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
이 웅 재
일이 있어서 서오릉 근처엘 갔다가 올 때였다. 파란색 702-A 버스를 탔다. 서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빈 좌석도 별로 없었다. 나는 용케도 뒷문 맞은편 쪽의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거기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자리, 뒷문 바로 앞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 또 하나의 빈자리가 있었다. 그 앞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왜 앉지 않고 서 있을까? 자세히 바라다보니, 어라? ‘애인을 위한 자리’라는 글씨가 보인다. ‘애인을 위한 자리’, 그런 자리도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일긴 했지만, 먼 길을 왔다 가는 참이라서 피곤하기도 해서 잠깐 눈을 감고 지냈다.
한 정거장쯤 지났을까? 감았던 눈을 뜨는 순간, 약간 다리를 저는 30대쯤 되어 보이는 ‘여인’ 한 사람이 승차를 하고는, 비틀거리면서 그 ‘애인을 위한 자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청년이 여인을 그 ‘애인을 위한 자리’로 안내하였다. 아, 청년은 저 여인의 애인인 모양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는 무심한 체하려고 했는데도 웬일인지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가고 있었다.
청년이 무어라고 말하면 여인은 깔깔대고 웃었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평소에 들어보기가 힘든 그런 웃음소리였다. 아, 저 여인이 애인이었었나? ‘웃으면 복이 온다든데….’ ‘복(福)은 저 혼자 천천히 오고 화(禍)는 쌍으로 온다’고 하지만, 저 두 사람에게는 복이 쌍으로 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두 사람에게 쌍복이 내릴진저, 속으로 뇌이면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덜커덩! 버스가 조금 심하게 요동을 치는 바람에 또다시 눈을 떴다. 정거장이었다. 그런데 여인이 혼자서 비틀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아, 두 사람은 애인 사이가 아니었었나? 청년은 여인을 따라 내리지도 않았고 그녀가 내리고 난 빈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도대체 두 사람은 어떤 사이였던 것인가? 계속 궁금증이 일어서 더 이상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도리가 없었다. 아니, 잠이 저절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궁금증은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일이 아니던가?
다다음 정거장에서 팔 하나가 없는 여인이 올라오더니 휘휘 둘러보다가 그 빈자리를 찾아와 앉았다. 청년은 역시 그 여인에게도 아주 다정스런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여인 역시 앞서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맑고 행복스런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 이 여인이 애인이었었나? 그런데 그 여인도 얼마 안 가서 다시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따라내리지 않았다.
다시, 또 다시….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아니, 무슨 애인이 그렇게 많지? 나는 없는데…. 그런데 이상하잖아? 몸이 불편한 사람들만 골라서 애인으로? 그건 생각만 해도 불순했다. 한 사람만이었더라면 ‘순애보’감이 될 수도 있는 사연이었겠지만, 일부러 불편한 사람들만 골라서 애인을 삼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순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장애인들만 골라서….’ 번쩍 머리를 스치는 단어, ‘장애인들만….’
버스가 몹시 흔들렸다. 청년의 몸이 그 자리에서 약간 떨어지는 순간, ‘애인을 위한 자리’라는 글씨의 앞쪽에 무슨 글자인가 지워져 있는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그랬다. 그 자리는 ‘장애인을 위한 자리’였다. 처음부터 ‘애인을 위한 자리’라고 알고 있었던 내가 잘못이었다. 애인을 위한 자리라면 당연히 좌석이 맞붙은 2개짜리였어야지 좌석 하나만으로는 어불성설이었지만, 피곤했던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좌석 앞에 청년이 서 있었기에 그 자리에 와 앉는 사람은 당연히 여성일 것이라는 무의식적 예단도 문제였었지만, 용케도 그 자리에 와서 앉는 사람은 여성들뿐이었던 때문에 나는 그런 점은 까마득하게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도 잘못이었다.
뒤늦게나마 ‘장애인을 위한 자리’라는 점을 알게 되자, 내게는 갑자기 그 청년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몇 정거장씩 그 자리가 비어 있어도 앉지 않고 지냈던 그 청년, 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여인들을 잠시나마 밝고 맑고 티없이 순수한 웃음을 웃게 재미난 이야기를 계속 해 주었던 그 청년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다. (15.12.19. 1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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