지워버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조(李朝)’라는 말을 애용했던 것이다. ‘이조’, ‘이씨조선’. 얼마나 교묘한가? 조선은 그래서 이씨, 그것도 전주 이씨들만의 왕국으로 평가 절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전통은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전통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가 없는 아주 견고한 것이다. 그런데 광복을 맞는 후에도 우리는 늘 ‘전통단절’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이고 있었다. 과거는 쓸모없는 것, 100% 새로운 것으로만 채워야 창조적인 역사가 전개될 것이라고들 믿었다. 일제를 청산하자는 것은 맞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일제가 조장했던 지난날의 조선의 역사와 문화, 더 나아가서 고려나 신라를 비롯한 3국의 역사와 문화까지도 함께 청산하자는 식의 사고로 이어진 것은 바로 일제의 그 교활한 전통 단절의 꼼수에 넘어간 불상사였던 것이다. 문학 쪽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바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게 바로잡혀지지가 않는다. 고전문학 따로, 현대문학 따로.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1939년 「가람시조집」이 백양사에서 나오자, 정지용은 '송강 이후에 가람이 솟아 오른 것이 아닐까'라고 했으며, '가람 이전에 가람이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이 없다'는 발문으로써, 그 위대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송강’의 이름이 들먹여져서 얼핏 고전문학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진 듯싶기도 하다. 과연 그럴까?
이병기의 ‘시마(詩魔)’라는 작품을 한번 보자.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히 그의 모양을 찾아내기 어렵다.
펴 든 책 덮고 들은 붓 던져두고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나니
이 생의 영과 욕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시를 짓는 사람 치고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시(시조)와 같은 발상의 작품을 쓴 사람으로는 일찍이 고려시대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전하는 그이 「시벽(詩癖)」이라는 작품을 보자.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아침에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며
한번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깍아내
몇 편의 시를 쥐어 짜내니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도 또한 남아있지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이 모양 참으로 우습건만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본다.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뿐만 아니라 「시벽(詩癖)」가지고도 모자라서「구시마문(驅詩魔文: 시 귀신을 몰아내는 글)」까지 지었다. 그 글에서 이규보는 말한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게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시를 마귀(魔鬼)’로까지 보고 있는 이유는 시마(詩魔)와 한번 만나기만 하면 시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김풍기는 『저주받은 시인들의 벗 』이란 글에서 이규보가 말하는 ‘시마’의 다섯 가지 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세상과 사물을 현혹시켜 아름다움을 꾸미거나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2. 신비를 염탐하고 천기를 누설한다. 이처럼 사물의 이치를 밝혀냄으로써 하늘의 미움을 받아 사람 의 생활을 각박하게 한다.
3. 삼라만상을 보는 대로 형상화한다.
4.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국가나 사회의 일에 간여하여 상벌을 마음대로 한다.
5. 사람의 형용을 초췌하게 하고 정신을 소모시킨다.(158쪽)
이규보가 시마의 죄상이라고 들고 있는 것은 결국 ‘시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159쪽)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서 일컫는 ‘시’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이규보는 「시벽(詩癖)」,「구시마문(驅詩魔文」가지고도 또 모자랐나 보았다. 그래서「삼마시(三魔詩)」라는 글까지도 남겼다. 삼마(三魔)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색마(色魔)와 주마(酒魔), 그리고 시마(詩魔)인 것이다. 그 서문에서 이규보는 말한다. "내가 연로하여 오랫동안 색욕(色慾)은 물리쳤으나, 시와 술만은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주(詩酒)도 이따금 흥미를 붙일 것이지 성벽(性癖)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 성벽을 이루면 곧 마(魔)가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그 중 시마(詩魔)를 노래한 시는 다음과 같다.
시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아닐진대(詩不飛從天上降)
애태우며 찾아낸들 마침내 무엇하리.(勞神搜得竟如何)
산들바람 밝은 달은 처음엔 좋겠지만(好風明月初相諭)
오래 되어 빠지게 되면 이것이 시마(詩魔)라네.(着久成淫卽詩魔)
조선 중기의 문인 최연(崔演)이란 사람도 이규보를 이어받아「축시마(逐詩魔)」란 글을 남겼다. 최연은 시마가 자신에게 온 뒤 나타난 증세를 이렇게 쓰고 있다.
네가 오고부터 술에 어리취한 것 같고 바보가 된 듯 멍하게 신음하며 구슬퍼 하여 한 병부(病夫)가 되고 말았다. 장차 네게서 벗어나고자 일 년 내내 애를 썼으나, 네게서 떠나고자 산에 올라가면 너는 어느새 나를 따라 노닐고, 바다로 들어가면 너는 어느새 나를 찾아내는구나. 사물을 만나면 눈길을 쏘아보아 취함이 많아도 그만두지 않았고, 내 이목(耳目)의 총명함을 빼앗아 가서 나의 보고 들음을 어지럽게 하였고, 머리가 쑥대가 되어도 빗질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칠어도 다스릴 줄 모르고, 성글고 게을러 의논을 자초하며, 교만하고 오만하여 허물을 불러들이고, 기림은 뭇 사람의 뒤에 있고, 꾸짖음은 다른 사람의 앞에 있게 하니, 나를 굶주리게 하고 나를 빈한하게 하는 것이 또한 네가 불러들인 것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시(문학) 생각, 그래서 시(문학)는 마귀가 되는 것이다. 어렸을 적 한 번만이라도 시(문학)를 좋아해 보았던 사람은 평생을 두고 그 시(문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1968년 계명대 교수를 시작으로 영남대·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서울대 교수를 지내고『한국문학통사』(전6권) 등 눈부신 연구업적을 낸 조동일(趙東一) 교수는 퇴직 후 시·소설·희곡·수필 등 16편의 작품을 담은 『조동일 창작집』(지식산업사, 2009)을 출판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문학 연구자로 대학교수직에 41년 반을 재직했지만 늘 창작에 미련과 추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지요."
그는 1955년 경북고 1학년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첫사랑’, 그것이 시요, 문학이었던 것이다. ‘시마(詩魔)’는 그래서 이병기에게서만 높은 점수로 평가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최연, 이규보에게서도 ‘시마’는 ‘시마’였던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것만으로 끝날 일도 아니다.
성당(盛唐) 때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취음(醉吟)」이란 시에서 노래했다.
주광(酒狂)에다 더하여 시마(詩魔)까지 끌어와(酒狂又引詩魔發)
한낮부터 슬피 읊다 저물녘이 되었네.(日午悲吟到日西)
곤드레만드레 취한 술, 거기에 시마(詩魔)까지 찾아왔으니, 한낮부터 슬피 읊조리기 시작한 시가 뉘엿뉘엿 땅거미가 지도록 이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중에서도 당연지사가 아닐 것인가?
문학에는 애시당초 빠져들 일이 아니다. 한번 빠져들면 헤어날 수 없는 것, 현실적인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께서는 어린 손자 손녀가 ‘옛날얘기’ 좀 해달라고 하면, “옛날얘기 좋아하문 가난해진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숭늉 한 그릇을 마시면서, 그 숭늉 맛 같은 ‘옛날얘기’를 재탕 삼탕하셨던 것이다.
얘기가 조금, 아니 상당히 다른 쪽으로 빠져 버렸다. 다시 되돌아가 보자. 그래, 그렇다. 고전과 현대, 그건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건 분명 연속성(連續性)이 있는 일들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그건 ‘전통’이라는 맥락 위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 여겨진다.
‘전통’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그건 마치 ‘아버지 어머니’ 없는 ‘딸, 아들’과 같은 문제가 아닐까? 전통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건 하루아침에 성립되는 것도 아니요, 어느 순간에 사라질 성질의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굳어져 형성된 것이 전통이요, 그리고는 서서히 변모해가는 것이 전통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통해 옛 것은 조금씩조금씩 새롭게 발전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규보가 말한 ‘용사이신의(用事而新意)’와도 상통하는 말이다. 용사, 곧 고사를 많이 이용하는 일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신의, 곧 독창적인 시세계를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규보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조선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법고이창신(法古而刱新)’으로 이어지고 있다. ‘법고(法古)’하면서도 ‘창신(刱新)’하는 것, 곧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연암이 말한 글쓰기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는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가 지은 『초정집(楚亭集)』의 서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것을 본뜨는[法古] 사람은 그 자취에 구애됨이 병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刱新] 사람은 법도가 없음[不經]이 폐단이다.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法古而知變]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법도가 있다면[刱新而能典] 지금의 문장은 옛 문장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今之文 猶古之文也]
법고이창신(法古而刱新)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별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고전문학을 하는 사람도 현대문학을 알아야 하고, 현대문학을 하는 사람도 고전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법고이창신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가 있게 된다는 말이다.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도 그 소재와 표현 면에서 볼 때, 우리의 고전 두 작품과 맥을 이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소월의 고향 평북 정주(定州) 근처의 영변(寧邊)에는 약산(藥山)이 있고, 그 약산에는 동대(東臺)가 있다. 그리고 그 동대의 진달래꽃이 유명하다. 아편 과다 복용으로 요절(夭折)한 소월이었다. 그냥 보아도 절경인 약산 동대의 진달래꽃을 소월은 사랑하는 님과의 이별을 떠올려 보며, 아마도 그 마음 아림은 저 너무나도 화사하게 피어난, 그래서 오히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머금게 하는 진달래꽃과도 같게 느꼈던 모양이었다. 약산 동대의 진달래꽃은 이미 우리의 사설시조에서 ‘왜철쭉’이라는 이름으로 노래되었던 소재이었다.
약산동대(藥山東臺) 여즈러진 바회 틈에 왜철쭉 같은 저 내님아,
내 눈에 덜 밉거든 남인들 지나보랴.
새 많고 쥐 꼬인 동산(東山)에 오조 간 듯하여라.
그런가 하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에서의 ‘아니’의 도치(倒置)가 겉으로는 슬프지만 그 슬픔을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 참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감을 배가시키고 있다는 표현이라고들 하는데, 그러한 표현은 역시 우리 고전 작품들에서 흔히 보아왔던 모습이 아니었던가?
바람도 쉬여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여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海東靑(해동청) 보라매도 다 쉬여 넘는 高峯(고봉) 長城嶺(장성령) 고개.
그 너머 님이 왓다 하면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여 넘으리라.
이형상(李衡祥)의 악학습령(樂學拾零 : 일명 甁窩歌曲集)에 나오는 사설시조이다.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여 넘으리라.’에서 ‘아니’가 도치되어 있는 것이다. 고어에서는 그것이 정치(正置)였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2장을 보자.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이러한 표현은 오늘날 경상도 사투리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어학 등을 너무 별개의 것으로만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소재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도 많은 고전을 익혀두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많은 역사소설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부분의 서정주(徐廷柱)의 작품들을 보면 쉽게 수긍이 가리라고 여겨질 것이다. 양주동(梁柱東)의 「면학(勉學)의 서(書)」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혹은 이미 정평 있는 고전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를 호흡한 신서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와 각자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는 말한다.
"생동하는 세대를 호흡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으로서 동서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 섭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으로서 초현대적인 교양에 일보라도 낙오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로 규정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09.11.14. 원고지 44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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