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72) 여덟 분(盆)의 국화 화분과 함께 대작(對酌)을 하였던 신용개(申用漑).hwp
경북 인물열전 (72)
여덟 분(盆)의 국화 화분과 함께 대작(對酌)을 하였던 신용개(申用漑)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9. 慶尙道 高靈縣 人物 條]
이 웅 재
신용개(申用漑: 1463-1519)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서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등이다. 조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고, 아버지는 도승지를 지내고 함길도관찰사로 있을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문에 전사한 후, 영의정에 추증된 신면(申沔)이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3·4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정효항(鄭孝恒)에게서 배우고, 관례 전에 성균관에 들어가,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제2등을 차지하였고, 1488년에는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1등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권지는 임시직, 승문원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은 관청) 직을 처음 받았고, 이후 여러 직을 거치면서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으며,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1492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인재 양성을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다.
1497년(연산군 3)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그의 부친을 살해한 자가 상경한 것을 알고 밤중에 노상에서 격살(擊殺)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에는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등에 올랐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1504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돌아와 복명(復命)하기도 전에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관직이 삭탈되고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어 이듬해 양관(兩館: 弘文館과 藝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올라 당대의 문형(文衡)을 맡았다. 그해 가을 다시 주문부사(奏聞副使: 주문사는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있을 때, 임시로 파견하였던 비정기적인 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고, 그해 겨울에는 공조참판, 이어서 대사헌, 병조판서, 좌우찬성 등을 거쳐, 1516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2년 뒤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1514년(중종 9), 강상을 바로 잡기 위해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를 펴낼 때 그 책임을 맡았다. 이 책은 세종 때 엮어진『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 중종 때 왕명에 의해 엮어 간행한 책이다. 『속동문선(續東文選)』도 김전(金詮)·남곤(南袞)·최숙생(崔淑生) 등과 함께 중종의 어명으로 편찬하였다.
유고집으로 아들 신한(申瀚)이 유문(遺文)을 수습하여 1541년(중종 36)에 간행한 『이요정집(二樂亭集)』이 있는데, 좌의정까지 지낸 사람의 문집으로서는 장계(狀啓: 일종의 보고문) 내지 소차(疏箚: 상소문) 따위가 별로 없다. 그 제9권에 나오는「왜노송유편부의(倭奴送留便否議)」는 삼포왜란(三浦叛亂) 후 정부의 일본에 대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가 되기도 한다.
성품이 솔직하고 호방하였으며, 문명(文名)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문무를 겸비하여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났다. 게다가 기품이 높고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었으나, 그가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는 친소(親疎), 궁달(窮達), 귀천에 구별을 두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며, 일찍이 성종도 그의 높은 학덕을 아껴 어의(御衣)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
그는 또한 술을 무척 좋아하여 때로는 늙은 계집종을 불러 대작을 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큰 잔으로 술을 마셔 대취하여 쓰러져야 마시기를 그만두었다.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그의 술과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그는 정승이 되기 전에 국화 화분 여덟 개를 정성스럽게 길렀는데, 가을이 되어 국화꽃이 피자 그 화분들을 대청 한가운데 가져다 놓고 향기를 감상하기를 즐겼다. 하루는 집안사람들에게 ‘오늘 손님 여덟 분이 오실 터이니 술과 안주를 마련해 놓으라.’고 분부하였다. 종일 기다려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둥근 달이 떠올라 대청에 달빛이 휘영청 비치자, 드디어 ‘술을 내오라.’고 하고는, 여덟 분(盆)의 국화 하나하나에게 술 두 잔씩을 권하면서, 그 권할 때마다 자신도 함께 대작하여 대취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의 시가 여럿 전하고 있다. 33권 전주부 누정 「매월정(梅月亭)」조(條)에는, “매화[玉蕊]와 달[金波]이 서로 청신함을 다투어, 맑은 빛 담담한 모습이 우리의 벗이로다. 달 그림자[廣寒影]가 천상에 춤추니, 고야산(姑射山)에 아가씨처럼 고운 신선이 그 아닌가. 눈이 깊으니 달 속 두꺼비는 뼛속까지 차갑고, 바람 탄 무학(舞鶴)은 날개가 바퀴처럼 크구나. 나부산(羅浮山)은 고래로 신선과 진인(眞人)이 사는 곳. 사웅(師雄)으로 하여금 하룻밤을 친하게 한들 어떠리.”라 읊었으며, 동 「쾌심정(快心亭)」조에는, “푸른 산이 우뚝 끊어진 모퉁이로 병풍처럼 푸른 물이 둘렀는데, 누가 좋은 정자를 물가에 지었는가. 잔잔한 물결에 바람이 없어 거울처럼 비치고,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로 해가 지니 붉게 흙더미를 이루었네. 찬 하늘이 떨리니 가을이 장차 저무는데, 멀리 떠난 나그네가 등림(登臨)하여 머리를 홀로 돌리네. 또한 젓대 소리가 나를 흥기시키니, 맑은 시가 의루재(倚樓才: 당나라 시인 杜牧은 趙嘏가 지은 시구 중 ‘倚樓’라는 말이 나오는 대목을 좋아하여, 그를 ‘조의루’라 불렀는데, 이후 시를 잘 짓는 재주를 ‘의루재’라 하였다.)를 빌릴 필요가 없네.”라 하였다. (2014.3.29.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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