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인물열전

(73) 김시습과 동문수학을 했던 정정정(亭亭亭) 서거정(徐居正)

거북이3 2014. 4. 6. 15:56

    

#경북 인물열전 (73) 김시습과 동문수학을 했던 정정정(亭亭亭) 서거정(徐居正).hwp

 

 경북 인물열전 (73)

          김시습과 동문수학을 했던 정정정(亭亭亭) 서거정(徐居正)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6. 慶尙道 大丘都護府 人物 條]

                                                                                                                            이 웅 재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서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증조부는 호조전서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서미성(徐彌性)이며, 권근(權近)의 외손자이다. 본관은 달성(達城: 대구)으로 외가인 경기도 임진현에서 성장하고 공부했던 서거정은 본관지인 대구를 특별히 사랑하여 「대구 10영(詠)」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6살에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신동(神童)이라 불리었다. 같은 신동이라 부르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가는 길이 서로 달랐다. 그는 유방선(柳方善) 등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지리․의약․복서․성명․풍수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 박사 등을 거쳐 1457년(세조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다음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에는 좌찬성(左贊成),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대제학(大提學)에 책봉되었다.

그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에서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과거시험관을 23번이나 지내면서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서거정은 일찍이 명나라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시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데, 서거정이 계속 붓을 멈추지 않자 기순이 탄복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그 재능을 칭찬하고, 우리 사신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안부를 물었을 정도였다. 때문에 명나라 사신과 조선 접반사(接伴使)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황화집(皇華集)』으로 일찍이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경국대전』,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하여 관인문학의 절정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개인적인 저술로도 『역대연표(歷代年表)』를 비롯하여, 비평안(批評眼)이 뛰어난 『동인시화(東人詩話)』, 설화의 집대성인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과 역사, 풍속 등을 채록한 『필원잡기 筆苑雜記』, 시문집 『사가집(四佳集)』 등이 전한다. 글씨로는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가 남아 있다.

율곡이 지은 「김시습전」의 일화 하나를 보자. 어느 날 서거정의 화려한 행차가 막 조정에 들어가느라고 행인을 물리치고 있어, 모두가 길을 비켜서고 있는데 남루한 옷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흰 대로 엮은 삿갓)를 쓴 채로 그 길을 지나가던 한 사내가 느닷없이 행차의 앞길을 가로막고 말했다.

“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

무례함에 놀라 보니 김시습이다. 서거정이 웃으며 대답하고 수레를 멈추어 이야기하니,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쳐다보았다. 조정의 벼슬아치 가운데 어떤 이가 김시습에게 모욕을 당한 사람이, 서거정에게 그의 죄를 다스리자고 하자 서거정은 말했다.

“그만두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지려 하는가. 지금 이 사람을 벌하면 백대 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에 누가 되리라.”

두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비범한 능력으로 주위의 시선을 받았던 사람이요, 당대 최고 문인이었던 이계전(李季甸)에게서 동문수학했던 사이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시벽(詩癖)과 주벽(酒癖)이 있었다. 서거정의 시는 6,000수가 넘는데, 그 중 술을 노래한 것이 의외로 많다. ‘한중(閑中)’이라는 작품에는, “한가로이 읊조리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또 한가로이 거닌다(閑吟閑酌仍閑步).”면서 ‘한(閑)’ 자를 무려 일곱 번이나 사용하며 시와 술을 노래했다.

서거정은 수백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방외인을 대표하는 김시습과는 비교가 되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조선왕조실록』 성종 19년 12월 24일 자, 그의 「졸기(卒記)」는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後生)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申鉉圭 편저, 『朝鮮文人卒記』, 보고사, 1998, p.170.)는 혹평으로 끝맺는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었는데, 서울시의 도시 계획으로 1975년 화성시 봉담읍으로 이장하였다. 서울의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 근처에는 서거정이 노닐던 사가정이 복원되어 있는 사가정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14.4.6. 15매)

#경북 인물열전 (73) 김시습과 동문수학을 했던 정정정(亭亭亭) 서거정(徐居正).hwp
0.0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