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샘지구 2
이 웅 재
드디어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 오랜 추억이 서린 곳이다.
“경주, 오래간만에 와 보는 거지?”
친구가 물었다.
“그래. 경주는 내게 잊히지 않는 곳이야.”
“왜?”
“경주, 내 오랜 추억이 서린 곳이지. 경주는 내 신혼여행 때 첫 기착지였거든.”
“첫 번째라니? 그럼 신혼여행 때 여러 곳엘 다녔다는 거야.”
“그래, 대충 남한 일주를 했거든. 한 일주일 걸렸나? 집에서들은 난리가 났었지. 미리 그렇게 하겠다는 얘기를 안 해 놓은 때문이지. 길어야 사흘 정도로 생각했는데 일주일 동안 오리무중이었으니 말이야.”
경주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려고 택시를 잡았는데, 운전기사가 ‘신혼이냐’고 물어보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집이 근처라면서 서둘러서 다녀온 기사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그리곤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서 그 필름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때 얼마나 고마웠던지…. 얘기를 듣던 친구가 딴지를 건다.
“사모님이 무척 예뻐 보였나 보다.”
나도 토를 안 달 수가 없었다.
“기사가 여자 분이었는데….”
그랬더니 아내가 옆에서 온몸으로 부정하면서 끼어든다.
“거짓말도 재주껏 해야지, 당시 무슨 여자 택시 기사가….”
순간, 총각 가이드가 살려주었다.
“여기가 교촌(校村)입니다.”
교촌(校村),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이랄 수 있는 향교(鄕校)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 ‘교촌(校村)’으로, ‘교리(校里)’ 또는 ‘교동(校洞)’ 등으로도 불린다. 이곳에는 향교와 최씨 고택 등 전통한옥이 많이 남아 있다. 최씨 고택은 만석꾼 경주 최 부자가 살던 집이다. 어느 블로거는 만석꾼이란 현대식으로 따져 보면 연 수입 20억 원 이상의 부자로 ‘대기업 총수쯤 되지 않았을까’라고 하였다. 12대 동안이나 만석지기를 지켜 내려왔던 것은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육훈(六訓)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육훈이란,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다.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에 보면, 돈 많은 사람들은 너도 나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난리법석이니, 세상 말세라는 생각이다. 돈은 권력과 손을 잡으면 썩게 마련이란 점을 왜 모르는 것인지 안타깝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삼성 가는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부를 누릴 수 있는 소지가 있어 보여서 다행스럽다.
최 부잣집 왼쪽에는 최 부잣집에서 대대로 빚어 온 가양주인 ‘교동법주’를 체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술, 좋은 음식이다. 우(禹)임금은 처음 의적(義狄)이 만들어 진상한 술을 맛보고 나서, 그 감미로운 맛과 기이한 향기에 취하여 이것을 세상에 나돌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술을 금하게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공자도 두주불사였고, 두공부와 이태백, 백낙천과 소동파 같은 중국의 대문호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이규보, 정철, 허균 등의 문인들도 술을 매우 즐겼던 사람들이 아니던가? 스님들도 곡차(穀茶) 또는 지수(智水)라 하여 즐기던 음식이었다. 물론 화천(禍泉)이라는 명칭도 있고,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주를 제외한 술의 통신 판매는 금지시키고 있어 지나친 음주를 경계하고 있지만, 술은 그 통칭에서처럼 약주(藥酒)로서의 지위를 십분 누리고 있는 음식이다.
교촌은 또한 신라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교촌치킨’도 이곳이 시발점이요, ‘교리김밥’을 사 먹으려면 기다란 줄까지 서야 하는 실정이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시림(始林)을 위시하여 내물왕릉(奈勿王陵)도 둘러보았는데, 그곳의 소나무는 마치 거북등짝처럼 보이는 껍질을 달고 있어 그 운치가 그만이었다. 이번 여행은 어떻게 보면 교촌마을이 주가 되는 행보가 아니었나 싶었다.
다음으로 찾아갔던 쪽샘유적발굴관에서는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단체사진을 찍은 일 말고는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대로 한 가지 관심을 끄는 일은 발굴되고 있는 고분의 경우 바깥쪽으로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는 점이었다고나 할까? 일반적인 무덤에서는 보기 힘든 호석이 있다는 점은 서로 함께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면서 살고 있는 서민들과는 다른 신분, 곧 귀족의 무덤일 수가 있어서 어느 정도 귀중한 부장품이 발견될 가능성이 엿보이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유적발굴관을 견학하고 나올 때에는 무언지 모를 허전한 느낌이었는데, 거기에서 나와 좁은 길가를 지나면서 여기 저기 꽃대를 세우고 피어 있는 뽀리뱅이들의 모습을 대하게 되면서 그 울적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 하여 월성(月城) 또는 신월성(新月城)이라 불리는 곳과 안압지(雁鴨池), 첨성대(瞻星臺) 등도 둘러보았는데, 무더운 날씨에 시원스러움을 만끽하게 해 주는 곳으로서는 안압지가 압권이었다. 아울러 첨성대 가는 쪽 들판에도 나름대로 꽃밭 조성을 해 놓고 ‘비단벌레 전기자동차’의 운행, 자전거 대여 등 나름대로의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엿보였지만, 아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2016.5.29.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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