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품과 아빠의 양어깨 위
이 웅 재
저만치에서 어린애를 안은 중년 여인이 걸어오고 있다. 포대기에 감싸 안긴 아이는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힐끗 쳐다본 그 모습은 더할 수 없이 평화로웠다. 뽀오얀 아이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번져 있었고, 가끔씩은 입술을 오물거리기도 하였다. 꽃밭 속에서 뛰노는 꿈이라고 꾸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귀엽디귀여운 모습이었다.
엄마의 품은 언제나 포근하다. 이른 봄날의 양지쪽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엄마의 품이다. 거기에서는 저절로 잠이 들곤 하였다. 옛적 가난에 쪼들린 배고픔도 엄마의 품에만 안기면 까무룩하게 잊혀지고 들척지근한 젖 냄새를 맡으며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곤 하였다.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대던 기침도 엄마의 품 안에서는 어느 순간엔지도 모르게 까뿍 멈춰버린다.
‘품’이란 물리적으로는 ‘가슴’을 지칭한다. 그러나 ‘품’은 ‘물리적 성격’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전적으로도 ‘따뜻한 보호를 받는 환경’이란 비유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품’이란 명사에서 파생된 ‘품다’라는 동사는 ‘따뜻한 보호를 베풀어준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품다’라는 말에는 ‘정(情)이 흐른다’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정’은 과학을 초월하는 무한한 힘을 가진 말이다.
호주인 산모(産母) 케이트(Kate)는 쌍둥이 남매를 낳았으나, 27주 만에 몸무게 1kg도 되지 못한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 제이미(Jamie)는 세상의 빛을 본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숨을 멈추었다. 의사는 차가운 사망선고를 내리면서 담요로 감싼 제이미의 시체를 산모에게 건넸다. 제이미를 품에 꼭 안은 케이트는 환자복 상의를 벗었다. 아기의 몸을 감싼 담요도 벗겨냈다. 그리고는 아기의 작은 몸을 맨살끼리 품에 꼭 껴안았다.
“네 이름은 제이미야,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너에겐 에밀리라는 여동생도 있어.”
케이트는 그렇게 2시간 동안 제이미를 안은 채, 계속 아이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더 이상의 포옹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것으로 여겨질 무렵, 갑자기 아기의 몸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케이트는 제이미가 숨을 헐떡거리는 것으로 느껴졌다. 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의사는 숨진 아기의 반사행동이라고 설명했다. 케이트는 손가락에 모유를 찍어 아기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자 숨을 헐떡거리던 제이미가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아기는 힘겹게 눈을 떴다. 이어서 손을 뻗어 엄마의 손가락을 잡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엄마의 품은 그렇게 기적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문은 이를 ‘캥거루 케어'라고 이름 붙였다. 최첨단 의료기술도, 온갖 장비를 갖춘 인큐베이터도 엄마의 품보다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스킨 투 스킨’, 그것은 전통적인 한국 여인들의 육아방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한국인들은 온갖 역경에 처해 있을 적에도 ‘정’이라는 특수한 보호막 속에서 지냈던 유아시절의 면역력에 의해 좀처럼 좌절하지 않는 DNA를 가지고 그 역경을 헤쳐나오곤 하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서 길을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젊은 아빠 한 사람이 아이를 무등을 태운 채 내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에게서 무등을 타 보았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젊은 아빠는 아이를 양팔로 좀더 치켜 올렸다가 다시 양 어깨에 내려 앉히곤 했다. 그럴 적마다 아이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그렇다!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높은 곳에서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물건들도 바라다볼 수가 있다.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다. 툭 트인 느낌, 그것은 우선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여겨지는 시원스러움이 있다. 기어다닐 때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가 있고, 걸어다닐 때도 맞닥뜨려보지 못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새삼스레 인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높은 곳을 좋아한다. 그러한 심정을 정비석은 ‘산정무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비로봉 최고점이라는 암상에 올라 사방을 조망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외 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을 발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 장군(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전망대는 그래서 생겨난다. 군(軍)에서도 적정(敵情)을 살피기 위한 GP(경계초소)는 대부분 산등성이에 자리 잡지 않던가.
물리적인 고지대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에서도 높은 것을 선호한다. 높은 자리에서 상대를 자신의 뜻에 맞도록 지휘하고픈 심정도 무등을 탄 아이가 무등을 태워주는 아빠의 귀를 잡아당기거나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는 행동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이랴, 이랴!” 거기에 이어지는 것은 “낄낄낄!”이 아니던가. 무등을 타면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아울러 무등을 타면서 균형을 취하여 안전하게 대처하는 동작도 훈련하고, 위험한 상태를 즐기는 모험심도 충족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등을 태워주는 아빠가 자기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 믿음도 배우게 되고, 아, 무엇보다도 자신에게는 무등을 태워주는 든든한 받침대, 믿을 만한 후원자, 속되게 말해서 ‘빽’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감을 배우게 된다는 점 또한 무등타기의 효용이리라.
엄마의 품과 아빠의 양 어깨 위는 그래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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