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 문화 체험기4)
바다를 바라보는 값, 하루 5천 원
이 웅 재
이제는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었다. 우리가 머무를 곳은 서귀포 남원에 있는 4성급 금호리조트였다. 체크인을 하려고 하였더니, 사위네가 머물 방은 큰아들 부부와 우리 내외가 함께 묵을 객실과는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조망할 수도 없는 방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예약을 했었는데, 사위가 외국 파견 근무를 위한 시험이 있어서 취소했다가 시험이 연기되는 바람에 다시 예약을 하다 보니 그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그 방은 바다를 조망할 수도 없는 방이어서, 가급적 우리와 가까운 곳이면서 바다도 내다볼 수 있는 방으로 교체를 해 달라고 하였더니, 그러면 만 원을 더 내란다. 이틀을 머물 예정이니까 하루에 5천 원꼴이었다. 성수기 때라면 하루에 3만 원씩을 더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는 값’을 더 내고서야 비교적 우리의 방과 가까운 곳으로 배정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5천 원, 한 달이면 15만 원 내지는 15만 5천 원을 앉아서 버는 셈이요, 1년이라면 182만 5천 원이 공짜로 생기는 셈이 아닌가? 성수기 때라면 물경 1,095만 원어치를 무료로 누리고 있는 셈이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
드디어 한 방에 모였다. 날도 어두워진 터라 다시 우르르 함께 나가기도 귀찮고 해서 저녁은 이 방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리조트 내의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오늘 우리는 조촐한 파티를 할 예정이어서 몇 명만 마트엘 다녀오기로 하였다. 나는 소주와 맥주도 사오라고 했다. 아침에 ‘만세국수’ 집에서 보니까 이곳의 대표적인 소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투명한 병에 들어 있는 21도짜리 ‘한라산소주’였고, 다른 하나는 녹색 병에 들어있는 18도짜리 ‘올레소주’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한라산소주는 ‘하얀거’, 올레소주는 ‘퍼런거’ 또는 ‘순한거’라고 한단다. 나는 ‘하얀거’를 주문했다.
마트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여기서는 고기나 생선을 굽는 일은 냄새가 밴다고 해서 금지하고 있었기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반찬거리들과 고기를 대신할 수 있는 소시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과자 등속과 케이크도 있었다. 사실 오늘은 내 생일날이었던 것이다. 생일을 이렇게 여행지에서 맞게 된 것은 전에도 두어 번 있었다. 그 중의 한 번은 ‘괌(Guam)’에서였다.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이 같고, 서로 한 살씩 줄어 있는 것도 같고, 실제로는 음력인 점도 같은 친구가 있었다. 같은 해에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입학한 것도 같았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한때 같은 학교의 같은 국어 선생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게다가 성(姓)만 달랐지 부인의 이름까지도 같았다. 그런 친구가 느닷없이 괌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해 왔다. 제자 하나가 그곳 호텔의 지배인이라든가? 호텔 숙박비를 무료로 모시겠다고 하니, 왕복 여비만 달랑 준비해서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 친구가 환갑이라는 것이다. 제 환갑이면 내 환갑이니까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국내라면 또 모를까, 혼자서는 무슨 맛에 해외여행을 하느냐고 열을 올리는 바람에 그러면 혹 하나를 더 붙이기로 했다. 역시 같은 대학 입학 동기인 K선생을 동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 K선생이 우리들이 환갑이란 것을 알아내서는, 지하 미니 슈퍼에 케이크와 시바스 한 병을 주문해 두었다가 가지고 와서 오붓하게 생일 파티를 벌였던 것이다.
저녁을 먹고 잠시 오늘의 여행에 대한 환담을 한 후, 케이크에 촛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실내등을 껐다. 실내가 갑자기 깜깜해졌다가 조금 후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은은한 불빛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었다. ‘해피버스데이’를 함께 불렀다. 특히 외손주와 외손녀가 같이 불러주어 매우 기뻤다. ‘후욱!’ 촛불을 끄고 다시 실내등을 켰다.
사방이 밝아지고 새로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케이크가 좋았고, 여자들은 과자와 섞어먹는 ‘수다’에 깨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남자들 셋은 ‘한라산’에다가 맥주를 부었다. 맛 좋은 ‘소맥’이었다. 이태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의 주취(酒趣)도 맛깔스럽겠지만, ‘가족 입회하 대작(對酌)’의 주흥(酒興)도 널널하였다.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딸내미가 조용한 어조로 한 마디 했다.
“이제 그만들 마시시지요.”
가끔 ‘내 방 독작’의 경우, ‘또 술이에요?’ 하는 아내의 말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기는 했지만, 딸내미의 나지막한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것은 ‘김정은의 핵위협’이나 ‘트럼프의 막말’에 버금가는 위력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내 셋은 각기 제 앞에 놓여있는, 술이 약간씩 남은 술잔을 홀딱 입 안으로 털어 넣고, 순식간에 군 복무시의 취침 모드로 전환하였다.
우리 내외는 침대 방을 아들 부부에게 양보하고 장판방을 선택하였다. 하루 종일 바람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고생했었기에 실내온도를 조금 높여 놓았던 탓인지 방바닥이 곧 뜨끈뜨끈해졌다. 아들내미가 군에 입대하여 최전방에 배치되었을 때 면회 가서 지냈던 파주 적성(積誠)의 여관방이 이랬었다. 그곳의 여관방들은 대부분이 그렇게 끓는 방이라고 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도 아들은 잘도 자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우리 내외는 마음이 그렇게 푸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가 그때의 아들 심정으로 역할 바꿈을 해 보는 셈이었다.
(17.1.30. 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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